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국인 쉐어메이트 'ㅇ' 과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ㅇ은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와 ㅇ은, 처음에는 서로가 한국인인지 알지 못했다. 둘 다 외모가 특이하다. 그는 브리즈번의 햇빛 아래에서 많이 타서, 동남아를 연상케 하는 외모가 되었다. ㅇ은 반대로, 피부가 아주 하얗다.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얘서, 그는 ㅇ을 처음 봤을 때 일본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자기소개를 하며 한국인이라고 하자, 한국말로 한국인이시냐는 말이 들렸다. 둘 다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그는 ㅇ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둘 다 일이 없고, 그는 꽤 긴 기간 동안 홀로 여행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한 뒤다. 그는 브리즈번에서의 일들을 계속해서 생각하며, 한국인에 대한 무분별한 경계를 약간 거둔 상태다. 그래도 그는 말을 아낀다. 그가 싫어하는 유형의 한국인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 유형들이 되지 않으려면 말을 아끼는 편이 유리하다.
ㅇ은 그보다 한 살 아래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려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왔다고 한다. 그는 ㅇ을 좋게 본다. 우선, 한인 쉐어하우스가 아니라 외국인들이 가득한 쉐어하우스에 지낸다는 점이 크다. 이 쉐어하우스는 주거가 심각하게 불편한 편인데도, 이를 감내하면서까지 다른 외국인들에게 말을 걸어가며 영어 실력을 키우고 있다. ㅇ은, 그가 봤던 어떤 한국인 워홀러보다 영어를 월등히 잘한다.
ㅇ은, 모든 워홀러들의 공통적인 고민을 갖고 있다. 일자리다. ㅇ은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꾸준히 이력서를 넣고 있지만, 답변이 오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한다. 처음에는 ㅇ도 외국인들과 함께 하는 오지잡(Aussie-Job)을 지원했으나, 연락은 오지 않고 시간과 돈만 허비하니 다급해졌다고 한다. ㅇ은 이제 한인잡도 가리지 않고 지원한다. 문제는, 한인잡도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는 ㅇ의 말을 들으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ㅇ이야말로 워킹홀리데이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고, 워킹에서 많은 것을 얻어갈 자세가 되어 있는 부류다. 그런 ㅇ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워킹홀리데이 시작부터 꼬이고 있다. ㅇ은 계속되는 구직 실패로 인해 무기력해져 있다. 그가 도서관으로 외출을 할 때면, ㅇ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가 도서관에서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ㅇ은 아침의 모습 그대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 이 모습은, 시드니에서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았을 때 그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다. 사람은 주변과의 소통이 끊어지고, 고립되고,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좌절하고 무력해진다. 계속된 구직 실패는, 사람을 무기력과 좌절의 늪으로 몰아넣는다.
안타깝긴 하지만, 섣불리 위로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도 브리즈번 도심에서 이력서 100장을 뿌리면서, 일자리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했다. 또한,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 안타깝지만, 그가 ㅇ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힘내라는 말 밖에 없다. 끊임없이 지원하고, 계속 방 안에 있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이력서라도 돌려보라는 진부한 조언을 한다. ㅇ은 그에게, 직접 방문해서 이력서를 돌려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냐고 묻는다. 그는 확률이 극히 낮으니 기대하지 말고, 도심 지리를 익히고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효과를 노리는 게 낫다고 답한다.
그가 보기에, ㅇ의 약점은 덩치다. ㅇ은 키와 덩치가 작다. 왜소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호주 워홀러 남성들은 일을 구하지 못하면, 마지못해 막노동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건설 현장 고용주들은 체력과 덩치를 따진다. ㅇ은 자신도 막노동 생각을 해보았지만, 체구가 작아 뽑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ㅇ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는 자신이 능력만 된다면, ㅇ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그는 힘내라는 심심한 위로의 말만 하고 입을 다문다.
ㅇ은 학창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한다. ㅇ이 다닌 고등학교는 허세 가득한 일진이 많았다고 한다. 체구가 작은 ㅇ은 철없는 일진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일진들은 ㅇ을 괴롭히며 입지를 다지려 했다. 허세와 치기로 가득 찬 일진들은, ㅇ을 세워놓고 눈을 부라리며 위협했다고 한다.
그의 학창 시절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몸집이 작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쓸데없는 시비가 없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눈치도 없었다. ㅇ은 다르다. ㅇ은 계속 반복되는 충돌에서, 일진들의 심리를 모두 파악했다고 한다. ㅇ은 속으로는 너무 같잖지만, 육체적인 힘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ㅇ은 할 말은 하되, 무슨 일이 있어도 육체적 싸움은 피했다고 한다. 그는 ㅇ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화가 치밀어 오른다. ㅇ은 이런 학창 시절을 묵묵히 견디며 이겨냈다. 체구는 작지만, ㅇ은 생각이 깊고 눈치가 빠르며 강단이 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체구도 작지만,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 한국인이 멋있다. 이 날 처음으로 그는, 체구가 작더라도 큰 사람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며칠 뒤, ㅇ은 어떤 한인샵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고 말하며 웃는다. 쉐어하우스에서 꽤 떨어진 곳의 쇼핑센터 내의 카페다. 그는 자신이 태워다 주겠다고 말한다.
ㅇ을 조수석에 태우고, 쇼핑센터로 향한다. ㅇ에 대한 선의와 애정으로 태웠는데, 차가 막힌다. 그는 시계를 몇 번이고 본다. 그는 티내려 하지 않지만, 굉장히 초조해진다. ㅇ은 오히려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전혀 시간을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다행히도 쇼핑센터에 늦지 않게 도착한다.
ㅇ은 카페에 가서 면접을 본다. 그는 먼발치에서, 면접 보는 ㅇ을 지켜본다. 면접을 보는 카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나무 위주의 인테리어, 원목 의자, 칠판에 초크로 적은 듯한 메뉴판 등이 보인다. 면접관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 여자다. 면접을 본 지 10분도 채 안되어, ㅇ이 나온다. ㅇ은 면접 느낌이 그냥 그렇다고 한다.
그는 몇 주 뒤 다른 집으로 주거지를 옮긴다. ㅇ과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싶었으나, 향후 그의 핸드폰에 이상이 생기면서 ㅇ의 연락처가 없어지고 만다. 이후 ㅇ의 워킹홀리데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는 ㅇ이 좋은 일자리를 얻어, 다양한 경험을 하며 워킹홀리데이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