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합격 메일이 도착한다. 39번째 기업이다. 그가 지원한 직무는 '재경'이다.
여느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39번째 기업은, 그의 관심사와 우선순위에서 꽤 떨어져 있는 기업이다. 매출은 수천억 규모로 건실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제조업체도 해외영업 직무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평상시처럼, 질문의 의도에 대강 부합하는 자기소개서를 복사-붙여넣기해서 지원했다.
재경 직무를 지원한 것도, 그가 넣을 수 있는 다른 직무가 딱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성격과 적성이 재경 직무와 부합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넣을 수 있는 직무에 이력서를 밀어 넣는다.
그가 자신의 서류 지원 이력을 모조리 적어놓은 파일을 훑던 어느 날, 39번째 기업의 이름을 발견한다. 최소 조건만 맞는 공고에는 수백 번씩 이력서를 난사했으니, 그가 기억을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39번째 기업에 처음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약 6개월 전 즈음 '기획' 직무로 서류를 넣었다가 탈락했다. 6개월 전에는 '기획', 이번에는 '재경'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재경 직무보다는 기획 직무가 왠지 더 멋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서류 합격 메일을 받고, 면접 준비를 시작한다. 1순위 산업군도, 1순위 직무도 아니니 그의 마음가짐과 면접 자료가 가벼워진다. 준비를 하면서 보니, 39번째 기업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우선 정보가 별로 없다. 매출액은 수천억으로 꽤 건실해 보이는데, 비상장이어서인지 노출된 정보는 적은 편이다. 건설 쪽이긴 한데 종합 건설이 아니라 통신 건설만 영위한다. 또 홈페이지를 보니, 건설 이외에 IT도 하고 있는 듯하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자세한 윤곽은 보이지 않으니, 그는 대강의 청사진만 그린다. 39번째 기업은 아마도 통신 건설업을 주로 하며, IT에도 발을 담근 듯하다. 그가 지원한 재경 직무는 전사의 재무를 관리하니, 아마 종합건설사의 재경 직무와 비슷하리라. 그는 이전의 대형 건설사 면접 준비를 통해, 건설사의 매출 인식 과정을 인지하고 있다.
재무상태표와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얄팍한 기업 분석 자료를 만든다. 면접 질문들을 뽑아내고, 답변을 이리저리 구상한다. 1순위 산업군도 1순위 직무도 아니지만 우선은 취업이 먼저다. 어떻게 해야 면접관들의 귀에 박히는, 면접관들이 흐뭇해할 만한 답변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 근래에 읽었던 책들을 총동원하여 말을 만들어낸다. 그의 가상 답변 중 포장 완성도가 높은 답변들은 아래와 같다.
- 39번째 기업은 통신 건설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재무제표와 홈페이지를 참고하니 정유/화학, 에너지, 발전시설 등 플랜트와 인프라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39번째 기업은 IT업계에도 종사하고 있습니다. 발전소, 화학 시설 등 현실 세계에서의 인프라를 건설하던 39번째 기업은, 그 영역을 확장하여 이제는 IT, 즉 가상공간에서의 인프라까지 구축하며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
- 건설업은 워낙 자본, 시간,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업이므로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하고 그래서 수직적 조직 구성을 가집니다. 이에 비해 IT업계는 개개인에게 자율을 부여하고 상당히 수평적입니다. 39번째 기업은 건설업과 IT를 동시에 영위하고 있습니다. 내부에 수직적 구조의 조직과, 수평적 구조의 조직이 공존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른 형태의 두 가지 구조가 공존하면서 조금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숫자를 다루는 재경 신입사원으로서, 기업의 언어인 숫자로 소통하며, 수직적 구조의 건설과 수평적 구조의 IT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답변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상당히 만족스럽다. 학창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전공지식과, 면접 준비를 하며 독서를 하며 긁어모은 지식으로 한껏 포장한 말들이다. 그는 자신의 이 발언들이, 현업자 못지않은 통찰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리라 망상한다. 돌이켜보았을 때, 포장은 나름 잘 된 듯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때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