조카들과 남산구경을 갔던 윤은 구경을 마치고 자유시장에 들러 내게 줄 작은 선물을 사 가지고 왔다. 그 선물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는데 다름 아닌 검은색 가죽 장갑이었다. 윤은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다 보면 손이 시릴 것이니 따뜻한 장갑이 필요할 것이라며 고급진 검정 가죽장갑을 내게 건넸다. 어릴 때만 해도 다소 장난이 심하고 때론 영악한 구석이 있어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던 윤이 따뜻한 선물을 이리 건네주니 나도 모르게 작은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윤가 너 참 많이 변했다. 이런 선물로 사람을 감동시킬 줄도 알고, 많이 컸구먼."
"뭣이여, 내가 니를 얼매나 생각하는지 모르고 그런 소리 허는 겨?"
농담 섞인 나의 반응에 윤은 서운했는지 정색을 하며 서운함을 표현했고, 나는 그런 윤에게 농담이었다는 말로 해명을 해야 했다. 윤이 준 가죽장갑은 부드러우면서 고급진 것이 거울 속 지팡이를 쥔 내 모습이 한결 멋져 보였다.
"니가 말여 인물하나는 내 보다 낫다는 거 인정한다. 니가 지금도 명동에 나가면 모던 보이가 서러워할 만큼 아가씨들 이목이 집중될 거구먼."
"농담으로다가 하는 말 아니면 그런 소리 허들 말어라. 윤아. 전쟁통에 이리 불구가 된 사내를 누가 좋아허겠냐?"
"야, 니 그런 말 말어. 우리 조카도 니 참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던디. 니도 알다시피 우리 질녀가 어디 헛말 허는 것 봤냐? 그 똑 부러진 애도 널 좋게 보는 건 다 니 잘생긴 얼굴에 반듯한 인성 때문 아니겠냐?"
"쓸데없는 소리 허들 말고 어여 씻고나 와."
나는 내심 기분은 좋았으나 그 좋아하는 맘을 윤에게 들킬까 염려되어 윤에게 씻고 오라고 재촉을 했다. 내일 아침엔 윤이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며 일찍부터 준비하고 잠이 들었다.
몇 시가 되었을까? 아직 밖은 동이 트기 전 같은데 주인집 식모 아이가 급하게 윤을 깨웠다.
"저기유. 조카분한테서 전화가 왔는디유.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어유."
아른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에 잠이 깬 윤은 다급히 옷을 챙겨 입고 전화를 받으러 주인집 거실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낯빛이 어두워진 윤이 방으로 왔다.
"최가야, 어제 남산 갔다 추워서 그랬는지 큰 조카가 고열이 심해 밤새 잠을 못 자고 시름시름 앓았다고 한다. 니가 내 대신 병원 좀 같이 가줄 수 있지? 기만이는 면접 보러 가야 하고, 기창이는 핵교 가고 나는 지방 출장이 있어서 부탁하는 건디 되겄지?"
"뭐여? 누가 아프다고?"
나는 큰 조카가 아프다는 윤의 말을 진작에 알았들었으나 걱정스러운 맘이 컸던 탓에 큰 소리로 되물었다.
"큰 조카 순열이가 아프다는구먼."
"그랴 걱정 말드라고. 내 오늘 할 일도 없었으니께 같이 가면 쓰겄구먼."
윤과 나는 서둘러 준비를 하고 조카집으로 향했고, 윤은 그 길로 나와 큰 조카를 병원까지 태워다 주고 출장길에 올랐다. 나는 차에서 내려 열이 올라 불덩이 같은 그녀를 부축해 병원 문을 향해 걸었다. 가뜩이나 작고 여윈 그녀가 열로 몸이 달궈지면서 탈수까지 온 그녀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자 내 손 잡고 걸어요."
그녀는 내 어깨에 잠시 몸을 기대되는 듯하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 후 의사가 진찰을 하기 시작했다. 체온을 재고 청진기로 숨소리를 듣고 일련의 기본 진료를 한 의사는 간호사에게 환자에게 놓을 주사액을 준비시켰다.
"환자와 어떤 관계죠?"
"제 친구 조카인디..."
"친구 조카인데 병원까지 같이 오나요?"
의사는 보호자에게 늘 묻는 질문인데 사뭇 진지하게 골똘히 생각하고 대답하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고열로 인한 탈수 증세로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 너무 걱정 말고 잘 먹고 쉬면 되니 옆에서 잘 간호해 주세요. 애인이 작고 야위어서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선생님."
내 또래의 젊은 의사는 농담 같은 말을 남기고 병실을 빠져나갔고 부쩍 수척해진 그녀와 나만 병실에 남았다. 친구 조카라고 했는데 애인이라고 말하는 의사는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는 것인지 내 행동이 남이 보기에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요. 열이 많이 나서 탈수 증세로 쓰러졌었고, 수액 맞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의사가 말했으니 그리 알고요."
"지금 몇 시나 되었남유."
"10시 좀 넘었는디 왜요?"
"기만이 소식은 없었쥬?"
"면접 보는 사람이 꽤 있어서 오전 안에는 안 끝날 것 같다고 그러던디. 좋은 소식 있겄지요. 어서 나을 생각이나 해요."
'저 토할 것 같이 속이 안 좋은데 어떡해유?
"잠깐 기다려요. 간호사 불러올게요.'
나는 간호사에게 그녀의 증상을 말했고, 의사와 간호사가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환자분, 열이 심해서 탈수 증세로 그런 거니까 미지근한 물 많이 마시고 약 잘 챙겨드세요. 밥도 잘 드시고요. 무엇보다 퇴원 후 안정을 취하세요.
수액을 다 맞는데까진 한 시간 가량이 더 걸렸고 그녀와 난 간호사가 불러 준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방 구들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나는 곧장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폈다. 그 불에 솥을 걸고 흰 죽을 쑤어 간장 종지와 함께 상을 차려 방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기운이 없는지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내가 떠 먹여 주는 죽을 겨우 받아먹었다.
"감기엔 휴식이 최고니께 어여 자요. 난 이만 가볼테니께. 곧 기만이 올 것이니 걱정 말고."
약을 먹고 약기운에 취한 그녀는 이내 잠이 들었고 나는 방을 나왔다.
다음날 윤은 출근을 했고 홀로 남아 방에서 조간 신문을 읽고 읽는데 기만이와 그의 누이가 나를 찾아왔다.
"형님, 아침은 드셨유?
"어이 기만이 왔어."
"어젠 고마웠구먼유. 형님 덕에 제 누나가 죽다가 살아 났유. 그런 의미로다 식사 대접 하고 싶은 디 명동 가시겄유?"
"왜 대낮부터 술이라도 마실 건가?"
"술은 아니구유. 영화나 보시는 거 어떠유? 명동 극장에서 재미난 영화 상영 중이라고 하던디유."
"영화? 좋지. 다 같이 가 보면 좋겠네."
"그런디 지는 오늘 어제 면접 본 법원에 합격 여부 보러 가야 해서 누나랑 둘이서 보고 오셔야 헐 것 같유."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 됐구먼요."
그렇게 그녀와 나는 단둘이 영화를 보러 명동으로 가기 위해 전차를 탔다. 중앙청 근처에서 전차를 타고 을지로를 향하는 전차 안에서 그녀와 나는 조용히 거리만 보며 말없이 갔다. 전차에서 내리고도 명동극장까지 가는데도 거리가 좀 있어서 우리는 또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극장에 도착하니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매표소 줄에 섰다. 오늘 상영하는 영화는 <이별>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사랑도 시작하기 전에 이별이라니 난 영화 제목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가장 인기 있는 영화라고 하니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더 기다리지 않고 곧 상영하는 영화표를 끊어 극장 안으로 들어가 영화를 봤다. 그녀는 영화에 몰입해 주인공의 이별 씬에서 눈물을 연신 흘렸다. 내 눈에는 영화 속 여주인공보다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더 예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