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되지 않는 그림 앞에서

생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by Mansongyee



어떤 그림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미술관을 나오면

머리는 이상하게 맑아진다.


나는 주로 걸으며 여행한다.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피로가 올라온다.

그럴 때면 어딘가에 들어가 잠시 에너지를 보충하고 싶어진다.


낯선 언어, 낯선 길, 낯선 생각들.

그럴 때 나는 커피숍보다 미술관에 들어가는 편이다. 이상하게도 그곳이 피로를 더 빨리 풀어 준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일본 여행에서도 도쿄의 크고 작은 미술관을 더 자주 찾게 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든,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작품이 아니든 일단 많이 보려고 했다.


도쿄의 한 미술관.

유리와 곡선으로 이루어진 큰 공간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 작품들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설명문을 읽어도 어떤 작품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려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림을 이해한 것도 아닌데 밖으로 나오면 머리가 맑아진다.


왜 그럴까.


그날 미술관에서 나는 이해되는 그림보다 이해되지 않는 설치 작품과

골똘히 들여다봐야 하는 작품 앞에 더 오래 머물렀다.




Dinos Chapman & Jake Chapman,〈Disasters of War〉, 1993

Francisco Goya의 판화 연작〈The Disasters of War〉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 작품.

멀리 서는 장난감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전쟁의 잔혹한 장면들이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다.

수많은 작은 인물들이 이루는 장면들 속에서 전쟁 속 인간 군상이 드러난다.

도쿄 국립신미술관 전시 중



나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몰랐다. 그저 어디를 가든 미술관을 찾는 여행을 하다 보니 미술관은 머리를 쉬게 하는 곳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한 뇌과학자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예술 작품은 작가가 만들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뇌가 다시 해석을 얹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예술 감상은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뇌는 형태를 추측하고 의미를 상상하며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불러와 새로운 연결을 만든다.





Wada Reijiro, 〈MITTAG〉

1977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현재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Wada Reijiro의 설치 작품.

두 장의 유리 사이에 담긴 브랜디가 렌즈처럼 작동하며 창밖의 도쿄 풍경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MITTAG’는 독일어로 정오를 뜻하며, 가장 밝은 순간의 빛 속에서 시간과 삶의 흐름을 사유하게 한다.

Mori Art Museum 전시 중



특히 현대미술처럼 명확한 정답이 없는 작품일수록 뇌는 더 많은 가능성을 상상하며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해하려고 여러 방향으로 생각을 펼치기 때문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우리 뇌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회로와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회로가 있다.

평소에는 이 두 회로가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 앞에서는 잠시 서로를 향해 열린다.


작품을 바라보던 시선이 어느 순간 자기 삶으로 조용히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아. 그래서였구나.



A.A. Murakami, 〈The Moon Underwater〉

A.A. Murakami는 Murakami Azusa와 Alexander Groves가 함께 작업하는 아티스트 듀오로, 런던과 도쿄를 오가며 활동한다.

이들은 안개와 거품, 빛 같은 자연의 물질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이 작품에서는 나무처럼 보이는 구조물 끝에서 거품이 떨어져 물 위에 닿고 잠시 떠다니다가 사라진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달의 궤적이나 봄날 흩날리는 벚꽃처럼,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가장 덧없다는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Mori Art Museum 전시 중



나는 그림을 이해하려고 미술관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내 뇌가 세상과 나 자신을 다시 연결하는 시간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 그림 앞에서도 머리가 맑아졌던 것이다.

미술관에서 창작하는 사람은 작가만이 아니다.


그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뇌도 조용히 창작을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그림은 이해되지 않아도 우리 안에서 계속 만들어진다.



예술 감상은

작품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생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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