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17 / 18 / 19번째 기업 셋 중 하나에 들어가고자 안달이 난 이유는, 이 기업들이 한국에서 가장 큰 재벌 중 하나의 중심 계열사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토가 조그맣지만,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재벌 그룹이 몇 개 있다.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 물어봐도 그 이름을 들어봤다고 할 것이다. ㄱ그룹이다.
그는 면접 준비를 하면서, 내친김에 ㄱ그룹 창업자(회장)의 자서전도 읽는다. ㄱ그룹의 창업자는 이미 타계한 인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출을 하면서까지 세상으로 나와 장사를 배워 기업을 일구어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무엇을 하던 항상 밑바닥부터 시작했으나 결국은 거대한 그룹을 일구어 냈다. 얼핏 떠오르는 어록으로는, '이봐, 해봤어?' 가 있다. 요즘의 MZ세대들이 가장 싫어하는 전형적인 꼰대의 말이지만, ㄱ그룹 회장만큼은 예외다. 대학 교육도 받지 않고, 집안의 어떤 도움도 없이, 맨손으로 그룹을 키워낸 산 증인이니 말이다. 6.25 전쟁, 군사독재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격동기를 모조리 이겨내고, 자신이 가진 자본은 오로지 '시간' 뿐이었다고 하는 인물이니 감탄이 나올 뿐이다.
그는 꼰대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용어가 과격하다 생각해서일 뿐이다. 그도 말이 통하지 않는 기성세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서전을 읽어보니, 만일 ㄱ그룹 회장이 그에게 꼰대스러운 말을 하더라도 반박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ㄱ그룹의 시작은 자동차 수리점이었다. 밤낮없이 자동차를 고치는 창업주의 자동차 수리점은 입소문을 탔고, 점점 더 바빠졌다. 창업주가 일하던 초창기는 6.25 전쟁 때와 맞물리는데, 자서전에서 회고하기로 그때는 대부분의 일이 미군과 정부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어느 날 창업주가 미군에게 돈을 받으러 갔는데, 같이 있던 옆 사람이 돈을 훨씬 많이 받더란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건설일을 하더란다. 창업주는, 자동차 수리나 건설이나 뭐 그리 다르겠나 싶어서 돈이 더 많이 되는 건설일도 시작했다. 자동차 수리점의 직원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창업주는 밀어붙였다. 자동차 일과 마찬가지로, 밤낮없이 새벽까지 일하면서 결국은 건설 쪽에서도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ㄱ그룹은 건설과 자동차로 시작했다. 6.25 전쟁 후에는 조선업과 중공업으로까지 확장했으며, 이후에 백화점과 석유화학에도 뛰어든다. 몸집이 엄청나게 커진 ㄱ그룹은, 창업자이자 왕회장이 별세하면서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한다. 현재 ㄱ그룹은, 이름은 같이 쓰고 있으나 몇 개의 기업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표적인 두 그룹을 예로 들자면, 탈 것 그룹과 백화점 그룹이 있다.
탈 것 그룹 : 완성 탈 것 제조, 탈 것의 부품, 건설, 탈 것 보험, 카드, 증권, 물류, 제철, 철강 IT 등
백화점 그룹 : 백화점 쇼핑 등 유통, 패션, 식품, 인테리어 및 건자재, 미디어, 렌탈, 건설장비 등
그가 면접을 볼 17번째, 19번째 기업은 탈 것 그룹에 속해 있다. 18번째 기업은 백화점 그룹에 속해 있다. 그는 해당 기업들에 서류를 넣을 때도, 무슨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이력서를 수정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질문의 의도에 대강 맞는 것처럼 보이는 자소서를 복사-붙여넣기해서 지원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자신이 대기업에 합격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선망하는 대기업은, 당연히 경쟁이 치열하다. 어릴 적부터 해당 대기업 한 곳만 정해서 들이파고, 봉사활동 / 인턴 / 공모전 등을 해당 기업에서 시행하는 것만 골라서 스펙을 쌓은 괴물들도 넘쳐난다.
그래서 그는 합격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고, 어차피 난사하는 김에 손가락의 수고를 조금 더 들여 지원했을 뿐이다. 어쨌든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중 하나이니, 취준생으로써 지원 한 번쯤은 해볼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그렇게 지원했건만 ㄱ그룹의 3개 중심 계열사로부터 서류 합격 메일을 받았다. 그의 망상병이 다시 스멀스멀 도진다. 혹시, ㄱ그룹 내에서 자신을 뽑기 위해 일종의 경쟁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워킹홀리데이 등으로 나름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내공을, 드디어 알아봐 주는 것인가? 세 군데 전부 다 합격하면, 어디를 가는 것이 제일 좋을까? 면접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망상을 곁들이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