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일기 55
글이 써지지 않는다. 괜히 핸드폰 만지작만지작, 부엌 들락날락, 냉장고 열었다 닫았다, TV 켰다 껐다, 당최 정신없다. 1시간째 앉아 있어도 한 줄도 쓰지 못한다. 무얼 쓰지, 머리를 쥐어짠다. 불쌍한 머리는 하나라도 떠올리려고 애쓴다. 하지만 멍하다. 단 게 급 땡긴다. 안 되겠다. 주섬주섬 노트북을 챙겨 나간다.
나오니 좋았다. 햇살도 좋다. 진작 나올 걸 그랬어, 중얼거린다. 동네 단골 카페로 간다. 카페라테가 맛있는 집이다. 아이스라테 마실 생각에 걸음이 빨라진다. 아뿔싸! 카페 닫았다. 짧은 방학이란다. 방학? 귀엽다. 하지만 내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낭패다. 어쩌지. 다른 카페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걷고 본다. 뭐든 나오겠지 싶어서다. 하나 보인다. 반갑다. 헉! 꽉 찼다. 평일인데 이런다고. 실내가 넓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터벅터벅 발길을 옮긴다. 큰 도로변으로 나온다. 분명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한두 개는 있을 터. 있다! 노란색이 눈에 확 띤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다. 평일 우습게 볼 일 아니었다. 손님들을 본다. 나이 드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 여기저기 얘기들로 활발하다. 가만, 이런 분위기에서 글을 제대로 쓸까 싶었다. 카페라는 곳이 원래 얘기하며 떠드는 곳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이곳은 생각보다 시끄럽다고 해야 할까. 불을 끄거라. 너는 글을 쓰거라, 에미는 떡을 썰 테니, 한석봉 엄니도 아니구. 잠깐 고민을 한다. 다른 곳으로 가, 말아? 고민하다가 무거운 가방 들고 걷기 귀찮다. 힘들다. 다행히 구석에 한 자리가 있다.
호기롭게 노트북을 켠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깜빡거리는 커서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휴! 한숨만 나온다. 커피를 쪽쪽 빨아먹는다. 실내는 대화로 활기차다. 아! 나도 저들처럼 쉬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고 싶다. 글이 써지지 않으니 자연 그들의 얘기가 뚜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옆 테이블은 보험설계사다. 앞에 앉은 사람은 보험 가입 예정자다. 둘은 아는 사인인 듯하다. 얘기가 자연스럽다. 그 뒤쪽은 70대 어르신 세 명. 웃는 소리가 거침없다. 여행 얘기다. 일본 온천여행 얘기를 하고 있다. 당연한 수순이듯, 며느리가 보내줬다는 자랑으로 이어진다. 그러자 다른 어르신 베트남 여행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겨울철엔 동남아가 따뜻하고 좋다고 또 가고 싶다고. 태국도 좋다고 하던데, 라며 입맛을 다신다.
결혼 얘기, 딴 테이블이다. 이번에 딸내미 결혼시키는데 속상하다고 한다. 사돈댁이 서운하다고, 사위가 너무 눈치 본다고 걱정하는 소리다. 비혼 선언한 첫째 녀석이 생각난다. 이런 얘기 듣다 보면 결혼 안 한다는 첫째의 선택이 차라리 나은 게 아닐까,라고 생각을 한다.
얘기 듣느라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슬슬 눈치 보인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노트북까지 쓰고 있다니. 괜히 좌불안석이 된다. 한 잔 더 시켜야 하나, 나가야 하나. 노트북은 여전히 하얗다. 손님들이 점점 늘어난다. 자리가 귀해진다.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 더 주문하기로 한다. 집에 가도 딱히 할 일 없다. 글도 써지지 않으리라. 여기서 좀 버텨보자. 주문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딸랑. 문이 열린다. 손님 4명이 들어온다. 자리 있어요? 라고 물어본다. 동시에 주인과 내 눈이 마주친다. 간절한 주인 눈빛. 나는 주문하러 나가려다 말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다. 자연스러웠지, 눈치 못 챘겠지, 생각한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