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른 탓인지 집에 도착한 나는 오한이 느껴져 저녁도 거른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있었다. 이젠 시골집에 내려가야 하는데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하니 큰 일이다 싶었다. 당장 아침이 되면 기창이는 학교에 가고 삼춘도 출근을 하는데 법원 서기 면접 보러 가는 기만이와 병원을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상태에서 혼자 병원을 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맘을 졸이며 누워 있는데 씻기 위해 일어난 기만이가 내 이마를 짚어보고 깜짝 놀라며 병원을 가자고 했다.
"누나, 괜찮은 겨? 몸이 불덩이 같은디."
나는 괜찮다고 면접 준비나 빨리 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목이 붓고 오한이 들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기만이는 병원 문이 열리자마자 가자고 채근했다.
"기만아, 그러지마. 내가 알아서 병원 갈게 면접이나 잘 보고 와."
말할 힘도 없으면서 어찌 병원을 혼자 간다고 그려. 내가 같이 못 가면 형님하고라도 가면 어떠?"
기만이가 말하는 형님이라면 그를 말하는 거였다. 지금 나와 병원까지 함께 가줄 시간이 있는 사람은 그뿐인 것이 맞는가라는 생각을 내가 미처 하기도 전에 기만이는 주인집 전화를 빌려 삼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의 몸 상태를 설명했고 나와 병원을 동행해 주겠다는 그의 약속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삼춘의 차를 타고 그가 왔고 그와 나를 태운 삼춘은 병원에 우릴 내려주고 출근을 했다.
"자 내 손 잡고 걸어요."
나는 내외할 사이도 없이 고열로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그의 어깨애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 후에는 기억이 없다. 나는 진료를 받기도 전에 의식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땐 오른팔에 수액을 맞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요. 열이 많이 나서 탈수 증세로 쓰러졌었고, 수액 맞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의사가 말했으니 그리 알고요."
"지금 몇 시나 되었남유."
"10시 좀 넘었는디 왜요?"
"기만이 아직 소식 없었쥬?"
"면접 보는 사람이 꽤 있어서 오전 안에는 안 끝날 것 같다고 그러던니. 좋은 소식 있겄지요. 어서 나을 생각이나 해요."
그는 동생 걱정하는 나에게 나 먼저 챙기라는 말을 하고 좀 더 잠을 자라고 했다. 그래 내가 아프면 동생들도 못 챙겨주니 그의 말이 맞다 싶어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으니 혈관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수액이 내 몸을 돌고 있는 느낌이 느껴졌다. 오른쪽 팔을 타고 들어온 그것은 나의 혈관을 타고 오른쪽 어깨를 넘어 목을 타고 들어와 심장으로 폐로 돌고돌아 내 몸 곳곳을 누비는 듯했다. 그리고 입에선 소독약 냄새 같기도 한 것이 밍밍한 맛 같은 것이 느껴져 속이 매쓰거워졌다.
"저 토할 것 같이 속이 안 좋은데 어떡해유?"
"잠깐 기다려요. 간호사 불러 올게요."
그가 일어나 간호사를 부르러 갔고 잠시후 의사가 간호사가 함께 나를 보러 왔다.
"환자분, 열이 심해서 탈수 증세로 그런 거니까 미지근한 물 많이 마시고 약 잘 챙겨드세요. 밥도 잘 드시고요. 무엇보다 퇴원 후 안정을 취하세요."
의사는 별다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주의사항만 이야기하고 가버렸다. 수액을 다 맞은 나는 그의 보호를 받으며 퇴원해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방에 이부자리를 깔아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주고 죽을 쑤어 주었다. 나는 어미새에게 먹이를 받아 먹는 아기새가 되어 그가 챙겨 주는 죽과 약을 먹었다.
"감기엔 휴식이 최고니께 어여 자요. 난 이만 가볼테니께. 곧 기만이 올 것이니 걱정 말고."
약을 먹고 약기운에 취한 나는 스스르 눈이 감겼고 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얼마나 잤을까 기만이와 기창이가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일어났는겨? 아이고 형님 덕분에 누나 살아난 겨. 열도 이젠 내리고 한결 나아 보이는구먼. 괜찮아졌는겨? 워뗘?"
"응 이젠 오한 드는 건 없어졌어. 그나저나 나 때문에 고생했을텐데 어쩐다냐?"
"뭘 어째. 고맙다고 인사나 하믄 돼지."
"면접은 잘 본겨?"
"삼춘이 가르쳐준대로 대답은 혔는디 모르겄구먼 워낙 잘난 사람들이 많이 왔더라구."
"그랴? 최선을 다했으면 되었어. 그 뒷일은 운명에 맡기면 될 거고 저녁들은 먹은 겨?"
"주인집 아주머니가 챙겨주셔서 먹었구먼."
내일 아침엔 몸을 추스르고 그를 만나 고마움의 인사를 전해야겠다. 창밖을 보니 별들이 총총히 떠 있고 교회 십자가가 발게 빛나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나는 기만이와 함께 삼춘집으로 향했다. 삼춘은 오늘 지방 출장이 있어 새벽부터 집을 나섰고 삼춘의 허숙집엔 그만 홀로 있었다.
"형님, 아침은 드셨유?"
"어이 기만이 왔어."
"어젠 고마웠구먼유. 형님 덕에 제 누나가 죽다가 살아 났유. 그런 의미로다 식사 대접 하고 싶은 디 명동 가시겄시유?"
"왜 대낮부터 술이라도 마실 건가?"
"술은 아니구유. 영화나 보시는 거 어떠유? 명동 극장에서 재미난 영화 상영 중이라고 하던디유."
"영화? 좋지. 다같이 가 보면 좋겠네."
"그런디 지는 오늘 어제 면접 본 법원에 힙격 여부 보러 가야해서 누나랑 둘이서 보고 오셔야 헐 것 같유."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됐구먼유."
그렇게 그와 나 단둘이 전차를 타고 영화를 보러 명동으로 가기 위해 전차를 탔다. 중앙청 근처에서 전차를 타고 을지로를 향하는 전차 안에서 조용히 거리만 보며 말없이 가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는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까지 내 마음에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는 따뜻한 그의 마음이 너무나 궁금했다. 전차가 명동 근처에 도착하자 그와 나는 전차에서 내려 극장으로 향했다. 연말이어서 그런 건지 극장엔 사람들로 붐볐고 매표소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는 나에게 극장 앞에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영화표를 끊기 위해 줄울 섰다. 긴 줄 사이로 그가 보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영화표를 끊어 그가 왔다. 우리는 운 좋게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상영하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사랑하는 남녀가 이별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다룬 영화였는데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는 여주인공이 너무나 예뻤다. 내가 남자였다면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배우의 미모에 흠뻑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은 할 때는 한없는 기쁨을 주지만 이별은 끝없는 후회와 슬픔만 남기니 난 사랑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이별없는 사랑을 하리라는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