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번째 기업

계약직

 서류 난사는 계속된다. 계속된 탈락으로 인해, 그의 눈높이가 하향 조정된다. 그는, 원래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계약직' 공고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물론 모든 계약직 공고에 난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기준인 매출 1000억을 넘는 기업 중, 산업군과 직무가 괜찮은 경우에만 계약직 지원을 고려한다. 25번째 기업은,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공고를 낸 기업이다.  

 25번째 기업은 나름 대기업 그룹에 속하는 회사다. 그가 이전에 면접을 봤던 ㄱ그룹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25번째 기업이 속한 그룹도 한국인들에게는 인지도가 높다. 25번째 기업 그룹의 금융 계열사들이 TV 광고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손해보험, 금융투자, 자산운용, 저축은행 등 25번째 기업과 같은 이름을 가진 금융 회사들이 끊임없이 TV 광고를 낸다. TV를 얼마 보지 않는 그조차도, TV를 틀 때마다 이들의 광고를 본 기억이 있다.

 25번째 기업이 속한 그룹은, 한국의 여느 대기업들처럼 건설사로 시작했다. 중동 건설 시장에 공들인 끝에 진출에 성공한 뒤, 오일 머니를 쓸어담았다고 한다. 이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철강, 석유화학, 교통, 금융 등에 진출하며 전형적인 대기업의 진로를 따랐다. 25번째 기업도, 이러한 외연 확장 과정에서 생겨난 회사다. 25번째 기업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드는 부품을 제조하는 제조업체다.

 대부분의 한국 대기업들이 그랬듯, 25번째 기업이 속한 그룹도 위기를 맞이한다. 무리한 외연 확장이 원인이었다. 경기 호황 시기에는 괜찮았지만, 경기가 불황에 접어들자 내실이 중요해졌다. 빚을 내어 확장한 그룹 여기저기서 자금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며 그룹 전체에 위기가 찾아온다. 25번째 기업 그룹은, 그룹의 시작이자 오일 머니의 원천이었던 건설사를 매각하곤 뒤이어 주요 계열사였던 철강도 매각한다. 

 연이은 주요 계열사 매각으로 25번째 기업 그룹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아주 해체되는 사태는 막았으나, 주요 알맹이들이 빠져나가 사실상 해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남아있는 금융과 부품 제조 계열사들이 경기 회복과 함께 조금씩 정상 궤도로 올라오면서, 25번째 기업 그룹도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25번째 기업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드는 첨단 부품의 제조업체다. 매출액도 거의 1조에 근접한다. 25번째 기업 그룹의 예전 역사가 어땠다는 것은 그에게 참고사항일 뿐이다. 그는 25번째 기업의 규모도 마음에 들고, 첨단 부품 제조업체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 직무까지도 마음에 든다. 25번째 기업은 경영기획 직무를 채용하고 있다. 다만, 채용 형태가 6개월 계약직이다.

 이전 같았으면 계약직 공고는 쳐다보지도 않고 넘겨버렸을 그다. 하지만 계속된 탈락과 길어지는 취업 준비 기간으로 인해, 그는 계약직 공고에 지원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계약직이니, 회사 규모나 직무를 더 깐깐하게 보리라. 그런데 25번째 기업은 규모와 직무가 괜찮다. 제조하는 부품은, 한국의 위상을 온 세계에서 드높일 만큼 기술력이 뛰어난 첨단 부품이며 미래도 밝다. 직무는 경영기획 직무로, 경영학도인 그가 가장 낭만적으로 생각한 직무다. 그는 경영기획 직무가, 회사의 미래를 제시하고 회사를 이끄는, 경영학도에게는 최고의 직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6개월 계약직이라는 것이 살짝 걸리지만, 회사도 산업군도 제품도 직무도 나름 괜찮아 보인다. 일단 계약직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일을 해서 눈에 띄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남들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에게는 남다른 열정과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다. 그는 25번째 기업 경영기획 직무, 6개월 계약직 채용 공고에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