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를 나와 길을 걷다 집으로 돌아오니 무슨 일인지 윤이 와 있었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안 되었는데 윤이 집에 온 것이 나는 걱정이 되었다.
"워쩐 일이어. 벌써 집에 오고?"
"이잉, 몸살 기운이 들어서 반차 내서 왔구먼. 그란디 니는 어디 갔다 오는겨?"
"잉 그렇지 않아도 너랑 좀 의논할 것이 있구먼."
"뭔디 그려? 연애 상담하려는 거여?"
"아니여, 내가 어제 말여. 탑골 공원 갔다가 왜정 때 큰 형님이랑 독립 운동하시던 분을 만났지 뭐여."
"그래서?"
"찻집에 가서 차 마시면서 내 보고 일을 같이 해보자고 허더라고. 작은 신문사 하나 운영하는디 교정일 한 번 해보면 어떻겄냐고 묻는디 아직 대답 안 했구먼."
"그런 일이 있었구먼. 나는 괜찮다고 보는디 넌 워뗘? 내가 니 일자리 마련해 줬는데 니가 거절해서 내 기분 상했을까 걱정돼서 그런 거면 신경 안 써도 되는구먼."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구먼. 근디 그 신문사 신익희 선생 지지하는 거 같던디 난 정치엔 관심이 없지만 정치 색깔 빼고 기사만 쓰는 신문사에서 일하고 싶어서 좀 고민이 되는구먼."
"그랴? 내도 뭐 대통령 경호허는 일 허지만 다 내 맘 같지는 않어. 니가 내 소개로 만들어 준 일자라도 마다한 이유랑 대동소이하구먼. 근디 당장 그 몸으로 워디서 일이나 헐 수 있겠어? 큰 형님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분이면 성품은 좋을 것 같은디 일단 해보고 정 안 맞으면 그만두지 그려."
"그래 니 덕분에 고민이 좀 덜어졌구먼. 임 선생께 연락부터 해 봐야겄다."
윤은 내가 신문사 출근을 하기로 결심하자 양복을 맞춰주겠다며 나를 양복점으로 이끌었다. 명동 어느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윤이 조카 집에 들르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못 본 지 이틀이나 되었다. 그녀는 무얼 하고 있을까? 잠시 잊고 있던 그녀가 눈에 아른거려 마음이 분주했다. 윤의 차는 평일 오후 운종가를 달려 재동으로 향했다. 윤의 조카집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날이 추운데도 찬물에 빨래를 하고 있었다.
"아이고 삼춘 오셨유."
"그랴 우리 조카 손 시릴 탠디 찬물에 빨래하고 있는 겨?"
"야, 기창이 교복 싸쓰 빨고 있었구먼유. 근디 어쩐 일이 세유. 출근 안 허셨유?"
"이잉, 이래저래 머리도 아프고 몸살 기운 있어서 반차 내고 퇴근했는디 최가 신문사 취직허게 되었다고 해서 양복 한 벌 맞쳐주고 왔다."
"참말이어유? 정말 잘 되었네유. 그롬 내일부터 가남유?"
"그럴 듯싶습니다. "
그녀가 나보다 더 기뻐하는 걸 보니 나도 더 기쁜 맘이 들었다. 나는 그 길로 임 선생에게 내일부터 출근을 하겠다고 전하고 저녁 무렵이 되어 윤과 그의 조카들과 함께 조촐한 축하 자리를 가졌다.
"형님, 축하해유. 지만 먼저 취직해서 쪼끔 미안했는디 형님도 이리 번듯한 직장을 구하니 참말로 좋네유. 이젠 결혼만 허시면 되겄어유."
"그랴 색시감은 있으니 결혼식만 허면 되겄구먼."
"색시감이 어디 있다구 그러는 겨?"
"아니 눈앞에 나 두고 시치미 때 기여. 우린 다 찬성이여. 매형이랑 사돈어른만 설득하는 일 남았지."
"삼춘, 전 청혼도 못 받았으니 그리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말씀허시면 어떡한데유. 왜 제 의사는 안 물어보고 결혼할 것처럼 분위기 몰아가는감 말이어유?"
"야, 니 둘 허는 것 보면 답이 다 나오지 뭐여. 야, 최가는 너 처음 길쌈하는 거 봤을 때부터 호감이 있었구 니는 야 기만이 데리러 안면도 갔을 때부터 아닌감? 연애 소설도 너무 질질 끌면 재미 읎어. 안 그런겨?"
윤의 말에 모두가 동감이라는 표정으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본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나와 성혼해 줄래요? 평생 당신만 섬길게요."
옆에서 지켜보던 기창이가 소주뚜껑으로 만든 반지를 장난스레 내게 건네며 눈짓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장난을 받아주는 척하며 나의 청혼을 승낙한다. 아, 이 상황이 맞는 걸까? 돈도 없고 몸도 성치 않은 내가 저리도 사랑스러운 사람의 짝이 되는 건 욕심이 아닐까? 꿈만 같은 시간이 현실과 꿈속을 오가듯 몽롱함에 빠져 소주잔을 드리킨다.
나는 만일 이 순간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어젯밤 숙취로 머리는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으나 난 첫 출근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윤의 도움으로 신문사까지 편하게 출근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윤의 차가 가고 난 계단을 올랐다. 좀 이른 출근이었는데도 신문사 안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되었다.
"아, 최 군 어서 와요. 저쪽으로 앉아요. 오늘 갑자기 큰 사건이 터져서 좀 일찍들 출근했어요. 저기 이 기자가 교정 일 가르쳐 줄 거예요. 이따 점심 같이 먹읍시다. 난 취재가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 거예요."
황급히 취재 수첩을 들고 임 선생이 사진 기자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나는 내 사수가 될 이 기자가 있는 자리로 갔다.
"반가워요. 최 군. 나 이철수요. 여기서 일한 지는 3년 되었어요. 임 선생님 밑에서 많은 은혜를 입고 있지요. 자 여기 앉아요. 교정은......."
사수 이철수 교정부 기자의 기나긴 설명은 이어지고 나의 두 번째 직장인 신문사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신문사답게 신문 잉크 냄새와 분주한 사람들의 발걸음 말소리에 정신이 없이 시간이 흘렀고 저녁나절에 되어서야 시계를 볼 수 있었다. 시계의 바늘은 오후 6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 첫날이라 정신없었을 텐데 환영회는 금요일에 해야 될 것 같군요. 마감이 아직 안 된 기사들이 있어서요. 최 군은 오늘 먼저 퇴근하세요. 내일 봅시다."
아직 기사를 못 넘긴 선배들을 뒤로하고 나는 신문사를 나왔다. 붉은 해가 지고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경운궁을 지나 경복궁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일은 고되지만 뭔가 삶이 펄떡이는 활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 떠오르겠지. 나는 열심히 살아보자는 다짐을 하며 퇴근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