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느낌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라도 일단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메일이 날아온다. 그는 메일이 왔는지도, 도착할 메일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메일을 열어본 시각은 저녁 즈음, 메일이 도착한 시각은 이른 오전이다.
밀물이 끝나고 썰물을 맞이한 그는 오후 늦게 컴퓨터를 키고, 이력서를 넣을 채용 공고가 있나 훑어본다. 채용 전형이 대부분 종료된 연말이라 공고가 없다. 괜히 이메일에 로그인을 한다. 새로운 메일이 하나 있다. 어디서 날아온 탈락 메일이거나, 아니면 광고 메일이겠지. 읽지 않은 메일의 숫자를 없애기 위해 메일을 클릭한다. 클릭하는 순간, 그의 눈에 메일 제목이 얼핏 스친다.
'39번째 기업 신입사원 최종 합격 공지 및 신체검사 안내의 건'
방금 뭘 본 것인가. 그는 메일 제목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제목도 제대로 보지 않고 클릭한 메일이 열린다. 뭐라뭐라 쓰여있는데, 내용이 길다. 그가 지금껏 받았던 탈락 메일보다 긴 것은 확실하다. 이 회사는 탈락 메일을 이렇게 길게 적는 것인가. 메일 제목을 다시 확인하니, 합격이라고 적혀 있다. 메일 내용을 다시 확인한다. 탈락이 아니라 합격이다.
안녕하세요. 39번째 기업입니다. 금번 채용전형에서 하얀 얼굴 지원자께서는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합격. 합격이다. 얼마나 기다렸던 합격 메일인가. 망상을 즐기는 그는, 이 순간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했다. 합격 메일을 받으면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탈락 메일을 받았을 때보다 더 차분하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 아예 감흥이 없다. 현실감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메일을 계속해서 읽는다.
하얀 얼굴 지원자님은 사업지원 분야로 입사하시게 될 예정입니다.
귀하는 당사 신입사원 연봉 기준을 적용할 예정이며... ... 당사는 귀하의 출근 예정일을 내년 초(2주 뒤)로 예정하였습니다. 확인 후 출근 가능한지 회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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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출근 전, 당사에서 지정하는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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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입사 예정일 준비서류를 요청드립니다.
[준비서류]
1) 주민등록등본
2) 최종학교 졸업증명서 1부
3) 통장사본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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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메일을 잘못 보낸 것은 아닌가. 그는 메일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지 수차례 확인한다. 불일치는 없다. 틀림없는 합격이다. 그는 부모님을 부른다. 최대한 별일 아닌 듯, 평상시처럼 행동하려 애쓴다.
그 : 잠깐 와보세요
부모님 : 왜 뭔데
그 : 이거 한번 봐보세요
부모님 : 뭔데 그래
부모님은 잠시 동안 말이 없다. 어머니는 그에게 축하한다고 말하고, 아버지는 말없이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는다.
부모님에게 알리고 나서도, 그는 이메일을 띄워놓고 한참 동안 읽는다. 읽을수록, 현실감이 없어 붕 떠있던 정신이 가라앉는다. 합격했다는 실감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자, 그의 감각도 현실로 돌아온다. 상상했던 것처럼 감각이나 감정이 벅차오르지는 않는다. 조금씩 잔잔하게 밀려오는, 무언가 아래에 뿌듯이 깔리는 기분이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것에는, 기쁨과 설렘도 있지만 불편함과 어색함도 섞여 있다. 그토록 분노하고 자책하고 한탄했던 취업준비생 기간이지만, 은근히 정이 들었나 보다. 그는 문득, 그에게 최종 합격 메일을 보내온 이 회사라는 곳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진다. 차라리 탈락했으면, 이런 감정이 느껴지지도 않을 텐데. 그동안 익숙해졌던 취업준비생 생활과는 영영 안녕이라는 생각에 서운함까지 느껴진다.
최종 합격 메일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있다. 그는 익숙한 것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의, 아주 어렸을 적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느낌을 기억한다. 학년이 올라 반이 바뀌었을 때, 또는 새로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느껴졌던 바로 그 느낌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낌이다. 어렸을 적에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이 느낌이 너무나도 싫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즈음이면, 그러한 느낌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렸다. 성인이 되어서는 이 느낌을 만나는 빈도가 극히 줄어들어, 오히려 그립기까지 했다. 간질거리면서도 약간 몸서리치고 싶었던 그 느낌은,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리는 전조인지도 모르겠다.
취업이라는 목표를 위해 나름 열심히 달려왔던 취업준비생 기간, 막상 최종 합격하고 뒤돌아보니 기억이 미화된다. 그렇다고 최종 합격을 버리고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돌아갈 것인가. 39번째 기업 매출액과 기업 리뷰 등을 다시 검색해본다. 나름 괜찮다. 그가 마지노선으로 잡았던 기준을 거뜬히 상회한다.
나이의 앞 숫자가 바뀔 내년이 캄캄하던 때에, 뜻밖의 기업에서 최종 합격 메일이 날아왔다. 내부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이 정도 기업이라면 그가 그간 노력했던 취업준비 기간이 아주 헛되지는 않었던 듯싶다.
그는 메일에 답신을 보낸다.
안녕하세요 담당자님, 하얀 얼굴 지원자입니다.
안내해주신 내용 따라, 2주 뒤 입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