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출근 삼일째 되던 날 나의 입사 환영식으로 회식이 있었다. 장소는 종로 어느 고깃집. 임선생님의 축하 말씀을 시작으로 막걸리잔이 오고 가고 임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배 기자들의 격려와 환영 인사를 들으며 시간이 흘렀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임선생님은 술기운을 빌려 큰 형님 얘기를 했다.
"아 이리 허망하게 일찍 갈 줄 알았으면 해방이 되기 전이라도 한 번 더 볼 것 그랬어. 내가 동문 시절에 얼마나 최형울 좋아했는지 아시오?"
"네? 선생님."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긴 데다 성품과 지성을 두루 갖춰서 모든 이들이 좋아했던 최 선생이 동문 중에서도 볼품없고 인기 없던 내게 친구가 되어주면서 용기를 얻었지요."
임선생님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고 술자리를 파할 때쯤 내 사수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향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임 선생의 뒷모습에서 큰 형님과의 추억이 묻어 나와 나도 모르게 차가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도 취했구나.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귀가했다.
다음날 아침 숙취로 다소 힘이 들었지만 오전 근무만 하면 되기에 출근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어제의 술자리에서 오고 갔던 한숨과 지침은 온데간데없고 모두들 각이 선채로 열심히 뭔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새해가 되고도 일주일이 되었지만 달라진 건 없는 정치판이 느긋한 직장 생활과는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교정 일은 다행히 오전에 다 끝낼 수 있었서 나는 오후에는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내일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덕수궁 데이트가 있는 날 오늘 오후에는 기력을 충전하고 내일을 준비해야겠다.
일요일 아침 데이트가 있는 날 난 좀처럼 바르지 않던 머릿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한껏 멋을 냈다. 큰 형님이 사주신 맥고모자까지 쓰고 보니 거울 속에 내가 멋져 보였다. 일요일이었지만 윤은 중앙청에 잠깐 들리러 나갔고 나는 재동으로 갔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도착한 나는 문고리를 힘껏 두드렸다. 잠시 후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가 나왔다.
"어이구 일찍 오셨네유. 지는 아직 준빌 덜 했는디."
지금도 충분히 예쁜데 뭘 더 준비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가다리겠다는 말을 하고 10여 분을 기다리니 그녀가 나왔다.
"동생들 점심 미리 챙겨 놓고 오느라 고유."
그녀가 나를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했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그 옹알종알 생긴 모습이 사랑스러워 연신 웃음이 나왔다.
전차를 타고 이동한 우리는 요즘 젊은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덕수궁 돌담길은 일제 때 영성문을 헐고 정동까지 신작로가 뚫리면서 조성된 길이다. 영성문은 원래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의 출입문이었다. 일제가 고종의 붕어 이후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을 대폭 축소하는 과정에서 궁역의 중간을 잘라 길을 내고 담을 쌓은 것이다. 이 덕수궁 돌담길은 조성 당시부터 ‘사랑의 길’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길 양편에 조성된 덕수궁과 미국·영국 대사관의 돌담이 높고, 담 안의 나무들이 내뻗은 울창한 가지가 ‘자연의 터널’을 이뤘다는 것이다. 그랬으니 연인들의 은밀한 연애장소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무가 잎을 모두 떨군 겨울인 지금은 울창한 가지를 볼 수는 없었다. 그런들 어떠랴 그녀와 함께 한다면 장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녀가 말 수가 적다. 웃음기도 없고 나는 왠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런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유. 삼춘이 아버지께 지 성혼 얘기하셨는디 엄청 노하셔서 말도 지대로 못 했다는 구먼유. 어떡해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먼유. 그럼 내가 같이 승낙받으러 가면 안 되겄어유?"
"같이유?"
"원래 그래야 허지 않겄유. 나야 조실 부모해서 매파를 보내고 할 여건도 안 되구, 성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인디 직접 뵙구 승낙 받아야지유."
"그럼 언제가 좋겄유?"
"그건 내가 윤이랑 같이 의논해서 정해도 되겄쥬? 윤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유."
"지도 그리 생각해유. 기창이도 방학 했으니께 집에도 갔다 올 겸 다 같이 가유."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어야 하니 마음을 한데 모아야 하기에 우리는 의기투합을 했다. 걱정이 다소 해결되었는지 그녀가 웃는다. 우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궁 안으로 들어갔다.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화려한 석조전과 법전인 중화전 등 덕수궁 곳곳을 돌아보고 나온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다방에서 차를 마신 후 집으로 돌아왔다.
덕수궁 데이트가 있은 후 오래지 않아 윤의 차를 타고 모두가 그녀의 고향집으로 향했다.
"어이구 최가야. 니 맘 단단히 먹어라. 우리 매형이 겉으론 순해 보이고 사람이 좋아서 손해도 많이 보고 산다지만 고명딸에 대한 사랑하는 맘은 아주 대단하시다."
"내 익히 짐작이 가는구먼. 나 같어두 애지중지 옥같이 키웠을거여."
"그랴 그리 맘먹었으면 되얐다. 근디 기창이 방학하고 첨 집에 내려가는 거지?"
"야, 할머니도 보고 싶고 아버지도 보고 싶고 동네 친구들도 보고 싶어요."
"그랴 이 참에 집에서 좀 쉬다 와 삼춘은 하룻밤만 자고 다시 서울 가야 해서. "
"삼춘, 형도 출근해야 하는디 같이 가야 허지 않어유?"
"그러고 보니 우리 막내만 남게 생겼네. 괜찮은겨?"
"지가 뭐 애인가유? 그런 걱정을 허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차는 어느덧 그녀의 고향집에 다다랐다. 서율 생활이 익숙해졌는지 시골 마을의 풍경이 잠시 낯설었지만 이내 친밀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려 그녀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머니, 아버지, 지들 왔유."
막내 기창이가 사랑으로 향하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에 사랑방 문이 열리고 노쇠한 어르신이 마고자에 솜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나오셨다.
"아이고 이게 누구여. 추운디 어서들 들어와."
어르신은 기쁘게 우리를 맞았고 어수선한 소리에 그녀의 계모가 사랑채로 왔다가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엇인가 눈치를 챘는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자네 우리 마실 차랑 애들 먹을 주전부리 좀 챙겨 오더라고."
어르신의 말에 안채로 향하는 그녀의 계모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안채 부엌으로 향했다.
윤, 기만이, 기창이, 그녀 그리고 나 모두가 방으로 들어가니 그 큰 방이 좁아 보였다.
"다들 잘 지냈남? 내 처남이 연통 넣어준 덕분에 큰 걱정은 없이 있었다만 서울 생활이 고되지?"
"전 핵교도 재밌고 볼거리도 많은 서울이 좋구먼유 아버지."
"그랴 기만이 법원 서기 일을 할 만은 허고. 내 니가 머리 깎고 절 들어갔을 땐 식겁했다. 그란디 지금은 두 발 뻗고 잔다. 이젠 혼인만 하문되겠어."
"그래서 그런디 순열이 말이어유 매형..."
어르신은 앞에 전화 상으로 이미 들은 우리의 혼사 얘기를 꺼내려는 윤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기만이와 기창이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시방 내 보고 이 혼인을 허락하라는 말이여? 처남."
"어르신 제가 언감생심 따님을 흠모하게 되어 혼인 결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많이 기우는 혼사인 건 알지만 정말 잘 살겠습니다. 그러니 넓으신 아량으로 승낙해 주십시오."
"뭣이여? 시방 그 성치도 않은 몸으로 우리 아이랑 성혼을 하겠다는 말이여?"
나의 다짐에 어르신의 노여움은 내게 목침을 던지는 일로 표출되었고 목침을 맞은 내 이마에서는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고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 여유?"
내 이마에 흐르는 피를 보고 적잖이 놀랐는지 그녀가 큰소리로 역정을 냈다. 사실 이런 그녀의 행동은 오히려 불쏘시개가 되어 어르신의 화를 더 키울 것 같아 나는 염려되었다.
"되었다. 니 둘은 나가고 처남은 내 할 말이 있으니 남드라고."
그녀는 붉은 피를 보고 놀라 치맛단을 찢어 내 이마의 피를 닦았고 나는 그녀와 함께 방을 나왔다.
"에휴 어쩐대유. 지송혀유 아버지가 성정이 저런 분이 아니신디 원체 놀라고 화사 나셔서 그런 거 같어유."
"미안한 건 난데 왜 그쪽이 사과를 해요. 어르신 말씀 다 맞는데 내가 언감생심 꿈도 못 꿀일을 저질렀유."
"워디 성혼은 혼자하는 감유? 지도 그쪽이 좋아서 하는건디 그런 말은 안 들은 걸로 헐게유."
밖으로 나오니 방에서 있던 모든 일을 지켜보던 이들이 내 이마에 흐르는 피를 보고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형님 괜찮은 거유?"
기만이가 말을 건넸고 기창이도 사뭇 걱정이 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괜찮여. 이만한 게 다행이여. 나 같으면 더한 것도 했을 거구먼. 어르신이 양반이시네."
모두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채로 향한 지 꽤 되고도 윤은 사랑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테니 그러겠다 싶어 그녀가 차려준 찻상 앞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한 식경이나 되었을까 윤이 나왔고 우리가 있는 안채의 건넛방으로 들어왔다.
"다들 이 방에 있는겨?"
윤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내 이마를 쓰윽 살폈다.
"최가야, 니 그 이마 상처값으로 성혼 승낙 받았으니께 잘한 흥정이다. 축하한다. 성혼. 어찌 된 게 약혼녀 있는 내 보다 니들이 먼저 결혼식 올리겄어."
"그게 참말이어유 삼춘?"
"그럼 내가 익은 밥 먹구 선 얘기 하겠냐? 매형이 니들 결혼 허락했어. 그니께 잘 살아야 한다. 알겠지."
나를 비롯해 방안에 있던 모든 이들은 의외로 빠른 어르신의 성혼 승낙에 놀람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어찌 승낙했을까요 삼춘."
"그니께 그게 말여. 매형이 누이 돌아가시구 니들 새 엄니 들이면서 니들이 맘고생이 심한 거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신 건 알지? 특히 순열이 고생한 건 말해 뭐 하겠냐만은. 그래서 더 좋은 혼처 알아보고 성혼시키고 싶으셨다고 허시더라. 근디 시상 일이 사람맘 같이 되더냐 하시면서 순열이가 아버지께 역성낼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면 보내는 게 맞다고 하셨어. 기만이 일도 그렇고 최가 니가 성품이 강직한 것도 한몫했고... 아이고 우쨌든 다들 고생혔다. 배고픈디 밥 좀 먹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성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