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부품
복사-붙여넣기로 넣은 서류가 무난히 합격한다. 그는 면접 준비를 시작한다. 6개월 계약직이니, 아무래도 신입 면접 때보다는 난이도가 덜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마음이 가볍지만, 면접 준비 자료는 이전 기업들과 동일하게 만든다. 그럴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면접 준비 자료 만들기는 그 자신을 위한 일종의 수양이자 고행이 되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드는 첨단 부품은, 의심의 여지없는 '공돌이의 영역'이다. 아주 미세한 크기의 회로를 겹겹이 쌓아가며 그려낸 이 부품은, 자동차와 핸드폰은 물론 어지간한 전자 제품의 필수이자 핵심 부품이다. 특히 전기 자동차가 출시된 후에는, 이 첨단 부품의 수요가 급증했다고 한다.
경영학도인 그는, 25번째 기업이 생산하는 첨단 부품에 대해 무지한 상태다. 얼마 안 되는 그의 대학교 이공계 친구들 중 대부분은, 이 첨단 부품 관련하여 취직을 하겠다며 연구실이나 프로젝트 공모전 따위에 뛰어들었다. 그런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대기업 생산공정이나 연구 직무 입사에 성공했다. 문과생들이라면 해당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일 텐데, 공대생들은 이상하리만치 수월하게 또 너무 많이 입사했다. 그의 눈에도 이 격차가 뚜렷이 보일 만큼, 첨단 부품 제조와 판매의 핵심은 공돌이다. 인문계 학생이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첨단 부품이지만, 경영학도인 그는 실직적으로 부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아주 가끔 뉴스를 통해 생산 공정을 보긴 했다. 커다랗고 동그란 푸른색의 얇은 디스크 원판이, 조그마한 네모 구역으로 촘촘히 나뉘어져 있다. 디스크 원판이 기계에 놓이면, 위에 있던 기계 팔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원판의 조그마한 네모를 콕콕 찍는다. 새 부리 같은 기계 팔이 원판을 콕콕 찍을 때마다, 조그마한 네모가 푸른색에서 황금색으로 바뀐다. 그는 이 공정을 볼 때마다, 디스크 원판에 도금을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면접 준비를 하며 알아보니, 이 푸르고 동그란 원판이 첨단 부품의 일부다. 이름은 '웨이퍼'다.
첨단 부품은 온갖 산업의 핵심 재료이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관심이 많다. 그가 면접 준비를 하던 당시, 미국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다. 새롭게 부임한 대통령은, 첨단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 경영진들과 화상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은 어디서 구했는지 웨이퍼(동그란 디스크 부품)를 직접 손에 들고서는 연설을 했다. 앞으로 첨단 부품이 아주 중요해질 것이며, 자신은 미국의 경제 부흥과 안녕을 위해 미국 국내에 첨단 부품 공장을 짓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상회의에 참석한 기업들은 어서 빨리 미국에 공장을 지어 일자리도 창출하고 첨단 부품 수급을 원활히 하라는 뜻이리라. 새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이 직접 부품을 들고 연설할 만큼, 첨단 부품은 필수적이며 미래 수요도 보장되어 있다.
한국은, 전세계가 필요로 하는 이 첨단 부품의 생산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국토는 천연자원이 부족하다. 한국 기업들이 영위하는 대부분의 제조업은, 원자재를 조달해와서 가공한 뒤 다시 파는 형태다. 첨단 소재는 아주 조그맣지만 상당히 복잡하고도 신묘하기 때문에, 듣도보도 못한 온갖 원자재들을 온갖 국가들로부터 조달해서 생산해야 한다. 정치나 외교 문제로 인해 한국과 어느 국가의 사이가 틀어지면, 자연스럽게 원자재 조달에도 문제가 생긴다.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제는 한국이 자체적으로 수급이 가능하다느니, 새로운 원자재 수급처를 발굴하는 기회가 되었다느니, 이는 모두 거짓말이며 사태를 해결할 방도는 없는데 자존심만 세우다가 경제에 타격을 입혔다느니 등의 뉴스가 보도되곤 한다.
그는 면접 준비를 하며, 처음 들어보기도 하고 괜히 영어로 되어 알아듣기 힘든 내용이 많다고 생각한다. 첨단 부품 업계는 특히나 그렇다. 웨이퍼, 파운드리, Fab(생산 공장), Fabless(생산이 아닌 설계 전문) 등 처음 들어보는 용어가 많다.
첨단 부품은 설계를 하는 것도 어렵지만, 설계대로 제대로 만드는 것 또한 어렵다고 한다. 즉, 설계와 생산이 동등한 중요도를 가진다. 두 분야 모두 상당한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 있고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대만의 경우,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첨단 부품 물량을 담당하는데 오로지 생산만 한다고 한다.
생산에 특화한 대만의 반대 경우를 팹리스(FABless)라고 한다. 생산 공장을 갖추지 않고, 기술 개발과 연구만 진행하는 형태다. 연구와 개발에 성공한 첨단 부품을, 대만과 같은 생산 특화 업체에게 위탁하여 생산하는 것이다. 이름만 다를 뿐, 제조업계의 OEM(주문 위탁 생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그다.
첨단 부품 생산 공정, 부품, 기술 전반에 대해 훑어보기는 했지만 그는 경영학도다. 아무리 훑어봐야, 대학교 4년 내내 연구실과 프로젝트를 수행한 공돌이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25번째 기업이 뽑는 직무는 경영기획이다. 첨단 부품 생산으로 인한 원가 / 매출 / 이익 등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시장 상황을 분석하여 방향을 제시하는 인재를 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기술적인 측면은 일단 이 정도로만 알아두면 괜찮겠다고 생각하는 그다.
그는 25번째 기업의 사업부문, 매입 유형(웨이퍼, 화학, 공정용 가스 등), 매출 유형(웨이퍼, 칩), 매출을 다시 내수 시장과 수출 시장으로 나누어 표를 만든다. 판매 경로, 판매 방법 및 수금 조건, 현재 25번째 기업이 집중하고 있는 전략은 무엇인지를 재무제표와 뉴스 기사 등을 통해 파악하고는 면접 준비 자료에 정리한다.
면접 준비 자료 제작이 끝나고, 그는 면접 준비 자료를 달달 외우기 시작한다. 그의 면접 준비 자료가 완벽하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완벽한지 어떤지 평가받을 수조차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면접 준비라면 어디 가서 꿇리진 않으리라 생각하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