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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Sep 10. 2022

23번째 기업

자동 결제 단말, RFID

 악연은 잊는다. 그에게는 또 준비해야 할 면접이 있다. 바로 23번째 기업이다. 23번째 기업은, 매출이 간신히 1000억대를 돌파하며 중소기업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는 23번째 기업 채용 공고를 보면서 오히려 꿈과 희망에 부풀었다. 채용 공고, 면접 중 조사 과정에서 엿보이는 제품과 성장 가능성 때문이다.


 23번째 기업은 자동인식 및 결제 단말기, 기업용 모바일 기기 등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회사다. 그가 좋아하는 제조업체에, 채용 직무도 해외영업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는 자신이 원하는 제조업체의 해외영업 직무 공고에 합격했다. 23번째 기업은 아직 조그마한 중소기업이므로, 재무제표도 숫자만 간략하게 나와 있다. 사업 설명 등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그는 23번째 기업 홈페이지 및 뉴스를 샅샅이 뒤진다.



 해외영업 직무이니, 팔아야 할 제품을 잘 알아야 한다. 23번째 기업 홈페이지에는 제조한 제품들이 쭉 나열되어 있다. 한국의 여느 제조업체가 그렇듯, 23번째 기업의 제품들도 알파벳과 숫자를 섞은 이름을 쓰고 있다. BX760, CE480R 이런 식이다. 제품 카테고리는 크게 서넛이 있는데, 기업용 컴퓨터, 기업용 테블릿, 결제 단말기 등이다. 


 홈페이지 제품군에 나열된 수많은 제품들의 이미지를 검색해 본다. 무슨무슨 기능에, 어떤 것이 편리하고, 제품 사양은 어떻다는 등의 정보가 많지만 그는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공학도가 아닌 그는, 제품의 사양보다는 제품 이미지를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많고 많은 제품 이미지를 하나하나 클릭하던 중, 그에게 익숙한 모양의 제품이 보인다.


 기업용 컴퓨터와 테블릿은 일반 핸드폰처럼 생겨서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데, 자동 결제 단말기는 꽤나 익숙하다. 어디서 봤을까. 계속해서 이미지를 보던 그의 머릿속에서 전구가 켜진다. 음식을 배달시켰을 때, 배달원들이 쓰는 조그마한 결제 장비와 비슷하다. 배달원이 금액을 설정하고, 카드를 꼽은 뒤 조금 기다리면 영수증이 출력되던 단말기다. 그 조그마한 단말기에서 어떻게 기다란 영수증이 나오는지 신기했던 바로 그 기계다. 



 익숙하지만 정체는 알지 못했던 기계를 만나자 그는 반가움을 느낀다. 23번째 기업은 자동 결제 단말기 외에도 그에게 친숙한 제품을 제조하고 있다. 제품군 중 RFID로 분류되어있는 제품이다. 그는 RFID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다.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라디오 주파수 인식), 즉 주파수를 이용해서 인식하는 기술이다. 마트나 할인매장에서 비싼 상품의 경우, 도난방지용으로 제품에 RFID칩을 부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상품들은 구매를 하고 나면, 직원이 RFID칩을 떼어서 밖으로 나갈 때 경보음이 울리지 않도록 해준다. 식료품이나 저렴한 상품들의 경우는 효율과 비용을 따져서 일일이 RFID칩을 부착하지는 않는다(RIFD와 바코드는 다른 종류의 기술이다). 하지만 비싼 제품, 특히 의류 등은 RFID칩이 장착된 무언가를 상품에 부착해둔다. 이 부분을 제거하지 않고 몰래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 하면, 출입구 양 끝에 서 있는 RFID 인식 장비 사이의 보이지 않는 주파수 감지선에 걸려서 경보가 울린다.


 앞서 서술했듯 RFID 기술은 의류 쪽에서 꽤나 많이 사용되는 듯하다. 기왕 RFID 칩을 상품마다 부착해두었으니, 의류 상점 직원들은 재고 파악도 RFID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패션에 관심이 많지 않은 편이라, 유X클로 등의 상점에 가도 쇼핑을 별로 하지 않았다. 옷을 보지 않고 여기저기 볼거리를 찾던 그는, 유X클로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보곤 했다. 유X클로 매장 직원들은, 손에 무슨 스피드건 같은 기계를 들고서 매장을 돌아다닌다. 옷이 가지런히 걸려있는 곳에서, 직원 전용 막대기로 옷들을 들추면서 스피드건으로 어딘가를 삑삑 찍곤 했다. 그는 이 광경이 신기해서 계속 지켜보긴 했으나, 무엇을 하는 것인지, 어떤 기계인지는 도무지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유X클로는 23번째 기업의 제품인 RFID 기계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직원들은 RFID 인식 기계를 하나씩 갖고 다니며, 일정 주기로 상품들에 달려 있는 RFID 칩을 찍으며 재고 관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손님이 의류를 구매하면, 결제 직후 직원이 RFID가 심어져 있는 십자 모양의 플라스틱 부분을 떼어서 준다. 떼어낸 RFID칩은 카운터에서 비활성화하거나, 판매 완료 처리를 하고는 향후 새로운 제품에 장착하여 재활용하는 듯하다.



 그는 실물 경제, 기술 등 실질적이고 기능적이며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패션과 의류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의류업계 종사자들이 재고 파악 및 매장 관리를 위해 사용하는 이 단말 기기에는 관심이 많다. 만일 23번째 기업에 합격한다면, 자신이 전혀 관심 없는 의류 업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를 자극한다. 


 23번째 기업의 제품은 이런 식으로, 소비자들에게 친근한 업종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다. 음식 배달을 시켜먹어도, 멋들어진 옷을 입기 위해 의류 매장을 들락거려도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단말기의 존재를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얼핏 스치듯 눈에 띄는 기계가 신기해서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호기심은 이내 사그라든다.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그리 신경 쓸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23번째 기업의 제품들은 소비자들의 배달 소비 및 생활제품 소비에 이미 깊게 관여하고 있다. 그가 만족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화려하지도,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지만, 실질적으로 그 역할이 상당히 크며 중요한 제품'


 그가 지향하는 바와 딱 맞아떨어지는 제품이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제조업체 해외영업 면접 준비를 한다. 준비하는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의 인지도/기능/가치 등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조사를 할수록, 23번째 기업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더욱 높아진다. 23번째 기업 제품의 활용도는 높으며 그 성장 가능성도 커 보인다. 


 제품이 마음에 드니,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기업이라는 점까지도 마음에 든다. 이렇게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데, 기업은 아직 조그맣고 시작 단계다. 작은 기업의 장점은, 신입에게도 여러 기회와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괜찮은 제품을 생산하는 23번째 기업은, (그의 생각으로는)장차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성장하는 기업에 초기부터 입사해서, 몰입하여 근무하면서 기업의 성장을 이끌어가는 신입사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커리어 중 최고의 모습이다.



 23번째 기업에 대한 열정과 충성심이 높아진 그는, 면접 준비에 더더욱 열을 올린다. 뉴스 기사를 전부 찾아보고, 23번째 기업이 참여했던 전시회와 박람회의 이름을 모조리 외운다. 23번째 기업은 아직 조그맣고 역사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의 기업들에 비하면 외워야 할 양이 훨씬 적다. 23번째 기업 제품에 대한 애정으로 무장한 그는 가볍게 외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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