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다
면접날이 밝았다. 그는 자신의 방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다. 25번째 기업은 면접을 화상으로 진행한다고 메일로 안내했다. 화상 면접 프로그램은 줌(zoom)이다. 25번째 기업은 안내 메일에서, 면접 복장은 자율이며 정장 착용을 '지양'하라고 적어놓았다. 굳이 정장을 지양하라고 명시해놓았으니, 그는 여느 때처럼 무늬 없는 까만 맨투맨을 입는다.
화상 회의실에 입장하여, 그는 까만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계약직 채용이라서인지, 무엇 때문인지 긴장이 풀린 그는 잡생각이 떠오른다. 그는 25번째 기업의 채용 프로세스가 꽤나 불친절하다고 생각한다. 25번째 기업은 서류 합격으로부터 3일 뒤 곧바로 면접을 진행하겠다고 통보했으며, 앞으로의 채용 전형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면접이 1차로 끝나는 것인지 2차까지 진행되는 것인지, 각각 결과 통보는 언제 해주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원래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급하게 필요한 것인가. 까맣던 화면이 회의실로 전환된다. 그는 생각을 비우고 면접용 가면을 쓴다.
진한 눈썹에 안경을 낀, 순수하고 열정적인 만화 캐릭터같이 생긴 면접자 1
그
v자형 얼굴, 여리여리한 인상을 풍기는 면접자 3
좌측, 대학교 교수님 같은, 상고 머리에 안경을 끼고 머리가 회색인 50대 남자 면접관 1
중앙, 둥근 머리통에 긴 앞머리, 약간 납작한 얼굴의 50대 남자 면접관 2
우측, 긴 머리에 안경을 끼고, 하얀색 연구원 가운이 잘 어울릴 법한 30대 여자 면접관 3
그는 면접관과 면접자들을 훑는다. 면접관들의 느낌은 평범한 반면, 면접자들은 조금 특이하다. 면접자 1은 전형적인 소년 만화 주인공 같은 느낌으로, 순수한 열정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하지만 비대면 면접 경험이 얼마 없는지, 카메라 각도를 잘못 잡았다.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셀카를 찍을 때와 정반대의 각도다. 보는 사람들이 면접자 1을 올려다보고, 면접자 1이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각도다. 이러한 각도 때문에 면접자 1의 턱이 상당히 부각된다.
면접자 3은, 노트북 카메라의 성능이 떨어지는지 픽셀이 깨지면서 뿌연 안갯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면접자 3의 말투나 반응도 약간 느린 편이다. 뿌연 화면과 느린 반응이 시너지를 일으켜, 면접자 3은 약간 답답한 인상을 준다.
면접자 1과 3 모두 면접 경험이 적은 듯하며, 나이도 그보다 많이 어린 듯하다.
면접관 3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면접자 일동 : (다들 편안하게) 안녕하세요~
면접관 3 : 네, 면접 바로 시작할게요. 면접자 1부터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면접자 1 : 안녕하세요. 면접자 1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면접관 3 : (잠시 침묵한다) ... 끝인가요?
면접자 1 : (해맑게) 네, 끝입니다!
면접관 2 : 다른 지원자들 보면, 면접 때 보통 1분 정도로 자기소개를 합니다. 준비한 자기소개 같은 것 없나요?
면접자 1 : (당황하여) 아, 1분이요? 아, 그, 제가...
면접관 2 : 우선 다른 분들부터 자기소개하고 난 뒤에 다시 자기소개하실까요?
면접자 1 : (살았다는 듯이) 네!
일단 넘어가긴 했지만, 면접자 1은 자기소개할 기회를 다시 얻지 못했다.
면접관 3 : 알겠습니다. 하얀 얼굴 씨?
그 : 네, 안녕하십니까! 25번째 기업 경영기획 직무에 지원한 하. 얀. 얼. 굴.입니다! 저는 2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한 실천력입니다. 저는 호주 워킹... ...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취미 생활인 공놀이를 통해... ... 이상 두 가지 강점, 강한 실천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25번째 기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지원자 하. 얀. 얼. 굴.입니다. 감사합니다.
면접관 3 : 네, 면접자 3 씨?
면접자 3 : (졸린 듯 느린 말투로) 네, 안녕하세요. 면접자 3입니다. 저는 외국에서 열심히 공부한 경험이 있는데요. 해외에서... ...
면접관 2 : 네, 반갑습니다. 앞서 자기소개를 하실 때, 하얀 얼굴 지원자는 본인의 강점을 2가지 말해주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면접자들은 그 이야기를 안해줬습니다. 강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시겠어요?
면접자 1 : 아, 네! 저는 대학교 시절, 회계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회계를 공부하면서, 기업의 가치와 장부를... ...
면접자 3 : 저는,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글로벌 감각을 키웠어요. ...
면접관 1 : 면접자 3 씨, 글로벌 감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답한 내용을 영어로 해보세요.
면접자 3 : (흠칫 당황하며) 아, 영어로요? 어... 음... OK, um...
면접관 일동 : (다들 기다린다)
면접자 3 : 아, 지금 조금 갑작스러워서요. 어, 시간을 조금 주실 수 있나요?
면접관 1 : 알겠습니다.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파운드리 사업에 대해 아는 것을 이야기해보세요.
그 : (갑작스레 받은 질문에 머릿속에 까매진다. 티내지 않고 침착하게) 네, 파운드리 사업 말씀이십니까. 면접 준비를 하면서 조사한 결과, 첨단 부품 사업 중 웨이퍼 관련 사업부로 이해했습니다. 생산 공장을'에프-에이-비'라고 하는데, 저는 팹이라고 발음합니다만, 이 발음이 맞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면접관 1 : (잠시 끼어들어) 팹입니다. 해당 발음이 맞습니다.
그 : 네, 감사합니다. 현재 25번째 기업의 사업부 중 파운드리 사업은 경기 공장에서 웨이퍼 7만 5천 장, 충청 공장에서 5만 5천 장을 생산하여 총 13만 장의 생산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공장 가동률이 각각 90%를 넘으며, 매출은 9000억이 넘고 국내 비중이 큰 사업부로 25번째 기업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면접관 1 : (별 반응이 없다)
면접 준비 자료를 달달 외웠지만, 워낙 생소한 업계이다 보니 질문을 받은 순간 그의 머리가 까매진다. 자칫 잘못하면 입을 못 떼고 끝날 뻔했지만, 그는 약간의 뜸을 들이면서 기억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억 복구가 완벽하지는 않아, 약간 뭉뚱그리는 답변이 된다.
면접관 2 : 면접자 3 씨, 영어 답변 준비되셨나요?
면접자 3 : 아, 네! Um, Ok. I studied in US, !@#$#$% University. My major is management and I learned how to manage... ...
그는 면접자 3이 영어 답변을 미루는 모습을 보며, 외국에서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전형적인 유학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가진 뒤 대답하는 면접자 3의 영어는 나름 괜찮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유학파들보다야, 훨씬 나은 영어 실력이다. 물론 네이티브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답변 내용은, 경영학을 공부했으며 해외 친구들을 사귀면서 글로벌 감각을 키웠다는 비교적 뻔한 내용이다.
면접관 1 : 면접자 1 씨, 대학에서 회계 공부를 했다고 하셨네요. 우리 회사 재무제표도 봤나요?
면접자 1 : 네, 봤습니다!
면접관 1 : 어떻던가요?
면접자 1 :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아, 네. 그... 25번째 기업은, 매출 9000억, 영업이익 XXX억, 당기순이익 XX억으로 건실한 재무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 영위하고 있는 사업은 첨단 부품 제조로, 사업 부문은 브랜드 사업과 파운드리 사업으로 나뉩니다. 파운드리 사업은 웨이퍼 수탁 생산 및 판매이며, 브랜드 사업은 디스플레이 구동 및 자사 제품을 설계하고 판매합니다. 첨단 부품 시장은 전년 대비해서 5% 상승하였으며, 다른 산업들의 성장으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이 예상되는 시장입니다. 25번째 기업은 국내에 X개 공장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 대만, 중국 등에도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
면접자 1은, 질문을 받자마자 답변을 술술 잘한다. 내용만 봐서는 그렇다. 그런데,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면접자 1의 모습에는 무언가 탐탁지 않은 부분이 있다. 면접자 1의 눈도 그렇고, 답변을 하는 목소리도 그렇고, 아래에 적혀 있는 무언가를 읽는 듯한 목소리다. 화상 면접이라 확실하진 않으나, 면접자 1의 답변이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의심이 짙어진다. 카메라가 아닌 어딘가로 내리깔아진 눈, 적힌 것을 낭독하는 듯한 건조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면접관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응 없이 답변을 듣고만 있다.
면접관들은 다른 지원자들에게는 관심을 상실했는지, 그에게만 질문을 하나 던진다.
면접관 3 : 하얀 얼굴 씨, 실물 경제에 이바지하는 인재가 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그 : 아 네, 우리나라는 제조업 기반 국가이며, 그 제조업 중 첨단 부품 분야에서 최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첨단 부품 제조업체인 25번째 기업 기획팀에서 일한다면, 실물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답변 이후, 면접은 갑자기 마무리되려 한다.
면접관 2 : 네, 잘 들었습니다. 혹시, 우리 기업에 궁금한 것이 있거나 하면 질문해보세요.
면접자 1 : (열정적으로) 네! 제가 먼저 질문드려도 될까요!
면접관 2 : 네, 해보세요.
면접자 1 : (뭘 읽는 것인지 눈을 또 내리깔고) 뉴스 기사를 보니, 25번째 기업은 새로운 생산 설비를 도입해서 생산량을 증대시킨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존의 웨이퍼 공정보다 더 효율적인, @#$!@%$ 공정이라는 것을 도입해서, 향후 시점부터 생산량을 늘린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나요!
면접관 2 : 네, 그, 해당 부분은... 저희가 원래 공장은 충청도에 있었습니다. 이번에 경기에 새로 지었고요.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장 부지가 얇지만 긴 직사각형 모향으로 되어 있어요. 첨단 부품 제조 공정 특성상... ... 그래서 경기 공장의 생산 효율이 더 좋습니다.
면접관 2가 공장마다 생산 효율과 생산량이 다른 이유를 설명해주었는데, 공정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히 많다. 그는 주의깊게 들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았을 때는 자세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면접자 1의 눈 위치가 영 미덥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 그도 질문을 하여 25번째 기업에 대한 관심을 어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 저도 질문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미국 대통령이 화상 회의에서 직접 첨단 부품인 웨이퍼를 들면서까지 첨단 부품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미국 공장 증설까지 언급했는데, 25번째 기업도 미국 진출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면접관 2 : 아 해당 부분은, 지금 현재 첨단 부품 수요 중에서 90%가 넘게 소화를 못 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매출과 시장 성장 전망도 긍정적인 상태입니다. 네 그래서, 우선 저희 회사는 미국 진출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그 : 네, 감사합니다.
면접자 3 : 저도, 질문 드릴게요. ... (기억나지 않는다)
면접관 2 : 네, 더 이상 질문 없으시면, 이상으로 면접 마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면접자 일동 : 감사합니다!
화상 회의 화면이 꺼진다. 그는 왠지 입맛이 씁쓸하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주된 이유는, 같이 면접을 본 면접자들 때문이다.
면접자 1 : 순수하고 열정있어 보였지만 면접 내내 무언가를 줄줄 읽는 듯 시선 처리가 불명확했다. 회계 공부를 했다고 어필했지만, 정작 숫자 관련 이야기를 할 때도 준비해온 자료를 줄줄 읽는 듯했다.
면접자 3 : 답변과 반응이 느려 답답한 인상을 주었다. 영어 실력은 보통이나, 해외 경험을 통해 글로벌 감각을 키웠다는 뻔하고 근거가 불명확한 이야기만 했다.
그는, 면접관들이 이러한 느낌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만일 면접이 한 번으로 끝난다면, 그리고 면접 조가 하나뿐이었다면, 합격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 자신이다. 문제는, 그와 같이 면접을 본 경쟁자들의 상태다.
아무리 계약직이라 할지라도, 서류에서 한 번 필터링을 했을 터다. 그런데 그의 눈에 보인 면접자들의 상태는 의문점이 많다. 애초에 지원자가 너무 적어서, 어쩔 수 없이 전부 서류 합격을 시킨 것일까. 아니면 인사팀의 선구안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면접에서 말은 잘 못하더라도 서류상으로는 엄청난 스펙을 가진 인재들이었던 것일까. 적어도 그가 화면을 통해 보았던 인상으로는 아니었다.
수십 번의 면접을 통해, 그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봐왔다. 좋은 기업의 좋은 자리일수록 경쟁자들이 쟁쟁했다. 다시 말해, 좋은 자리일수록 들어가기 어렵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안 좋은 자리일까. 아니, 좋은 자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다.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반드시 안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것만은 꽤나 명백해 보인다. 그는 생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