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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번째 기업

ERP

by 하얀 얼굴 학생

27번째 기업으로부터 서류 합격 및 면접 안내 메일이 도착한다. 27번째 기업은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서비스하는 기업이다. 조그마한 기업이지만, 라디오에 워낙 지속적으로 광고를 해서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라디오 중간중간, 27번째 기업 이름이 들어간 독특한 멜로디의 광고송이 들린다. 27번째 기업이 뭘 하는 기업인지는 몰라도, 한국인이라면 이 라디오 광고송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광고송은 익숙한데, 가사에 27번째 기업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도 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 흔히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라고 부른다. 그는 나름 경영학도여서, 학교 수업에서 ERP에 대해 들어보긴 했다. ERP를 언급하는 교수들은, 기업의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획기적이고 효율적이고 통합적인 시스템이라며 ERP를 극찬하듯 했다. 그가 수강했던 수업의 여러 교수들이 ERP를 예찬했지만, 사실 그는 속으로 그리 동의하지 않았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체감이 되질 않아서다. 설명을 들어보면, 기존에는 흩어져 있던 분야의 정보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한 것이라고 한다. 물류, 재고, 회계, 영업, 인사 등의 정보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해서 관리와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높인 것이 바로 ERP라고 한다. 회사를 들어가보지 않아서인지, 그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27번째 기업은 바로 이 ERP, 기업용 소프트웨어 관련하여 업을 영위하는 회사다. 라디오 광고 덕에 인지도가 꽤 높긴 하지만, 시장 점유율은 그렇지 못하다. ERP 시장 또한, 대기업이나 외국계 커다란 회사들이 이미 대부분의 시장을 선점한 상태다. 27번째 기업은, ERP 시스템 도입에 쓸 돈이 넉넉지 않은 중소기업들을 노리는 전략을 취한다. 비싼 비용 때문에 ERP 도입을 꺼리는 조그마한 회사들에게, 27번째 기업 자사 ERP를 홍보하고 설득하여 도입하게끔 하는 전략이다.


자금이 넉넉한 기업들은, 당연히 전사 관리 시스템도 좋은 것을 쓰고자 한다. 27번째 기업의 시스템이 아닌, ERP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대형 외국 기업의 시스템을 쓰는 경우가 많다. 시간도 자금도 넉넉하다면, 아예 자신들의 회사에 꼭 맞춘 ERP를 자체 개발해서 쓰기도 한다.


중소기업을 타겟으로 한 27번째 기업은, 애초부터 고객층이 많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27번째 기업의 시장 점유율과 매출은 낮은 편이다. 그가 면접을 준비했던 당시, 27번째 기업의 1년 매출액은 300억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다.



매출액 300억. 그가 마지노선으로 잡았던 매출보다 낮다. 그는, 적어도 매출이 1000억은 넘는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구장창 떨어지는 면접과 계속해서 늘어나는 취업 준비 기간으로 인해 그의 마지노선은 점차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27번째 기업은, 매출액과 회사가 작아서인지 직무가 상당히 포괄적이다. 채용 공고도 특정 직무의 신입을 뽑는 것이 아니다. 직무가 아닌, '서비스본부'의 신입사원을 뽑는다. 서비스본부는 고객지원팀, 영업팀, 교육팀, 개발기획팀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우선 서비스본부 소속으로 신입을 뽑은 뒤, 본부 내에서 1년 동안 순환 근무를 시킨단다. 1년 동안 고객지원 / 영업 / 교육 / 기획을 모두 경험해보고 난 뒤 적성에 맞는 부서에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나이도 많고, 커리어 시작이 한참 늦은 그에게는 이 공고가 썩 괜찮아 보인다. 고객지원, 영업, 교육, 기획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압축해서 모두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작이 늦은 만큼, 짧은 기간 내에 더 많은 경험들을 하면서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서비스 부문을 모두 경험하고 나면,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을 빠삭하게 아는 실무형 기획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27번째 기업 면접 준비를 시작한다. ERP 시장에 대해 조사하고, 재무제표를 정리하고, 27번째 기업 홈페이지와 관련 뉴스들을 검색한다. 여느 때처럼 면접날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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