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행 중 고향 집에서 설을 쇤 후 서울 신혼집에 돌아온 때는 2월 중순 무렵이었다. 정국은 5월에 있을 3대 대통령 선거 준비로 어수선했고, 내가 다니는 신문사 역시 그런 정치 상황 때문에 연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혼식과 신혼여행 그리고 신행까지 다녀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임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다음날 곧바로 출근한 나는 사수 이철수 선배와 함께 막 교정부로 넘어온 기사 글의 교정을 시작했다. 기사는 사사오입의 이상한 논리로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로 세 번째 나온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와 그에 맞서 야당 쪽에선 민주당의 신익희 선생과 무소속의 조봉암 선생이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한 채 대립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내 나이 19살에 형님을 따라 군자금 조달을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선 후 6.25라는 동족상잔의 뼈아픈 전쟁을 치른 지도 어언 3년의 시간이 흘렀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서고 그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에 개헌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2대 대통령이 되어 또다시 개헌을 강행 3대 대통령에 출마하기에 이르렀다는 기사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자니 큰 형님과 함께 했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형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다면 현시점의 정국을 어찌 바라보실지, 그리고 어느 노선에 서실 지도 궁금해졌다.
신익희 선생은 임정 때부터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시고 반공으로 똘똘 뭉치신 분이시니 한때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조봉암 선생과의 후보 단일화가 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부정부패한 자유당에 맞서려면 어느 쪽으로든 후보 단일화가 우선일 텐데 그 세밀한 부분에서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형국이다. 기사는 이뤄한 부분을 자세히 다루고 있었다. 나는 큰 형님이 돌아가신 후부턴 정치 쪽엔 아예 발을 끊은지라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보다는 힘없는 국민이 받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 줄 대통령이면 된다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상황에선 나의 이런 소망은 이상향으로 흘러버릴 것 같다는 불안함이 마구 든다. 저녁때가 다 되어 교정부의 일이 끝나갈 무렵 임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최 군, 신혼여행은 잘 다녀왔는가?"
"네, 덕분에 아주 오랫동안 잘 쉬고 왔습니다."
"퇴근 후 오늘 민주당 사람들과의 술 약속이 있는데 자네도 함께 가면 어떻겠나? 임정에서 독립운동 같이 하던 지인들이 최 선생 동생이 신문사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보고 싶어 하더군. 자네만 괜찮다면 같이 갔으면 하는데."
"그런 중요한 자리에 제가 함께 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
"아 전혀 부담 갖지 않아도 되는 자리일세. 정치하는 이들이어도 사석에서까지 정치 얘기하는 건 모두 싫어한다네. 그저 독립운동 시절 함께한 옛 동지와의 만남이 그리운 이들의 친교 모임일 뿐이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6시까지 내 방으로 건너오게나"
사수 이철수 씨는 그런 자리에 임 선생님과 동행하게 된 것이 사뭇 부러운지 나의 큰 형님에 대해 물었고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지긋이 미소만 지었다.
임 선생님의 방으로 간 나는 초면인 손님을 보았는데 그 낯선 손님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 선생 측근으로 선거 준비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는 듯 보였다.
"여기가 최 선생님의 막냇동생인 최모석 군입니다. 최 선생과 연변으로 군자금을 전달하러 왔었지요."
"아, 그런가? 반갑습니다. 나는 최 선생과 동문으로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 했지요. 형님을 닮아 미남이십니다."
손님은 나에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두 손으로 손님이 내 민 손을 잡았다.
임 선생님과 손님 그리고 나는 신문사가 있는 신문로에서 택시를 타고 종로로 이동해 또 큰 형님과 임 선생님의 또 다른 동지를 만났다. 윤이 내가 신익희 선생 쪽 사람들을 오늘 저녁에 만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을 경호하는 윤으로선 내가 정치에 뜻이 없어도 그리 반가워할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결혼 후 신문사로의 복귀 첫날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