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있음에
세상에는 어떤 수식어로도
다 담지 못할 풍경이 있다.
얼마 전 KBS 다큐멘터리
"그대 있음에"를 보다가 나는 한 장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대청호 오지 마을
평생을 서로의 그림자로 살아온 노부부.
그중에서도 90세가 넘은
치매 기운에 허리까지 ‘ㄱ’ 자로 꺾여버린 할아버지가 비 오는 날 밖을 나서는 장면이었다.
본인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노인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위태롭게 발을 뗐다.
할아버지의 손에는 낡은 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걸음의 끝에는 밭일을 마치고
정자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할머니가 있었다.
굽은 허리는 땅을 향해 있지만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정자에 있을
'내 사람'에게 가 있었다.
그 절절한 마중
나를 울린 건
단순히 할아버지의 노구가 아니라
수십 년을 함께 살고도
여전히 비를 맞을 아내가 걱정되어
빗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마음의 '꼿꼿함'이었다.
정자에 도착해 나란히 앉은 두 사람
그곳에 긴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저 비안개 자욱한 호수를 배경 삼아
서로의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흐르는 눈빛을
말없이 주고받을 뿐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 속에는
수십 년 세월이 응축된 안도가 소리 없이 오갔다.
이것이 인생의 정답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살면서 더 큰 집
더 많은 재산을 얻으려 애쓰지만
생의 황혼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건 결국
'비 오는 날 나를 마중 나올
굽은 허리의 한 사람'이다.
장화에 물이 들어갔을까 봐
시장으로 달려가 새 신을 사고.
정육점 주인에게 "우리 영감이 이가 없으니
제일 연한 놈으로다가
아주 잘게 좀 썰어달라" 부탁하는
그 사소하고 깊은 염려들.
할아버지의 굽은 허리는 사랑의 무게였고
그가 든 우산은
생의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은 존엄이었다.
오늘 밤, 내 마음속엔 대청호의 비안개보다
더 짙은 여운이 남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저토록
절실한 마중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굽은 허리로라도 기어이 우산을 펴서
당신의 젖은 어깨를 감싸 안는 일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