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을 받다.

by 자강



어젯밤 윤의 제안은 제법 거절하기 힘든 자리였다. 정국은 여당인 자유당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었고 내후년에 있을 부통령 선거까지는 멀었다 치더라도 당장의 대통령 선거를 위해 자유당은 모든 힘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힘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이 연로한 지라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이 남한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지만 여당인 자유당 입지가 좁아질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렇다고 내 이익을 위해 정의롭지 못한 방법까지 동원하는 그들의 꼼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윤과 나의 생각이 갈리다 보니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이쯤에서 난 윤의 생질인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윤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서 당장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 이곳 서울에서의 생활은 더 이상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난 윤이 출근한 후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국동을 지나 일제 때 형님과 군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처음 경성에 와 보았던 탑골 공원까지 걷게 되었다. 그때 보았던 탑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는데 큰 형님은 세상을 뜨셨고 나는 한 다리를 잃고 갈 곳 몰라하는 신세가 된 것 같아 씁쓸한 기분만 들었다. 그런 내가 멍하니 탑 끝을 응시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나에게 알은 체를 했다.


"아니, 저 최동지 동생분 아니시오?"


중절모에 양복을 차려입고 겨드랑이에 신문 뭉치와 서류 봉투를 낀 중년의 사내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누구신지요?"


"나를 몰라 보시겠오? 단동에서 최동지와 함께 본 임선혁이오."


'임선혁?'


난 이름을 듣고도 그가 누군지 선뜻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그 사내가 말을 이어 갔다.


"최동지와 함께 독립 군자금 전달을 하러 왔던 일 기억 안 나시오? 이름이 모석이라고 했잖소."


나는 그제야 그 중년의 사내가 큰 형님과 내가 군자금을 전달하러 갔을 때 단동에서 대련까지 길 안내를 해줬던 임선생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 임 선생님. 이제야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해방 후 서울로 들어오신가 보군요."


"네, 맞습니다. 해방 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임정 사람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지요. 자 이러지 말고 어디 차라도 하며 이야기 나누러 갑시다."


임선생이라는 분은 이곳 지리를 잘 아는 듯 나를 근처에 있는 찻집으로 데려갔다.


"아니, 이게 얼마 만 이오. 내 최 선생의 안타까운 소식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리는 어쩌다 그리 되었습니까?"


"네, 대한민국 건국 직후 입대하고 전쟁통에 이리되었습니다. "


"이리 애석한 일이 다 있을까요? 그래 서울에서 사십니까?"


"아닙니다. 어릴 적 친구가 경무대 소속 직업 군인인데 지금은 중앙청에서 근무 중이라 만나러 왔습니다. "


"그럼 일자리는 구하셨오?"


"중앙청 근무하는 친구가 자유당 당사에서 일해 보라고 자리를 마련해 줬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저와는 뜻이 다른 이들과 일할 수가 없어서요."


"자유당 것들이 요즘 하는 짓들은 눈뜨고 볼 수가 없지요. 어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정권을 유지하려 하고 이 대통령도 사리분별력이 떨어진 건지 독립운동하던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만 바라보고 있어도 안 될 판에 사리사욕만 채우는 정치판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저는 정치판은 잘 모르지만 깡패까지 동원해서 정치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잘 결정하였습니다. 아마 최 선생이 살아 있었다면 잘했다고 칭찬했을 겁니다. 그럼 혹시 내가 하는 일을 같이 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내가 작은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기사 교정하는 일을 해보사면 어떻겠오?"


"절 어찌 믿으시고 그런 일을 맡기시는지요? 그리고 전 가방끈도 짧아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


"요즘 공부 좀 했다 하는 젊은 애들 데려다 일 시켜보면 죄다 머리가 텅 비었어요. 한자도 잘 모르고 부모 잘 만나 대학 교육까지 받아서 그런지 인성도 그렇고... 우선 정치적 성향도 그래요. 근데 최 군은 아버님이 훈장 선생님이셨던 덕에 사자소학부터 명심보감 등 한자 공부를 많이 했다는 소리를 최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올곧은 성품이 안성맞춤입니다."


"제가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수습기간을 지나면 정식 직원으로 채용할 거니까 우선 당장 내일부터라도 사무실로 출근해 일을 배워 보면 어떻겠습니까? 사무실은 경희궁 근처 신문로에 있어요. 내가 주소를 적어줄 테니 내일 아침 9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임선생이라는 분은 명함과 함께 주소를 종이를 내게 건네고 약속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 찻집을 나갔다. 나는 너무 급작스럽게 정해진 일이어서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 내일부터 일을 배우러 오라고 하니 간다지만 이 결정이 잘하는 것인지 신문사의 성향이 어떤 곳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채로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염려되어 갈지 말지 갈등이 일어났다. 한참을 그리 고민을 하며 찻집에 머물다 정오가 넘어서 윤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임 선생이 적어준 주소로 서둘러 출근을 했다. 윤에게는 아직 말을 하지 않은 터라 외출하는 이유를 둘러대야 했지만 회사일로 바쁜 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보였다.


사무실은 경희궁 근처 4층 건물의 2층에 위치해 있어서 계단을 올라야 했다. 한 다리로 지팡이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계단과의 사투를 벌이고 2층에 다 오르자 밀어서 들어가는 커다란 나무문이 보였다. 그 문 옆으로는 신문사 이름이 생겨진 현판이 보였다. 그 문을 밀고 들어가 임 선생을 찾아왔다고 말하니 여직원이 나를 임 선생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용캐도 잘 찾아왔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우리 커피 두 잔만 부탁해요. "


임 선생님은 신문사 주간이라고 자기를 소개했고 그곳에서 발행하는 신문들을 읽어보라며 탁자 위에 신문들을 갖다주었다. 신문은 조간 일간지였고 사설 내용을 읽어 보니 자유당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야당과 결을 같이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에 임 선생이 먼저 신익희선생을 언급했다. 이승만과 조봉암이라는 극명한 노선에서 중도를 표방한 신익희선생을 언급한 임 선생이 몸담은 신문사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망설였는데 이를 눈치챘는지 임 선생이 먼저 내게 이야기를 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했으니 정당에 입당하거나 정치적 활동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 최 선생과의 오랜 우정도 있고 당장 먹고살 일도 걱정인 것 같아 이 일을 권한 것이니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나는 임 선생이 한 말을 되새기며 어찌할지를 생각할 시간을 달라 부탁하고 신문사를 나왔다. 이 일을 누구와 의논해 결정할 것인지 당장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큰 형님이 계셨다며 어떤 조언을 해주셨을까. 답답한 내 마음처럼 밖으로 나와 올려다본 하늘은 내 마음과 같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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