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약해지는 것들을 대하여
흐르는 시간에 무기력해지는 것은 인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방바닥에 물이 가득하다. 주방 안쪽 개수대와 디스펜서가 마주 보고 있는 바닥부터 시작된 것 같다. 일요일 휴무를 보낸 월요일에 발견했으니 아마도 토요일 저녁 이후부터 발생했을 것이다. 사건의 시작을 찾아 탐정놀이를 시작했다.
온수기 전원스위치 부근에서 똑똑 약 1초마다 한 방울씩 떨어진다. 전원이 꺼져있다. 전원을 올렸다. '철컥!' 다시 내려간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나온 것은 느긋하게 커피 한잔하며 월요일을 시작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수해로 이제는 반드시 해야 할 미션이 생겼다. 그것도 오픈시간 전에 끝내야 한다. 오픈하자마자 손님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정시 오픈은 필수다.
온수기 밑 수납장 내용물이 모두 꺼내졌다. 물을 닦아내고 난 주방 주방바닥엔 이제 끄집어 내진 각종 티백제품, 여분의 분말 밀가루 설탕류 등등으로 가득 차있다. 발 디딜 틈도 없다. 쓸데없이 탁월한 내 수납능력을 탓한다. 꺼내는 것도 다시 넣는 것도 결국 다 내일이다. 후회가 된다. 덜 넣을걸..
비닐포장에 쌓인 것들은 살리고 종이포장으로 젖은 것들은 다 폐기해야겠다.
그나저나 오늘 당장 따뜻한 음료가 문제다. 주문이 줄기는 했어도 한 여름에도 취향이 변하지 않는 고객들이 있다. 나만해도 떠 죽어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즐긴다.
"온수기에 문제 생기면 뜨거운 물은 머신에 있는 것으로 쓰세요.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오 년 전 설치 기사님 조언을 기억해 낸다. 그렇다. 에스프레소 머신에도 뜨거운 물을 뽑을 수 있는 관이 있다. 그런데 이게 쁘쉬식!!! 몹시 화를 내며 튀듯 뿜는다. 또 요란한 것에 비하면 나오는 양은 영 시원찮다. 화상 입을까 지레 겁을 먹어 되도록 팔만 길게 뻗어 요상한 포즈를 취하게 된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수리비는 대충 17,8만 원대라고 했다. 부품에 따라 더 추가될 수 있다고 했다.
검색해 보니 비슷한 기종의 새 제품을 40만 원대로 구입할 수 있었다. 설치도 수월하고 리뷰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수리를 하다 하다 새것으로 구입했는데 수리비로 지출된 비용이 아까워 후회된다는 글을 보고는 구매버튼을 눌러버렸다.
"어차피 새로 구입했으니까 뭐가 문제인지 뜯어나 볼까 봐."
뜯어나 볼까봐의 행동주체는 물론 내가 아니다. 남편이다. 어차피 버릴 거잖아. 그렇지?
쓸데없는 짓은 아니라는 몇 마디를 덧 붙인다. 답이 없다. 그러자는 거다.
저녁을 마친 남편은 카페로 가고, 나는 뒷 설거지를 대강 해 치우고 카페로 달려갔다. 막 온수기 뒤판 나사를 풀어 안쪽 상황을 살피는 중이다.
전원 올려봐.
전기가 들어가자 쉬익... 물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다시 철컥 누전차단기가 떨어진다. 그리고는 작은 관 틈에서 몽글몽글 물방울이 맺혀 떨어진다.
여기다!
남편은 마른행주로 닦아냈다. 호호 불어 주변 물기를 날렸다. 구멍 쪽에 1차 실리콘이 발랐다. 덧 바르기를 여러 번. 덕지덕지 울퉁불퉁 뚱뗑이가 된 구멍 부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전원을 올려봐.
쒸익 물 주입이 된다. 더 이상 새지는 않는다.
아마 다시 샐 거야. 그전에 새것으로 교체해야지.
남편은 검색으로 비슷한 지름의 호수를 발견했다. 800원이다. 그런데 배송비가 3000원이다. 주문했던 새 온수기를 취소하고 환불을 받았다. 그리고 남편은 배송비는 3000원이지만 800원인 작고 가는 호수를 주문했다.
남편말대로 임시방편 땜질의 유통기한은 딱 이틀이었다. 다시 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인터넷에서 구입한 800원짜리 호수는 도착해 있었다.
안에 있는 물 다 빼놔!
남편의 주문대로 커다란 양푼을 가져다 디스펜서 안 모든 물을 밖으로 빼 둔다.
남편의 장비발이 빛을 발할 때다. 단독주택으로 이사해서 수리할 때마다 늘어난 아이템발이 장난 아니다. 없는 게 없다.
능숙하게 새 관을 끼우고 으쓱해진 남편을 향해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러나, 이 감동은 딱 일주일치였다.
이제는 감압밸브연결되는 틈에서 방울방울 떨어진다. 5CM 정도 되는 장치 부근 여기저기 다 몽글댄다. 뭐라고 뭐라고 옹알대는 것 같다. 물방울 성질머리가 만만치 않다.
남편의 유능한 검색능력은 또다시 빛을 발한다. 같은 제품이 있다. 5000원. 배송비 3000원이다.
남편의 집도하에 새로운 장기를 장착하고 전원을 올리자 쭈~우~욱~ 입수되는 소리가 세차다. 며칠에 거쳐 수리된 디스펜서는 석 달이 훨씬 지나도록 이상 없이 작동되고 있다.
폭우가 세차게 쏟아지면 뚝뚝 에어컨을 타고 떨어지던 물방울은 큰돈이 들어갈 수도 있었다. 여차하면 큰 공사가 될 수 있다는 전문가말에 지레 겁을 먹었다.
우연히 안부를 묻다 처음 알게 된 이웃어른의 전직이 누수전문가. 게다가 흔쾌히 봐 주시겠다고까지 하는 것이다.
다 인건비야 인건비.
반나절도 안 돼 끝내버리고 눈에 가시였다며 담 밑 바랜 벽면까지 페인트칠을 해 주신다. 저렴한 비용청구에 황송해서 웃돈을 드려도 우리가 받았던 견적의 1/4 금액이다.
입구로 올라오는 나무계단이 삐그덕거린다. 남편이 휘두르는 쇠망치 몇 번 세게 얻어맞고 조용해졌다.
시간 앞에서 수명 있는 것들은 어차피 지는 게임. 그러나 살살 달래주고 토닥여주면 거꾸로 가거나 멈춘다. 느슨하고 편안해진다. 요게요게 은근 중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