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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Feb 25. 2023

2023. 02. 20. (2)

순수했던 이종족의 도시

시야가 뿌옇다.



 마법사는 찰랑이는 긴 금발 머리에, 얼굴은 미남형이고 키가 크다.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며, 안경 너머 눈동자에는 학구적인 기질이 서려 있다. 꽤나 실력이 출중한 듯하다.


 마법사는, 원시적인 초록색 부족에게 마법을 알려주고 도시를 건설했다. 초록색 부족은 몸집이 작고 머리카락이 없으며 코가 길다. 이를테면 '고블린'과 비슷하다. 작고 귀엽다.


 어느정도 도시의 틀이 잡힐 무렵, 근방의 붉은 부족이 합류한다. 붉은 부족은 귀가 뾰족하고, 초록 부족보다는 키가 크다. '엘프'와 비슷하다 하고 싶지만 귀만 엘프처럼 생겼을 뿐, 생김새는 고블린에 가깝다.



 순수한 초록 부족은, 마법을 알려준 마법사에게 오롯이 충성한다. 마법사가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주종 관계에 가깝다. 붉은 부족도 마법사를 존중하긴 했으나 초록 부족만큼은 아니다. 붉은 부족은 은근히 마법사와 데면데면한 사이다.  



 마법사가 평소처럼 도시 한복판을 거닐던 어느 날, 광장 한쪽에 붉은 부족이 모여 있다. 마법사가 다가가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붉은 부족의 눈빛에서,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적개심이 풍긴다. 마법사가 다가갈수록 적개심은 한층 강해졌으며, 붉은 부족은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이상함을 감지한 마법사가 걸음을 멈추고 말한다.


  - 왜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붉은 부족을 도시에 받아들인 마법사는 나름 억울한 눈치다. 마법사의 항변에도 붉은 부족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그중 가장 앞에 있는 이가, 시야를 돌려 저쪽을 바라본다. 뭔가를 가리키는 제스처다. 마법사는 시야가 향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붉은 부족이 가리킨 방향은, 안개가 유난히 짙다. 아치형 다리 아래를 지나니,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 도시 확장을 위해 새롭게 개발하던 구역인 듯한데, 저 멀리 거대한 형체가 있다. 마법사가 100m 정도 더 이동하고 난 뒤에야, 주변이 파악된다.


 벽돌로 지어지던 건물 잔해 틈으로, 초록색의 거대하고도 기괴한 형체들이 무분별하게 튀어나와 있다. 날카롭고 개수가 많은 이빨, 비정상적으로 찢어지는 입과 턱, 기다란 손톱. 말 그대로 괴수다. 온전한 형태의 괴수는 없다. 괴수는 만들어지다가 만 것처럼, 상반신만 노출되어 있다. 상반신밖에 없음에도 높이는 10층 건물보다 높다.


 그나마 가장 온전하다고 볼 수 있을 만한 괴수는 두 체, 얼굴과 상반신 일부가 형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여기저기에 팔, 손톱, 신체를 구성하다가 중단되어 버린 알 수 없는 초록색 조직들이 산재해 있다. 기생충이 땅과 건물이라는 피부를 뚫고 나온 듯 상당히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징그럽다.



 거대한 초록색 괴수들은 움직임이 없다. 죽어 있다. 여기저기 피로 예상되는 액체들이 말라붙어있고, 거대한 손톱으로 할퀸 자국도 많다. 다시 보니 초록색 괴수들은 하나같이 손톱으로 무언가를 크게 할퀴려는 자세로 죽어있다. 전투의 흔적이다. 붉은 부족이 괴수를 저지한 것인가.


 마법사는, 가장 크고 온전한 괴수의 시체 앞으로 다가가서는, 무너져 내린 돌담에 앉아 괴수를 관찰한다. 가까이서 보니, 비로소 확실해진다. 하나인 줄 알았던 괴수의 몸은, 자세히 보니 수많은 조그마한 몸체들이 엉겨 붙어서 형성된 것이다. 이 거대한 괴수 하나를 구성하기 위해 수백수천의 조그만 몸뚱아리들이 늘러붙어 있다. 그리고 그 몸체 하나하나는, 놀랍게도 초록 부족이다.




 끔찍하고 기괴한 광경 속에서도, 마법사는 여전히 학구적이다. 수백수천의 몸뚱아리로 이루어진 커다란 얼굴 형체를 바라보며, 마법사는 복기라도 하듯 중얼거린다.


  - 그래,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다 싶었어. 원래 마법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인데, 초록 부족은 이상하게 그런 게 없었거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경우라 어떻게 될지 했었는데... 처음 마법을 알려줬을 때는 다들 순수하게 기뻐했었단 말이지... 그 순수함이 어디로 갈까 궁금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단 말이지... 그래서 오늘 초록 녀석들이 안 보였구만.


 혼자 중얼거리던 마법사는, 퍼즐이 맞춰졌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다. 수천의 몸뚱이가 불규칙적으로 융합되어 하나의 커다란 얼굴이 되어버린 기괴한 형상의 시체 앞에서, 자신의 관심사 외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다.


 순간, 마법사가 초록 부족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긴 금발머리에 안경을 낀, 고고하고 멋져보이던 마법사의 인상이 나빠진다.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

  1)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2) 스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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