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일기 46
설날을 앞두고 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정육점과 떡집, 과일가게, 전(煎) 집 앞에는 특히 줄이 길게 늘어섰다. 양손에 검정봉지 가득 들고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아내 뒤를 쫓아가는 민수 씨의 뒷모습이 힘들어 보인다. 아내는 그런 줄도 모르고 신나서 앞장서서 걷는다. 그러다 떡집 앞에 멈췄다. 떡국떡이 한가득 쌓여 있다. 두 봉지를 산다. 점점 무거워진다. 트렁크에 있는 손수레를 가져오지 않은 게 슬슬 후회가 된다. 게다가 비닐봉지가 장갑도 끼지 않은 맨 손가락을 서서히 조여 온다. 그럴 때마다 추슬러 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다시 아프다.
아내의 장보기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지 않으면서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아내를 민수 씨는 거듭 재촉한다. 백화점이라면 혼자 돌아다니라고 하고 벤치에 앉아 아픈 다리 두드리고, 핸드폰으로 브런치 글이라도 읽을 수 있으련만. 여기는 재래시장. 쉴 곳이 없다.
이번에는 전집 앞. 구수한 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지글지글거리는 소리가 침샘을 자극한다. 부쳐내는 동시에 전은 팔려나간다. 주인장은 계산하느라 정신없다. 천장에서부터 고무줄로 눈높이에 맞춰 묶인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에는 현금이 수북이 쌓여 있다. 만 원 권 하나가 탈출하려고 삐죽 튀어나온 게 보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주인장에게 한 대 쥐어 박히곤 바구니 속으로 추락한다. 힘들어하는 민수 씨를 달래듯 아내는 동태 전 하나 꺼내 입에 물려준다. 얼른 삼키고 민수 씨는 하나 더를 외친다. 동그랑땡을 집어 민수 씨 입에 넣어주는 척하다 쏙 뺀다. 빈 입을 앙 다문 민수 씨는 아내를 째려본다.
과일가게다. 설날을 맞아 과일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값을 보고 눈이 커진다. 때깔 좋고 큼지막한 제수용 사과는 한 알에 만 원이다. 민수 씨는 나무상자 벼겨 속에 파묻힌 사과를 꺼내먹던 기억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그 시절 사과는 값이 비싸지 않아 흔히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는데, 이젠 5알에 만 원, 한 알에 2천 원이나 한다. 박스째 사서 먹기란 부담이 된다. 결국 제수용 사과 대신 저렴한 것으로 고른다.
서서히 동태 전의 약효가 떨어진다. 민수 씨 자꾸 힘들다고 투정한다. 아내는 차례상에 올릴 산적용 소고기와 떡국에 들어갈 소고기만 사면 된다며 정육점으로 향한다. 정육점도 인산인해. 고기를 다듬고 있는 사람만 해도 세 명, 주문받는 사람도 두 명, 포장하는 사람 1명, 도합 6명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데도 주문을 따라잡지 못한다. 평소 고기맛이 좋다고 소문만 집이어서 그런가 더 바쁘다. 그래도 정육점 사장님 설 대목에 만면 웃음이다. 우릴 알아보고 활짝 웃는다.
오랜 기다림, 드디어 우리 앞에 한 쌍의 손님만 남았다. 그런데 그분들 머뭇머뭇거린다. 정육점 사장님 how much?라고 말한다. 외국인이었구나. 1kg, pork. 짧게 답한다. 어, 음. 얼마지? 사장님 더듬거린다. 16,000원을 영어로 말하려고 애쓰는 사장님이 thousand won, 아니 아니, 그건 1,000원이구. 그때 사장님 민수 씨를 쳐다본다. 두 눈이 help me다. 민수 씨 급 당황한다. 아니, 그게 만 원이, 그러니까, 맞다. ten thousand won이다. 그럼 16,000원은 뭐였지? 머리가 하얗다. 만 원에다 육천 원이지. 그럼 six thousand won이지. 빙고! 사장님! ten thousand won and six thousand won! 크게 말한다. 옆에 있던 아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sixth sense급 반전 답변한 민수 씨를 바라본다.
* 이 글은 픽션입니다. 브런치 작가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