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맑음, 깊음, 빠름

내맘대로 일기 54

by EAST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오면 보통 오전 7시 30분 무렵이다. 평일이면 아내는 출근 준비 시간이다. 간단히 물만 부으면 되는 즉석 수프를 같이 먹는다. 간밤 잘 잤어? 피곤하지 않아? 서로 묻는다. 아내는 회사로, 나는 침대로 향한다.


한참 잤다고 생각하고 눈 뜨면 오전 11시 무렵이다. 그럴 때 몸을 일으키려고 하면, 머리는 가만 좀 있어봐,라고 명령을 내린다. 지금 낮인지, 저녁인지, 언제 퇴근했는지 잠시 헷갈린다. 한참 꼼지락 거리다 일어난다.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좀비처럼 흐느적거린다. 영혼 없는 움직임. 결국 소파에 앉아 유튜브 쇼츠를 멍하니 바라본다. 2시간을 그러고 있다. 이럴 거면 잠이라도 더 잘 걸, 늦었지만 후회한다. 더 후회하기 전에 집을 나선다.


오늘은 평소 다니던 산책길을 좀 천천히 걷기로 한다. 기분이 좀 가라앉아 있다. 하필 날씨도 그렇다. 곧 올 것 같던 봄이 먼 길 오느라 힘들어 쉬다 오려는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에서 전전 정류장에 있다고는 하는데 버스가 도무지 안 올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이 보채니 버스나 봄이나 둘 다 약 올리는 게 아닐까 싶다.


평상시라면 2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길이다. 터벅터벅 산길을 걷는다. 띠리링 브런치 알람 소리가 계속 들리다 멈춘다. 핸드폰을 본다. 공감디렉터 J 작가님 글이다. 멈춰서 읽는다. 느리게 걷자는 오늘의 내 마음과 닮은 글에 뭉클함이 밀려온다.


https://brunch.co.kr/@solly77/450

구불구불 산길을 걷다가 화성행궁 쪽으로 내려온다. 발걸음이 수원시립미술관 쪽으로 향한다. 이는 전적으로 Mansongyee 작가님이 썼던 글 영향이 크다.


https://brunch.co.kr/@3c0a991f433e4e9/99

과연 미술관을 나오는 내 머리가 맑아져 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미술관을 나와 행리단길로 접어든다. 새로운 카페와 소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임대현수막 걸린 건물이 대조적이다. 이곳 행리단길. 개화기 항구도시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매일매일 카페나 음식점, 셀프사진숍, 인형 뽑기 오락실 등등으로 바뀐다. 그래서 오랜만에 나오면 풍경이 달라져있다. 이리저리 구경하다 핸드폰을 보니 어느새 온새미로 작가님 글이 도착해 있었다.

https://brunch.co.kr/@52eae70c73a644d/86

변화무쌍한 관광지 한 복판에서 만나는 92세 소년의 마중. 수십 년 세월이 응축된 그들의 안도가 마음속에 길게 울린다.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서히 집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대로변으로 나선다. 큰길이라 차들이 많이 다닌다. 방금까지 조용한 골목길을 다녀서인지 차들이 내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린다. 쌩쌩 빨리 지나가는 모습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는 느낌이 든다. 천천히 걷자던 마음과는 달리 내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빨라진다. 핸드폰이 울린다. 페르세우스 님 글이다.

https://brunch.co.kr/@wonjue/1899

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믿기지 않은 현실에 안타까웠다. 너무 빠른 선행학습. 걱정된다는 페르세우스 님의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나는 오늘 작가님들 덕분에 4가지 마음을 느끼며 하루를 정리한다. 처음 길을 나섰을 때 가라앉았던 마음이 글과 같이 바뀌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던 귀한 마음 산책이었다.


※굵은 글씨는 작품 속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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