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머리로, 공감은 가슴으로
면접 당일, 그는 7번째 기업 본사에 도착한다. 이전에 한 번 와봐서인지, 나름 낯이 익다. 언덕 아래쪽 나무에 걸려 있는 모 기업 노조의 투쟁 현수막, 명함을 받았던 돌담, 짧은 구간이지만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내리는 것까지 그대로다. 이전의 나쁜 기억은 모두 잊고, 한없이 긍정적이고 밝게 생각하고자 하는 그다. 면접을 앞둔 취준생으로서는 좋은 마인드다.
7번째 기업은 그동안 채용 프로세스를 바꾸었는지, 이번에는 하루에 1차 면접 하나만 진행한다고 안내했다. 하루에 실무진 면접과 임원 면접을 모조리 진행했던 저번과 비교하면 꽤 큰 변화다. 지원자들을 배려해주는 것인가. 7번째 기업은 면접비도 제공하지 않았었다. 하루에 면접을 한 번씩만 진행하는 것은, 다른 기업들의 일반적인 채용 프로세스를 따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른 기업들처럼 면접비도 지급하게끔 바뀌었으리라 기대하는 그다.
그는 7번째 기업 건물 내부로 들어간다. 저번의 면접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면접이 이뤄지는 층이 다르고, 면접 대기실도 다르다. 그는 밀폐된 대기실에 앉아 대기하다가, 혼자 면접을 들어간다. 지난번 6명 정도의 인원들과 함께 면접에 들어갔던 것에 비하면 참 많이 발전했다.
7번째 기업, 영업 직무
굳게 다문 입, 눈썹 숱이 적고 눈빛이 날카로운 면접관 2
검은 피부, 안경을 낀 면접관 3 (첫인상은 날카로웠으나 말투나 목소리는 부드럽다)
회색빛 머리, 동그란 안경을 끼고 온화한 인상의 면접관 4
면접은 그 혼자 들어가, 4명의 면접관의 질문 세례를 받는다. 그는 자신이 전에 면접 봤던 회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채용 프로세스와 면접관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면접관 1 : 안녕하세요, 하얀 얼굴 지원자 맞으시죠? 자리에 앉으세요.
그 : 네, 안녕하십니까!
면접관 1 : 네,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주세요.
그 : 네, 안녕하십니까! 7번째 기업 영업 직무에 지원한 지원자 하. 얀. 얼. 굴.입니다. 저는 2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한 실천력입니다. 저는 호주 워킹... ...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취미 생활인 공놀이를 통해... ... 이상 두 가지 강점, 강한 실천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7번째 기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지원자 하. 얀. 얼. 굴.입니다. 감사합니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본인의 직업관에 대해 얘기해보세요.
그 : 직업관 말씀이십니까. 저는, 직업이 인생에서 목표와 가장 겹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있는데, 이는 일과 인생을 분리해서 바라보려는 시각인 것 같습니다. 물론 과도한 업무가 힘들 수는 있으나, 저는 직업과 인생을 분리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이 맡은 일과 직업에서 만족과 보람을 느끼고, 또 직업에서의 목표를 성취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에게 있어 직업은, 인생을 보람차게 하는 주요한 수단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면접관 3 : 하얀 얼굴 씨, 가족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동거 가족이 어떻게 되죠?
그 : 아 네, 부모님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부모님과는 동거하고, 동생은 직장이 멀리 있어 주말에 가끔씩 집으로 옵니다.
면접관 4 : 하얀 얼굴 씨, 지난번에는 기획을 지원했다가 이번에는 영업을 지원했군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 우선 인사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영업 직무를 채용한다고 들었으며, 저 또한 제가 가진 실천력과 친화력이라는 강점이 영업 직무에서 강점이 될 것이라 생각해 지원했습니다.
면접관 4 : 지금 채용하고 있는 영업 직무가 어떤 직무인지 알고 있나요?
그 : 채용 공고가 없어, 회사 홈페이지와 다른 건설사의 직무 설명을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지금 지원한 영업 직무는, 민간 주택영업 및 공공영업을 포괄하는 건설 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재건축 현장에서는 조합원 관리도 포괄하며, 아파트 현장에서는 모델하우스 관리 및 홍보와 영업을 담당하는 직무라고 생각합니다.
면접관 3 : 우리 회사 말고는 어디를 지원했습니까?
그 : (얼마나 솔직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음... 종합 건설사인 17번째 기업, 아파트 건설을 위주로 하는 21번째 기업, 종합 건설과 건축자재를 다루는 22번째 기업에 지원했습니다.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워킹홀리데이가 뭡니까?
그 : 워킹홀리데이는 국가 간 청년들의 여행과 문화 교류를 증진하기 위한 비자입니다. 이름 그대로, 일도 하고 휴가도 즐길 수 있는 비자입니다. 워킹홀리데이 협정이 체결된 국가 간에는, 청년들이 1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일도 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해줍니다. 저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1년 동안 여러 일을 하고 호주 전역을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경영학과를 진학한 이유가 뭔가요?
그 : 음... 학과를 정했을 당시에는, 솔직히 별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수능 점수에 맞추면서, 문과 전공 중에서 경영학과가 그나마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학과 공부를 해보면서, 다른 인문계 전공에 비해 기업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좋았습니다.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학업 외에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을 한 것이 있나요?
그 : 네, 학교에서 공놀이 동아리를 했었습니다. 입학했던 1학년부터 시작했으며, 군대를 갔다오고 3학년 때부터는 동아리 회장을 맡았습니다. 제가 있었던 시기 경영학과 동아리가 교내 리그에서 4위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
면접관 4 : 하얀 얼굴 씨, 자기소개서를 보니 책을 참 많이 읽는 것 같네요.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나요?
그 : 아 네, 아무래도 건축에 관심이 있다 보니 요즘은 면접 준비를 하면서 관련 책들을 읽었습니다. 유현준 건축가의 '어디서 살 것인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손낙구 저자의 '부동산 계급 사회'를 읽었습니다.
면접관 2 : 부동산 책만 읽으셨나... 다른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뭡니까?
그 : 음... 건축 관련 책으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면접관 2 : 아니, 인생 관련 책으로 말해보세요. 책은 사서 봅니까 빌려서 봅니까?
그 : 네 우선,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 저자의 '몰입, Flow'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똑같은 일상 경험에서도, 몰입도를 극대화하여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고... ... 그리고 책들은, 공공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있습니다.
면접관 3 : 하얀 얼굴 씨, 본인의 성격이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그 : 음... 저는 외향적이고 활발하며, 다른 사람에게 잘 다가간다고 생각합니다. 공놀이장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처음 보는 사람이더라도 쉽게 어울려서 공놀이를 하곤 합니다. ...
면접관 1 : (갑작스럽게) 하얀 얼굴 씨, 이해와 공감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 (잠시 생각하다가) 음...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고, 공감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면접관 4 : (책상을 친 것인지 무엇인지 큰 소리가 나며) ??!!!!!
면접관 1은 갑작스럽게 그에게 질문을 날렸다. 맥락에서 벗어난, 전혀 엉뚱한 질문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답변했다. 후에 돌이켜보니 나름 명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이해와 공감의 차이라. 하나하나 일일이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답하면 답변이 너무 길어지고 장황해진다. 답변을 효율적이고 짧게 압축할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답변이 나왔다. 면접관 4는 그의 답변에 크게 감명받았는지 충격받았는지, 의자를 거의 박차고 일어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 답변 이후로 면접관 4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상당히 우호적으로 바뀐다.
이후에도 4명의 면접관은 그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낸다. 질문은 많이 받는데, 그의 답변에 대해 꼬리 질문을 한다거나 깊이 있는 설명을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의 속에서 조금씩 의구심이 생겨난다.
면접관 4 : 하얀 얼굴 씨, 독서는 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그 : 아, 전염병이 유행한 이후부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외부 활동이 줄어들면서, 추가로 생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가 독서를 선택했습니다.
면접관 2 : 음... 하얀 얼굴 씨. 이력서를 보면, 방향성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건설사 관심이 있어 영업을 지원했다고 하는데, 관심이 있어왔다고 보기가 좀 힘들군요.
그 : (속으로 뜨끔한다. 설명을 더 요구할 줄 알았으나, 면접관 2는 그대로 말을 끝낸다)
면접관 3 : 하얀 얼굴 씨, 본인이 남들보다 이것만큼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세요.
그 : 아무래도,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절을 빗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타국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내며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루고 돌아온 경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
면접관 4 : 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왜 가셨고 얻어온 것은 무엇인가요?
그 : 대학생 시절, 제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계 일주를 꿈꿨습니다. 무언가 다르겠지, 외국은 더 좋겠지라는 생각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었습니다. 호주에서 여러 일들을 하고 목표들을 달성하며 열심히 지냈지만, 결국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만화의 주인공이 말했듯,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저는 제가 도망쳤던 것들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생각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어진 것에 더 집중하고 감사하며,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는 의지를 다졌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면접관 4 : (우호적으로 웃으며) 책을 많이 읽으셔서 그런지, 표현이 상당히 문학적이시네요.
그 : 아, 감사합니다.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이력서에 기재한 영어 점수들은 호주를 다녀온 이후에 취득한 점수인가요?
그 : 네 맞습니다. 호주에 다녀와서 각각 한 달씩 공부하고 취득한 점수들입니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술은 어느 정도 마십니까.
그 : 컨디션 따라 다릅니다만, 평균적으로 2병 반 정도 마십니다.
면접관 일동 : 두 병 반이요? 허허... 술을 잘 드시는군요.
면접관 2 : 운전은 어느 정도 합니까.
그 : 호주에서 혼자 차를 운전해서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해당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도 운전이 가능합니다.
면접관 3 : 하얀 얼굴 씨, 요즘 운동은 어떤 것을 합니까?
그 : 예전처럼 계속해서 공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면접관 3 : 포지션은 어떻게 되나요? 음... 키나 덩치를 봤을 때...
그 : 센터와 포워드를 담당합니다.
면접관 3 : 아 그래요. 센터 보면 잘할 것 같네요. 허허...
그 : 감사합니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말씀해보세요.
그 : 음... 예전같았으면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제는 취업을 준비하는 지금 상황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면접을 보러 다니고, 취업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나름 보람차고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동생이 먼저 취업을 했고, 저도 나이가 점점 더 많아져가는 시점에서, 장남으로써 어서 취업을 해서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해야 할텐데... 계속 취업 준비만 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조금 힘들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면접관 4 : (웃음을 머금고) 그 감정,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허허...
면접관 1 : 네, 이제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그 : 네, 오늘 이렇게 면접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7번째 기업 면접 준비를 하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제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디 면접에 합격해서, 7번째 기업이 그리는 미래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면접관 일동 : 그래요. 수고했어요.
면접이 끝났다. 분위기는 나름 화기애애했으며, 가뜩이나 중간의 '명언 답변'으로 그는 면접관 4를 완전히 휘어잡았다. 그는 면접관들에게 끌려다니지 않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경험을 모두 이야기했다. 치명적인 실수는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켕기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면접관 2가 지나가듯 말한, 그의 이력서가 방향성이 없다는 피드백이 첫 번째이며, 질문을 많이 받긴 했지만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이 두 번째다.
어쨌든 면접이 끝났으니, 그는 기분 좋게 밖으로 나온다. 혹시나 했지만, 7번째 기업은 이번에도 면접비를 주지 않는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해가 황금빛 노을로 물드는 시간대다. 7번째 기업은 언덕 윗자락에 위치하기 때문에 노을이 잘 보인다. 그는 7번째 기업 첫 방문 때도 이 황금빛 노을에 반했었다.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도 황금빛 노을은 여전히 찬란하다.
그는 황금빛 노을에 심취하여, 면접비 따위는 잊는다. 퇴근할 때마다 이런 황금빛 노을을 볼 수 있다면, 7번째 기업 입사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그렇게 그는 열심히 과거의 기억을 미화했지만, 7번째 기업은 이번에도 그의 뒤통수를 후린다.
면접이 끝나고 일주일, 이주일, 한 달이 지나도 7번째 기업은 소식이 없다.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결국 7번째 기업은 면접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가 더욱 커진다. 그는 7번째 기업에 대한 감정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간절한 취업준비생으로서, 황금빛 노을을 보며 악감정들을 누르고 억지로 좋게 좋게 포장했건만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적어도 탈락이라고 통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7번째 기업을 향한 그의 악감정이 극에 달한다. 그가 이후로 7번째 기업에 지원하는 일은 결코 없었으며, 7번째 기업도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