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홀 다녀와서 캥거루족이 되었다
의심, 승화
취업준비생인 그는, 수백 번 서류를 지원했고 수백 번 떨어졌다. 그나마 서류를 합격한 수십 개의 기업에서, 수십 번 면접을 보았고 수십 번 떨어졌다. 그는, 기업이나 면접관들로부터의 탈락이나 거절이 익숙해졌다.
어떻게든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하고자 하지만, 끊임없이 탈락과 거절을 반복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도 마찬가지다. 초반에는, 이러한 탈락과 거절도 자신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 탈락과 거절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그는 분노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탈락시키는, 기업과 면접관들을 향한 분노다. 아무리 분노해도 탈락과 거절은 멈추지 않는다. 그의 분노는, 이제 의심으로 바뀐다.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다.
기업들은, 그에게 항상 근거를 요구한다.
우리가 왜 당신을 채용해야 하는가. 우리가 당신을 뽑아야 할 만큼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당신의 과거 경험 중, 우리가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만한 경험이 있는가.
수십 차례의 면접을 보았지만, 그는 항상 같았다. 물론 기업 분석을 하며, 면접장 분위기를 보아가며 그때그때 다른 가면을 쓰긴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가 면접 때 어필했던 내용은 항상 동일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자랑스러운 기억, 가장 빛나는 시절을 중점적으로 어필했다. 바로 호주 워킹홀리데이다.
안녕하십니까, N번째 기업에 지원한 지원자, 하.얀.얼.굴 입니다! 저는 2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표현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한 실천력입니다. 저는 1년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경험이 있습니다. 해당 기간, 돈/경험/영어 세 가지 측면에서 목표를 설정하여 달성한 경험이 있습니다. ... 해외에서 홀로 생활하며, 강한 실천력으로 목표를 달성한 경험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당시 호주의 최저 시급은 18.3불이었습니다. 세금을 제외하면 15불 정도입니다. ... 저는 1만불을 저축하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1년은 52주이니, 적응기간 2주를 제외하면 50주이지 않습니까? 1만불을 50주로 나누면, 1주일에 200불은 저축해야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매주 가계부를 작성하면서, 1만불 목표를 달성해가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네, 10가지가 넘는 직업을 경험했습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해 본 것 같습니다. 스시샵 주방보조, 주말시장 임시 상점, 비스트로 주방보조, 이벤트 청소, 소고기 공장, 야간 청소, 건설 철거현장, 에어컨 재설치, 주방 설거지, 세차, 웨이터 등을 했습니다.
네, 다녀와서 각각 1개월씩 공부하여 토익 940, 오픽 AL이라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네, 물론 유학파들의 경우 공부하는 영어를 배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실제 현장에서 일하면서 실제와 가까운 영어를 터득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영어 성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직무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만, 제가 워킹홀리데이 경험에서 배운 것은, 새로운 상황과 지속적인 변화에 적응했던 경험입니다. N번째 기업에 입사하여 XX 직무를 수행할 때에도, 분명 제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 있을 것이고 또 그 과정에서 변화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과 변화에 대응하는 데 있어, 저의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워낙 특이한 경험이라 그런지, 아니면 물어볼 것이 없어서인지, 면접관들은 언제나 그의 워킹홀리데이 경험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면 그는, 너무나도 수월하게 답변했다. 워킹홀리데이에서 그가 겪은 모든 것은 '사실'이었으며, 굳이 부풀리지 않아도 충분히 어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면접관들도, 그의 완벽한 답변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워킹홀리데이 경험은 흠잡을 데 없다고 인정했던 것이었을까, 검증이 불가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긴 것이었을까.
그렇게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실컷 답변하고, 다른 몇몇 질문에 대해 답변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항상 기분이 좋았다. 남은 것은 면접관들이 그의 가치를 인정하여, 최종 입사 메일을 날리는 것뿐이리라. 그런데, 그에게는 자꾸만 탈락 메일이 날아들었다. 한 통, 두 통, 쌓이고 쌓이더니 어느덧 탈락 메일은 수십 통이 넘는다.
그는 탈락 메일을, 처음에는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탈락 메일을 10번 이상 받았을 때부터, 그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기업과 면접관들을 욕했다. 탈락 메일은 계속해서 쌓인다. 그의 취업 준비 기간도 계속해서 늘어난다. 졸업을 유예한 하반기, 졸업을 한 상반기에도 취업에 실패했다. 어느덧 그의 취업 준비기간이 1년 반을 향해 가고 있다. 대학교 3, 4학년 때 슬렁슬렁 서류 지원한 것까지 합치면 취업준비 기간만 2년이 넘는 셈이다. 독서실에 앉아있는 그의 내면에서, 슬그머니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워킹홀리데이를, 괜히 갔다온 것은 아닐까.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의심을, 그는 세차게 뿌리친다. 자신이 가장 자부심을 가진, 가장 열심히 생활했던 시절이 바로 워킹홀리데이다. 그런 워킹홀리데이를 의심하다니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계속된 면접 탈락, 끝없이 이어지는 취업 준비는 그를 짓누른다. 그는,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워킹홀리데이 시절에 대해 의심을 품고 심지 않다. 하지만, 탈락과 거절이라는 외부 상황으로 인해 그의 신념이 흔들린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호주 워킹홀리데이 당시에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어떠한 변수가 있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확신하는 그 신념에 대해, 스스로가 의구심을 갖게 되는 상황. 그 더러운 기분이 다시 그를 찾아온다.
다행히도, 일시적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가끔씩 이러한 의구심이 찾아오긴 하지만, 그가 몰입하여 수많은 경험을 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한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확신을 아주 흔들어버리지는 못한다. 기업과 면접관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후회하진 않지만,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데에는 호주 워킹홀리데이의 영향도 없지 않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많은 경험을 하긴 했지만, 기업들은 그 경험을 그다지 값지게 쳐주지 않는다. 게다가 호주 워킹홀리데이로 인해 그가 취업을 준비하는 나이가 늦어졌으며, 공교롭게도 전염병 시기까지 맞물렸다.
후회는 없다. 하지만 현실도 현실이다. 20대가 다 저물어가는데, 그는 직장도 없이 부모님 집에 얹혀살며 아직까지도 용돈을 타서 생활하고 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절에 대한 의구심을 극복해냈지만, 그의 현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답 없고 우울하기 그지없는 그의 상황을 가만히 떠올려 보고 있자니, 쓸데없이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그의 현재 상황을 비유한, 자조적인 문장이 하나 떠오른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냈지만, 꽤나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다녀오더니, 캥거루족이 되었구나.
스스로 지은 명문을 되뇌며, 그는 씁쓸하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