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by 자강



"아이고 먼 길 오느라 고생했소. 어여 내리쇼."


막내 형수가 가마 문을 열며 어린 신부에게 손을 내민다. 아내는 가마를 둘러싸고 있는 시댁 식구가 많은 것에 놀란 눈치다. 이를 알아차린 큰형수님이 아내의 손을 잡고 안채로 향했고, 그 뒤를 막내 형님과 막내 형수가 들어갔고, 태환이 인환이를 비롯한 조카 녀석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삼춘, 신혼여행은 잘 다녀 오신감유? 재밌는 얘기 있으면 얼릉 해줘유."


"니들 시방 삼춘이 고단한 거 안 보이냐? 설까지 쉬다 갈 것이니 츤츤히 들으먼 되지 않겄냐?"


"내일까지 워치게 기둘류? 궁금해 죽겄는디"


"그랴, 그럼 내 큰형수랑 막내형님께 인사하고 저녁 먹고 사랑에 다들 모이자구나. 태환이 어여 애들 데리고 사랑에 가 있어라."


각다귀 같은 조카 녀석들을 따돌리고 안채로 가니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든 눈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고 녀석들 성화에 못 이겨 붙잡혔다 왔구먼유."


"되련님, 어서 안으로 오르셔유."


큰형수가 안방으로 들어가며 내게 말했다. 나는 구두를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 나를 기다리느라 마루 한가운데 서 있는 어린 신부의 손을 잡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큰형수, 막내 형님, 막내 형수가 병풍 친 안방 아랫목에 앉았고, 나와 신부가 큰절을 한다. 큰절을 받은 큰형수님은 화목하게 잘 살라며 신부의 치마에 대추와 밤을 던져주며 덕담을 한다.


"보시다시피 해방 전 어머니와 서방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이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이지만 여기 작은 서방님이 실질적 가장이시니 서방님 말씀 잘 따라주었으면 좋겠고, 우리 막내 도련님 많이 아껴주면 좋겠네. 자네도 먼 길 오느라 고단헐테니 저녁 먹고 얼릉 잠자라 들고. 서방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유."


"내 뭐 더 할 말은 읎고 우리 모석이 저리 되고 결혼 못할까 봐 내 걱정이 많었는디 이렇게 좋은 배필 만나서 좋을 뿐이지 유."


"그럼 다들 하실 말씀 허셨응게 사랑으로 쉬러 가도 되겄지유?"


나와 아내는 곧장 안채를 나와 사랑으로 향했다. 우리가 나온 것을 어찌 알았는지 벌써부터 사랑채 마당이 시끌벅적했다.


"작은 어머니 오서 오슈. 우리가 을메냐 기다린지 아슈? 우리 삼춘이랑 결혼해 줘서 참말로 고맙구먼유. 지는 태환이 구유. 야는 인환이, 제는 순환이어유."


"그랴, 다들 내 남동생들 또래라 나도 더 반갑구먼. 작은 엄마보다는 큰 누나라고 편하게 생각해 주먼 좋겄구먼."


"큰 누나요? 하긴 나이로 봐선 누나뻘 인디 작은 엄마보다는 큰누나가 맞구먼유. 다들 그리 생각 허지? 안 그려?"


안환이의 넉살 좋은 대답에 모두들 웃는다. 우리는 다 함께 사랑채에 모여서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나와 아내는 집안 어른들 댁을 돌며 인사를 다녔다. 그러기를 일주일 후 설날이 왔다. 설날 아침 차례상을 차려 아버지, 어머니, 큰 형님의 위패를 모시고 차례를 지냈다. 새신랑이 되고 첫 설날 아침에 차례상을 앞에 두고 절을 하려니 나도 모르게 울컥한 맘이 치올라 왔다. 내 나이 아홉 살에 백면서생이셨던 아버지를 여의고 조국의 광복을 맞기 전 큰 형님과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던 큰 슬픔을 뒤로하고 군입대를 했던 나.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삶의 의지도 사그라들 쯤에 나의 어린 신부를 만나 삶의 희망을 발견하면서 새 삶을 시작한 나로선 실로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 형님의 덕이 쌓여 나에게 전해진 것이라 믿었다. 나는 고맙고 또 고마운 이 마음을 영원히 기억하고, 평생을 나의 어린 신부를 위해 살겠노라 마움 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차례를 끝내고 모두들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떡국과 맛난 음식을 먹고 조카들이 차례로 세배를 했다. 제일 큰 조카 태환이부터 막내 영환이까지 사내 아이들이 먼저 세배를 하고 딸이 귀한 우리 집안의 홍일점 덕순이와 순영이가 마지막으로 세배를 했다. 조카들은 두둑한 세배 돈을 챙겨 모두들 떼를 지어 우르르 대문 밖으로 나갔고, 큰형수님은 막내형수님과 아내와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낯선 동서들과 어찌 있을지 걱정이 살짝 되었지만 똑소리 나는 당찬 신부를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시는 막내 형님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 사랑으로 향했다. 때마침 옆집 사촌 형님도 나를 보러 건너오시니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보냈던 설날 아침 풍경이 떠올랐다.


종갓집이었던 우리 집엔 설날 아침부터 일가친척들이 모여들었고, 새배를 끝낸 후 마당엔 천막이 쳐지고 그 아래엔 멍석을 깔아 윷과 말판이 놓인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한다. 마당 한 구석엔 장작불을 타오르고 부엌에서 소고기를 듬뿍 넣어 끓인 사골 떡국과 갖가지 전과 나물 냄새가 넘쳐 난다. 그렇게 설날 아침은 푸짐하고 정겨워서 글로리하고 글로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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