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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번째 기업

탈 것

by 하얀 얼굴 학생

17, 18, 19번째 기업 세 곳 중 가장 늦게 서류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면접은 19번째 기업이 가장 먼저다. 서류 합격 통보 며칠 뒤에 인적성과 AI를 실시하고, 인적성 AI 결과 발표가 나자마자 또 며칠 뒤 1차 면접이다. 기업마다 다르긴 하지만, 19번째 기업은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기업들 중 전형을 진행하는 속도가 꽤나 빠른 편이다.


인적성과 AI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그는 면접 준비를 시작한다. 그가 지원한 직무는 글로벌 사업 운영 / 조정이다. 국내 및 해외 각 권역의 판매/생산 현안 조정을 통해 전사 사업목표를 달성하고 수익성 최적화를 추진하는 조직이라고 한다. 생산 관리 같은 느낌이 조금 풍기긴 하지만, 어쨌든 글로벌 사업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어 있으니 괜찮다. 직무 구분에도 전략지원, 해외영업, 서비스라고 적혀 있다. 그는 19번째 기업의 채용 공고를 보며, 직무가 무엇인지 솔직히 명확하게 보이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전략지원과 해외영업과 서비스를 모두 포괄하는 글로벌 사업 운영 및 조정 직무'라고 받아들인다.



항상 그래왔듯, 그는 면접 준비 자료를 만들기 시작한다. 19번째 기업의 연혁, 경영목표, 채용 공고, 지원한 업무 상세, 관계사, 재무상태표와 손익계산서, 제품 및 기술, 탈 것 국내 시장, 탈 것 해외 시장, 19번째 기업의 시장 점유율, 경쟁자, 타사 협업이나 새로운 탈 것 출시 등의 뉴스 등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집단 중 하나여서인지, 재무제표의 숫자들이 큼직하다 못해 거대하다. 그가 이전에 봐왔던 기업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숫자가 너무 길어서, 그는 1의 자리 숫자부터 하나씩 세어 올라간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 천억, 조, 십조, 백조


재무상태표의 숫자도, 손익계산서의 숫자도 단위가 100조다. 조 단위만 해도 큰데, 조의 100배라니! 그는 숫자에 대해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으므로 숫자를 맹신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기업들과는 차원이 다른 숫자를 보자, 그는 19번째 기업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19번째 기업은 탈 것 제조 기업이다. 탈 것은 남성들의 로망이며, 그래서인지 탈 것에 광적으로 열광하고 들이파는 이들이 많다. 엔진이 어떻다, 타이어가 어떻다, 주행감이 어떻다, 몸체가 높다 낮다, 디자인이 잘 나왔다 등 웬만한 전문가처럼 잘 아는 일반인도 많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아니 일반인과 비교하더라도 그는 탈 것에 관심이 적은 편이다.


관심이 적으니, 그는 당연히 한국에서 탈 것을 구매하지 않았다. 관심도 적은 데다, 탈 것을 사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탈 것을 구매할 만한 돈이 없다. 억지로 끌어모아서 사고자 한다면, 조그마한 탈 것 정도는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탈 것은 처음 구매할 때만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다. 구매한 이후에도 세금, 주유비, 보험료 등 유지비만 해도 돈이 꽤 많이 든다. 가뜩이나 집과 독서실을 오가며 취업 준비만 하는 그는, 이 많은 유지비를 감수해야 할 만큼 탈 것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다.



탈 것에 대한 관심이 적은 그도 탈 것을 소유한 적이 있었다. 워킹홀리데이 시절, 그는 도요타 캠리를 중고로 구매해서 타고 다녔다. 당시 중고 탈 것을 구매할 때 여러 기업과 탈 것 종류를 알아보았는데, 19번째 기업도 후보 중 하나였다. 19번째 기업은 매출이 100조가 넘는 글로벌 대기업이기 때문에, 호주 도로의 탈 것들 중에도 19번째 기업 로고가 간간이 보인다. 어릴 적부터 봐왔던 19번째 기업 탈 것을 호주에서 보자 그는 반가웠지만, 구매할 때는 결국 가격이다. 그는 도요타 캠리를 구매했다.


그가 19번째 기업의 접점으로 어필할 수 있는 시기는, 탈 것을 잠깐이나마 소유했던 워킹홀리데이 시절이다. 그는 면접 준비를 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탈 것 기업이니, 면접관이 탈 것에 관해 물어보지는 않을까.


가상 면접관 : 하얀 얼굴 씨, 탈 것을 소유하신 적이 있나요?

그 : 네, 있습니다.

가상 면접관 : 어느 기업의 어느 탈 것이었나요?

그 : 아... 도요타의 캠리를 구매했습니다.

가상 면접관 : 왜 우리 회사의 탈 것이 아닌, 경쟁사 도요타의 탈 것을 구매했나요?

그 : 당시 조사해본 결과, 도요타의 내구성이 훌륭하고 되팔 때 가격 방어도 잘 됐기 때문입니다.

가상 면접관 : 그렇군요. 그럼 도요타를 지원하지 왜 우리 회사를 지원했나요?


그의 망상 속 가상 면접관은 꽤나 극단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면접관이라 하더라도, 걸고 넘어지려 마음먹으면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만일 이런 질문을 받으면, 19번째 기업 탈 것을 구매하려 했지만 돈이 부족했다는 식으로 방어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해당 경험에서 어필할 것은, 탈 것을 소유해서 운전한 적이 있다는 것이지 어느 브랜드였느냐가 아니다.



그는 탈 것에 대한 지식을 약간이나마 높이기 위해, 19번째 기업의 출시 모델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가장 처음 나왔던 탈 것, 이후 잇따라 출시된 새로운 모델들, 새롭게 적용된 기술 등을 표로 만들어 정리한다. 정리가 진행될수록 패턴이 보인다. 후속 모델은, 이전 모델의 이름과 모양을 약간씩 따라가므로 외우기가 쉽다.


19번째 기업이 출시한 탈 것들, 단종된 모델과 현재까지 계속 출시하고 있는 모델, 요즈음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있다는 FCEV(Fuel Cell Electric Vehicle = 수소 전기 탈 것) 관련 기사 등등... 원체 기업이 크고 역사도 길다 보니 자료 조사가 끝이 없다.



끝없는 준비와 정리에서, 그가 무게를 둔 것은 두 가지다.

1) 탈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관심

2) 19번째 기업 탈 것 제조 공장의 위치와 생산 능력


제품과 기술 분석을 통해 탈 것에 대한 이해가 약간은 높아진다. 그는 두 번째로, 19번째 기업의 탈 것 공장을 들이파기 시작한다. 19번째 기업의 탈 것 제조 공장은 한국과 전세계에 퍼져 있다. 공장 생산 능력, 생산 실적, 가동률 등을 외우다 보니 같은 탈 것이라도 카테고리가 여럿으로 나뉜다는 것을 파악한다.


Sedan : 가장 기본적인 형태, 주로 적은 인원의 이동을 위해 사용

SUV, MPV : 스포츠, 여가생활 등을 위한 다목적 탈 것. 넓은 내부, 높은 공간 활용도

N Line : 고성능으로, F1 레이싱과 같은 스릴과 감성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모델

이외 소형 택시, 트럭 및 버스, 마지막으로 고가의 럭셔리 브랜드가 있다.



19번째 기업 한국 공장은, 규모와 생산량이 막대하므로 위의 카테고리를 모두 생산한다. 하지만 세계에 퍼져 있는 중/소규모의 공장들은 다르다. 가까이에 위치한 시장이 어디인지, 그 시장에서 어떤 차량을 더 선호하는지에 따라 생산하는 탈 것 종류가 다르다. 유럽 시장에 가까운 공장은 SUV를, 인도 시장에 가까운 공장은 해치백을 중점적으로 생산하는 식이다.


그는 위의 정보들을 계속 검색하고 정리하며 머릿속에 밀어넣고 암기한다. 특히 공장별 위치, 생산하는 탈 것의 종류 및 생산량 등을 주의깊게 외운다.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의 의문은 뒷전이다. 그냥 왠지, 이런 숫자들을 외워놓으면 면접관들에게 어필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암기한다.

객관식 답안을 찍듯이 선택한 암기였지만, 다행히도 그는 19번째 면접 때 암기의 덕을 꽤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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