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결말의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전차를 타기 위해 잠시 걸었다. 우리가 걷는 동안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눈을 맞으며 길을 걷다 보니 덕수궁이 보였다. 덕수궁, 구한말 자주독립국을 위해 애를 쓰다 이곳 덕수궁에서 고종황제가 생을 마치셨다는 이야기를 큰 형님께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시오?"
"대한문? 어떤 곳인데요.?"
"우리의 황제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시고 잠든 곳이라오."
"그런가요? 슬픈 역사가 깃든 곳이네요. 그런데 이 궁 안에 들어가보셨나요?"
"아직 못 가보았는데 다음 만남 때 같이 가보면 어떻겠소?"
"지금 데이트 신청하시는 것이지유?"
그녀의 당찬 물음에 난 잠시 머뭇 거렸지만, 이내 그렇다는 무언의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냥은 승낙 못 하고요. 외삼춘이 약혼녀에게 한 것처럼 고백은 해야 하지 않겠어유?."
"무슨 고백말이오?"
"아니 좋아한다는 말도 안 듣고 데이트하는 거 봤남유?"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나는 주저주저하다가 고백을 했다.
"좋아하니까 데이트하자 하는 거 아니겠소?"
"그 말 참말이 지유?" 그럼 삼촌이랑 기만이 기창이 앞에서도 똑같이 말해야 해유."
나는 부끄럽지만 그러마 하고 그녀에게 약속을 했다. 그리고 다음 데이트는 덕수궁에서 하기로 약속을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그녀의 손이 내 손등에 스쳤다. 나는 쑥스러운 마음 감추고 가죽 장갑을 벗어 그녀의 손에 끼어주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도 싫지 않은지 손을 빼지 않았다. 우리는 두 손을 잡은 채 계속 길을 걷다 보니 전차를 타야 하는 역을 지나쳤다. 그렇게 걸어서 종로까지 가버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전차를 타고 중앙청을 지나 재동까지 갔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오늘 재밌었구먼유. 다음 약속 시간은 전화하시구유."
적극적으로 다음 약속을 확인하는 그녀가 귀엽기도 하고 당돌한 나머지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윤의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윤은 일찍 퇴근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있었다.
"오늘 큰 조카랑 영화 봤다며? 영화 보고 더 뭐 하다 온 겨? 좀 늦었는디."
"딱히 한 건 없는디. 기냥 손잡고 명동부터 종로까지 걸어 왔구먼."
"뭐여? 이 추위에 걸어왔다고. 우리 조카 병원 갔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리 했냐?"
"아차, 내가 그 생각을 못 했구먼. 괜찮은지 전화라도 해볼까?"
"되었어. 괜찮으니께 연락 없겄지. 근디 니 기분 좋아 보인다."
"이잉, 오늘 좋아한다고 고백했구먼. 다음 데이트 장소로 덕수궁 가는 약속도 했구."
"그랴 벌써 그렇게 진척이 된 것이여? 이젠 직장만 구하면 되겄구먼. 이참에 내가 먼저 번부터 말한 일 해볼 테야?"
"그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디 말여."
"아니, 그 몸으로 번듯한 직장 들어가긴 힘들텐디 내가 잘 부탁도 해 놨응게 일하는 데는 그리 힘들진 않을겨. 잘 생각 좀 혀봐."
"그게 말여. 내는 옛날부터 정치엔 관심도 없고, 특히나 이정재 같은 무리에서 일하는 것 같은 건 더더욱 나랑 안 맞는 일이라."
윤은 극구 사양하는 나에게 더 권하지는 않았으나 못내 아쉬워했다. 그랬다. 휴전 후 제네바회의를 통해 남북의 통일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지고,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 중임재를 넘어서 영구적인 권력을 누리려는 꼼수를 부렸다. 대통령 종신제로 개헌하려는 찬반투표에서 사사오입을 주장하는 억지 논리로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였던 것이다. 그를 위해 동대문 조폭 출신 이정재를 자유당 간부로 앉히는 상황에서 내가 자유당 당사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옳고 그름을 흩트리면 안 된다는 나의 철칙을 고수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