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by 하얀 얼굴 학생

29번째 기업 최종 탈락 이후, 1달이 넘는 기간 동안 서류 합격 소식이 없다. 최종 합격한 모습을 상상하며 서류 난사를 조금 게을리해서였는지, 아니면 그저 공고가 줄어들었던 시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는 또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빛을 잃은 눈으로 채용 공고를 훑고, 최소한의 조건 몇몇만 갖추면 서류를 넣는다.


그가 대학교를 졸업한지도 벌써 1년을 바라보고 있다. 졸업을 유예한 시점부터, 그는 사실상 대학생이 아닌 백수였다. 그렇게 백수 생활을 한 지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려 한다. 백수 기간, 아니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생활 패턴은 이미 늘어질대로 늘어졌다. 아침형 인간을 추구하던 취업준비생은 어느덧 올빼미족이 되었다.


그 자신도, 이런 생활 패턴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에서만 경고음이 울릴 뿐, 몸은 잘 따라주지 않는다. 29번째 기업 최종 탈락 이후, 서류 합격 메일조차 날아오지 않으니 그는 마냥 시간을 보내며 논다. 그는 조금씩, 올빼미족 생활이 편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오전 느지막이, 거의 점심 즈음 일어난다. 아침은 거르기 일쑤다. 아점을 먹거나 늦은 점심을 먹는다. 허기를 채우고는, 양치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부터 킨다. 졸린 듯 부은 눈꺼풀 틈새로, 윈도우즈의 파란빛이 비집고 들어온다.


컴퓨터가 켜지면, 인터넷 창을 열어 3개의 채용 공고 홈페이지를 연다. 자소X닷컴, 사람X, 잡X리아다. 이중 그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홈페이지는 자소X닷컴이다. 자소X닷컴은, 달력에 채용 공고 마감일을 표시해주는 화면이 있다. 오늘자로 마감하는 채용 공고가 몇 개인가. 그중에서도 그가 별표(즐겨찾기)를 눌러놓은 채용 공고는 몇 개인가. 별이 너덧개 정도 보인다. 오늘 마감하는 채용공고, 즉 그가 오늘 안에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공고의 수다. 귀찮다.



자기소개서 질문 수가 적고 글자 수도 적은, 가장 만만해 보이는 공고부터 시작한다. 채용 홈페이지로 들어가 이름/이메일/지원용 비밀번호를 적어넣는다. 당사에 무슨무슨 정보를 제공하는데 동의하겠느냐. 당사가 무슨무슨 정보를 보관하는 것을 동의하겠느냐. 동의하지 않으면 서류 지원이 불가하다. 읽을 필요도 없다.


이름을 영어와 한문으로 적어넣고, 사진 파일을 첨부한다. 수백 번이고 반복해서인지, 컴퓨터는 그의 개인정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정보를 입력하려고 빈칸을 누르면, 빈칸 아래로 이전에 입력했던 정보가 나온다. 시간을 아끼고자, 그는 클릭 한 번에 이전 정보들을 불러온다. 이력서 전체를 이런 식으로 불러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력서는 칸칸이 나눠져 있다. 그는 칸마다 클릭하여 이전 정보를 불러온다. 직접 쓰는 것보다는 시간이 조금 단축된다.


자기소개서는 칸을 누른다고 해서 이전 자기소개서를 불러올 수 없다. 그는 워드 파일 하나에, 이전에 적었던 모든 자기소개서를 복사해 두었다. 언제부턴가, 이 자기소개서 파일이 수정되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질문을 읽어본다. 지원 동기, 강점, 가치관... 그는 자기소개서 파일을 훑는다. 그의 자기소개서 워드 파일은 30페이지가 넘어간다. 30페이지가 넘는 자기소개서 중, 그가 실제로 사용하는 단락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질문에 대강 답변이 되겠다 싶은 자기소개서 문단을 복사해서 붙여넣는다. 가끔 복사-붙여넣기를 비활성화시켜놓은 기업들이 있다. 그럴 때는 욕을 한다.



서류 지원을 끝낸 뒤, 자전거를 타고 독서실로 향한다. 어느덧 하반기도 절반이나 지나 날씨가 제법 서늘하다. 그는 호주에서 산 카고 바지, 10불짜리 캔버스 운동화, 10불도 안되는 검은 후드티, 검은 후리쓰를 입고 자전거를 탄다. 머리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몰아서 감는다. 후드티의 검은 모자를 뒤집어쓴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호주 시절을 잊지 못한 귀신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날씨가 춥다.


건널목에서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며, 그는 맘스터치를 가서 햄버거를 먹을까 생각한다. 맘스터치를 가려면 독서실을 지나쳐서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공기가 차고, 자전거를 모는 손도 차다. 배가 고픈 것인가, 아니면 그냥 속이 허한 것인가. 괜히 돈 쓸 일 만들지 말아야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신발을 신발장에 넣는다. 복도 2개, 문을 2개 지나면 그의 좌석 앞이다.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가방을 내려놓는다. 텀블러만 집어들고 휴게실로 나와 정수기 물을 채운다. 독서실 데스크와 휴게실은 조명이 백색광이며 환하다. 뱀파이어라도 된 마냥, 텀블러에 물이 채워지기 무섭게 그의 좌석으로 되돌아온다. 슬라이딩 도어를 닫고, 좌석에 달린 형광등은 가장 옅은 빛으로 킨다. 그는 이 조그마한 형광등 불빛도 부담스러워, 공책을 한 장 찢어서 형광등을 감싸놓았다. 사방이 막힌 조그만 1인실, 형광등 불빛은 한 겹의 종이를 투과하면서 한 번 더 옅어진다. 드디어 그가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환경이 조성된다. 후리스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 그는 의자에 앉아 한껏 기댄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다. 비좁지만 안락하다.



취준생 초창기에는 책부터 펼쳤지만, 지금의 그는 핸드폰부터 본다. 오늘은 무엇을 볼까. 책 읽기 전에 유튜브를 조금만 보자. 유튜브를 다 보고 나면, 인스X그램을 본다. 매혹적인 이성들의 영상이 많다. 처음에는 수도승처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자 이런 유혹적인 영상들을 멀리했다. 면접에 탈락할 때마다 보상 심리마냥 유혹적인 영상을 잠깐 보곤 했는데, 어느덧 습관이 됐다. 그는 이제 매일같이 인스X그램을 본다. 인스X그램을 다 보아도, 볼 것이 또 있다. 웹툰이다. 그는 판타지 웹툰을 선호한다. 중세 풍의 세계관 속에서 여러 대륙을 탐험하는 웹툰을 한참 동안 본다.


유튜브 - 인스X그램 - 웹툰을 한 번 훑어보는 것이 그의 독서실 루틴이다. 훑어보기가 끝나면, 그제서야 그는 귀찮은 듯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이미 게을러질 대로 게을러졌지만, 독서를 놓아버리지는 않는다. 제대로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매일 독서실에서 독서하는 흉내라도 내는 그다.


독서실 운영은 새벽 2시까지다. 핸드폰을 하고, 엎어져 자고, 책을 뒤적이다 보면 어느새 마감시간이다. 1시 30분쯤 되면, 독서실 직원이 돌아다니면서 '마감 시간입니다'라고 외친다. 독서실 직원의 경고는, 그의 안식을 방해한다. 그는 짜증스럽게 일어나 짐을 챙긴다.



밤이라 그런지 공기가 차고 바람도 매섭다. 후드티의 검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후리쓰 지퍼를 끝까지 올린다. 자전거를 묶어둔 자물쇠의 번호키를 연다. 번호키를 열어도, 자물쇠가 빠지지 않는다. 추운 날씨로 인해, 자물쇠 줄기 부분을 이루는 철사가 굳었나보다. 한 차례 힘을 쓴 뒤에야 자전거가 풀려난다. 간신히 풀어낸 자물쇠를, 다시 뱀처럼 꼬아서 자전거 몸체에 걸어야 한다. 달리는 동안 끌리면 안되니, 이번에는 두 번 꼬아서 물려놓아야 한다. 자물쇠와 두 차례 씨름한 후에야, 그는 집을 향해 출발한다.


집으로 가는 길, 1시가 넘은 새벽이다. 인적이 드물고, 도로에도 차가 없다. 이따금 학원이 끝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몇몇의 모습이 보인다. 그도 저만한 나이일 때가 있었다. 기말고사 준비나 수능 준비를 하겠지. 그 시절에는, 성적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죽도록 하지도 않았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미뤄뒀던 보상을 받는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구장창 시간만 죽였다. 그렇게 시간을 죽였더니, 지금 이렇게 또 독서실을 다닌다. 독서실에서도 시간만 죽이다가, 새벽 늦게 집으로 향한다. 오늘 그는 무엇을 했나. 고개가 들리며, 눈이 하늘로 향한다. 새까만 하늘, 별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그는, 저 학생들 나이 때의 자신과 무엇이 달라졌나.



누구를, 무엇을 탓하겠나. 모든 게 그의 탓이다. 모든 게 그의 잘못이다.


대학교에서 공부 똑바로 하지 않고 엎드려서 잠만 잔 그의 잘못이다.


남들 자격증 딸 때, 대외활동할 때, 봉사활동할 때, 집 앞에서 공놀이한 그의 잘못이다.


진로를 제대로 정하지 않은 그의 잘못이다.


자기소개서를 복사-붙여넣기한 그의 잘못이다.


면접 때 답변 제대로 못한 그의 잘못이다.


뭐 하나 제대로 파지 않은 그의 잘못이다.


다 그의 잘못이다. 그래서 서류와 면접에서 떨어지는 거다.


잘못한 것은 알겠다.

그런데 이 정도로, 서류 수백 번, 면접 수십 번 떨어질 정도로 잘못한 것인가?


그 정도로 잘못한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호주를 괜히 다녀왔나?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지 않고, 그 기간에 취업 준비를 했으면 뭐라도 되었을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그의 거의 유일한 자랑스러운 기억이자 찬란한 기억이다.


그런 자랑스럽고 찬란한 시절마저도, 스스로 의심하는 자신과 이 상황이 한스러울 뿐이다.


어쩌겠는가. 전부 그의 탓이다.


모든 것이 다 그의 업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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