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머리
27번째 기업은, 안내 메일에 '자유 복장'이라고 기재했다. 그는 기재된 대로, 자유롭게 회색 청바지와 검은 반팔을 입는다. 27번째 기업에 도착하여 대기실로 들어가니, 그를 제외한 면접자들은 전원 정장을 입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7번째 기업이 그의 복장을 '자유로움'으로 보았을지, '어리석음'으로 보았을지는 알 길이 없다.
그를 포함하여 3명의 면접자들이 대기실에 앉아 있다. 잠시 뒤, 인사팀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직원이 들어와 이것저것 안내를 한다.
인사팀 직원 : 안녕하세요, 오시느라 힘드셨죠?
면접자 일동 : 아, 아닙니다.
인사팀 직원 : 네 우선, 몇 가지 안내드릴 게 있어서 말씀드릴게요. 지금 면접보시는, '서비스본부' 신입사원 면접입니다. 저희가 지금 인원이 많이 부족한 상태라, 빠르게 채용을 진행하고 있어요. 합격하시면 바로 내일이나 모레 즈음 연락을 드릴 거고요, 입사는 바로 다음주 월요일입니다.
면접자 일동 : (눈을 빛내며) 아, 네.
인사팀 직원 : 공고에 써 있는지 모르겠네요. 저희 서비스본부는, 고객지원/영업/교육/기획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입사하시게 되면, 처음에는 모든 부서의 일들에 대해 배우시게 될 겁니다. 향후에 적성과 본인 의사를 고려해서, 부서에 배치되실 거고요. 아, 그리고 고객지원팀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앉아서 전화받고 그런 고객지원은 아닙니다. 염려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 (면접 준비 자료 종이에, '전화받는 고객지원팀은 아니다' 라고 적는다)
인사팀 직원 : 네 그럼, 10분 있다가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면접 시작되면, 자기소개와 함께 답변해주셔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어떤 질문인지 말씀드릴 테니, 10분 동안 답변 생각하신 뒤에 면접 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질문은
1) 서비스본부 4개 직무 중 자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생각하는 직무
2) 해당 직무 관련 본인의 강점 및 이유
3) 27번째 기업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 그리고 면접 끝나면, 추가로 영어 면접이 진행될 거니까요. 실무진 면접 끝나고 바로 귀가하지 마시고, 대기실에서 대기해주세요.
면접자 일동 : 네
질문을 전달하고, 인사팀 직원은 대기실 밖으로 나간다. 그를 포함한 3명의 면접자들은, 각자의 답변을 생각하며 말이 없다. 10분 뒤, 인사팀 직원이 대기실로 들어와 면접 시작을 알린다. 인사팀 직원을 선두로, 3명의 면접자들이 일렬로 서서 뒤를 따른다.
특징이 잘 기억나지 않는, 회계를 공부했다는 면접자 1
키가 큰, 영어 강사를 오래 했다는 면접자 2
그
좌측, 핑크색과 하얀색의 가로 줄무늬 카라 반팔티, 테가 얇은 동그란 안경, 마른 체격, 특히 카라티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얇은 구릿빛 피부의 40대 후반 면접관 1
중앙, 탄탄한 체구, 훤칠하게 생겼으며 앞머리를 세운 30대 후반 면접관 2
우측, 머리숱이 적어 머리를 민 듯 짧은 머리, 달걀형 얼굴을 가진 면접관 3
그의 마지노선인 1000억 매출에 미달하는 기업이어서인지, 그는 비교적 편안하게 면접에 참석한다. 그래서인지 면접관과 면접자들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면접관 3 :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면접자 일동 : 안녕하십니까! (자리에 착석한다)
면접관 3 : 네, 반갑습니다. 면접을 시작함에 앞서,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자기소개를 해주시는데, 지원하신 서비스본부 직무 중에 자신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직무, 그 이유와 자신의 직무 강점을 같이 말해주세요.
면접자 1 : 네, 안녕하십니까! ... 저는 영업이... ...
면접자 2 : 안녕하십니까! ... 저는 교육이... ...
그 : 안녕하십니까, 27번째 기업 서비스본부에 지원한 하. 얀. 얼. 굴.입니다! 저는 2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한 적응력입니다. 저는 호주 워킹... ...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취미 생활인 공놀이를 통해... ... 이상 저에게는 강한 적응력과 친화력이라는 두 가지 강점이 있습니다.
저는 서비스본부 직무 중, 교육 직무가 가장 저에게 적합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영업이라 답할까 고민했지만 왠지 교육이 더 편해보였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에게는 적응력과 실천력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직무는, 서비스에 먼저 적응한 뒤에 해당 서비스를 다른 이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직무라고 생각합니다. 27번째 기업은 앞으로도, 프로그램의 새로운 기능들이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기능에 빨리 적응하고, 소통력을 바탕으로 이 기능을 다른 직원들에게 교육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면접관 3 : 잘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27번째 기업을 한 마디로 정의해주세요.
면접자 1 : 27번째 기업은... ...
면접자 2 : 저는 27번째 기업을... ...
그 : '뱀의 머리' 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27번째 기업은, 현재 중소기업들을 타겟으로 하여 시장 점유율을 조금씩 늘려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ERP 시장은 오X클, X존 등 대기업이 이미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상태입니다. 27번째 기업은, 이러한 대기업들의 행보를 따르지 않고, 틈새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기업들을 공략하며 조금씩 매출과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27번째 기업의 전략에 공감하며, 용의 꼬리가 아닌 '뱀의 머리'라고 비유하겠습니다.
이후의 면접은, 면접관들이 각자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면접관 2 : 면접자 1 씨, 회계를 공부하셨다고요?
면접자 1 : 그렇습니다!
면접관 2 : FIFO를 썼을 때와, 총평균법을 썼을 때 무엇이 다른가요?
면접자 1 :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그, 어, 원가가 달라집니다! FIFO는... ... 총평균법은... ...
면접관 2의 질문을 들으며, 그는 속으로 큰일났다고 생각한다. 그도 면접관 2가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면접자 1은 원가가 달라진다고 답했는데, 아주 틀린 답은 아니지만 명확한 답은 아닌 듯하다. 그는 자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들어오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으나, 다행히도 면접관 2는 면접자 1에게만 질문하고 넘어간다.
면접관 2 : 면접자 1 씨, 회사 경험이 있네요. 이전 회사에서 ERP를 썼나요?
면접자 1 : 네, 썼습니다!
면접관 2 : 무슨 프로그램이었나요?
면접자 1 : X존이었습니다! ... ...
면접관 1 : 면접자 2 씨, 영어 강사를 하셨네요? 자세하게 말해보세요.
면접자 2 : 네, 대학교 때부터, 영어 강사를 했습니다. 원래 저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영어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영어 공부를 제대로 했고 결국 토익 990 만점과 오픽 AL을 취득했습니다. 이후에도 매 3개월마다 해당 시험들을 보면서 영어 점수를 갱신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영어 강사를 했습니다.
면접관 1 : 음... 그래요. 그... 강사를 그만두려는 이유가 뭔가요? 아니 그러니까. 사실 직장인 월급이 별로 높지 않거든요. 강사 때 벌던 돈보다 덜 벌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면접자 2 : 네 괜찮습니다. 강사는 제가 대학교 때 어쩌다가 시작한 일이지,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 27번째 기업에 관심이 있어와서... ... 강사 때보다 월급이 낮더라도 괜찮습니다.
면접관들은 면접자들에게 개별적으로 질문을 던지는데, 그에게도 개인사 관련된 질문이 몇 번 날아온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워킹홀리데이 때 돈을 목표로 했다고 했습니다. 돈을 목표로 해서, 잃은 것이 있나요?
그 : 돈을 목표로 한 것, 그리고 경험을 목표로 한 것 두 가지 때문에 정착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던 부분이 조금 아쉽습니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돈과 경험이 크다고 생각하여 많이 옮겼습니다. 정착에 대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면접관 1 : 돈을 많이 번 것 같은데, 투자하거나 어디에 썼나요?
그 : 돈은 아직 쓰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환율이 바닥이라, 손해가 심합니다.
면접관 일동 : 하하허허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영업 직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이 질문을 받고, 면접관 1이 영업 담당자라고 생각한다)
그 : (자신의 조사 내용을 어필할 기회다) 긍정적입니다. 한 가지 직무를 꼽아야 해서 교육을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영업 직무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영업 직무에서도 일하고 싶습니다. 다만, 제가 홈페이지에서 찾아본 결과 27번째 기업의 경우 영업사원이 고객사 한 건당 20만 원의 가입비와 월 4만 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아직 회사를 들어가보지 못한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해당 금액이 영업팀원들에게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면접관 1 : (그를 바라보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회사 영업사원들은, 실적이 월마다 4만 원씩 쌓이는 것에 더해, 거래처와의 관계 형성도 업무의 일환입니다. 그러므로 20만 원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영업사원들은 더 큰 가치를 냅니다.
그 : 회사 외부인으로서 본 짧은 의견이었습니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면접관 3 : 네, 마지막으로,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세요.
면접자 1 : 네 저는... ...
면접자 2 : 저는... ...
그 : (기억나지 않는다)
면접관 3 : 이상으로, 면접을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면접자 일동 : 감사합니다!
면접이 끝나고, 면접자들은 대기실에서 대기한다. 잠시 뒤 직원이 대기실로 와서, 면접자 1명의 이름을 호명한다. 호명된 면접자가 직원을 따라 나갔다가, 약 15분 정도 뒤 대기실로 돌아온다. 직원은 이번에는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직원의 뒤를 따라가니, 직원은 회의실 같은 방으로 그를 안내한다. 그를 인솔해온 직원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이 직원이 바로 영어면접 면접관이다.
면접관 : 안녕하세요, 영어 면접 시작할게요. 바로 괜찮으실까요?
그 : 아, 네.
면접관 : OK, Nice to meet you 얼굴 하얀. How are you
그 : Not bad. How about you?
면접관 : Good Thank you. Can you introduce yourself?
그 : K. This is 얼굴 하얀, Applying for 27th Corporation. I'd like to introduce myself through 2 strong points... ...
면접관 : Ok... Do you like travel?
그 : Yeap.
면접관 : When was your last travel?
그 : I would say, my working holiday.
면접관 : You mean, Australia?
그 : Yeah how do you know?
면접관 : One of my friend went to Australia for working so I heard it from her. How was... ...?
그는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그다지 공포나 거리낌이 없으므로, 영어 면접은 수월하게 진행된다. 영어 면접을 진행하는 면접관은 여성으로, 나이는 20대 중반,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대 후반으로 보인다. 면접관은 Native까지는 아니지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티가 나는 발음과 영어 실력이다. 영어 면접은, 면접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가깝다.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한국말보다 수평적인 인상이 강하다. 영어 자체를 모국어만큼 자유로이 구사하지 못해서도 있지만, 특히나 한국인들은 영어를 수평적인 언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도 마찬가지이며, 그는 영어 면접이 면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영어 면접의 면접관과 영어로 이야기하며, 그는 내심 속으로 생각이 많다. 아무리 나이를 많게 잡아도, 영어 면접 면접관은 그보다 나이가 아래다. 그의 느낌상, 이 면접관도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회사 생활 초창기, 영어 면접 면접관으로 면접까지 진행하다니. 얼마나 신이 날까. 그의 그릇된 인식 때문인지, 눈앞의 영어 면접관은 상당히 발랄하고 신이 난 것처럼 보인다. 면접이니 그도 쾌활하게 자신의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영어로 이야기를 했지만, 영어 면접을 끝마치고 대기실에 들어선 그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다.
영어 면접이 끝나고, 그는 대기실에서 면접비를 받은 뒤 집으로 향한다. 매출액도 작고, 회사 규모도 조그맣다. 하지만 여러 직무를 경험하면서, 나름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풍긴다. 만일 합격해서 다음주 월요일부터 입사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는 망상의 나래를 펼친다.
면접을 본 바로 다음날, 27번째 기업으로부터 결과 통보가 날아온다.
최종 면접 불합격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그는 자신이 왜 떨어졌는지 생각해보지만, 명확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다. 혹시, 영업사원들을 깔보았다고 생각되어서일까. 하지만 그는 영업 직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최대한 공손하게 이야기했으며, 외부인으로써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조합해서 회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영업 직무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자 한 의도였다.
면접관이 이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러한 그의 의도조차도 고깝게 여기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해당 발언이 아니라 다른 점이 문제였을까. 면접 탈락자에게는 피드백이 없다.
탈락하긴 했지만, 그는 27번째 기업에 큰 미련은 없다. 매출액이 1000억도 넘지 않는, 애초에 그의 마지노선에 미달하는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별 감정 없이, 그는 다시 모니터 속 채용 공고들을 쳐다보며 서류를 난사한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 있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지만 벌써 영어 면접관 자리를 꿰차고 있던 면접관의 모습이 떠오른다. 또한, 불합격이라는 글자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린다. 미련이 없다고 했지만, 탈락은 탈락이다. 매출액 300억 기업에도 탈락하는 그가, 매출액 1000억이 넘는 기업에는 합격할 수 있을까.
머리를 비우고, 그는 다시 서류를 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