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망월, 아내의 오곡밥
"여보, 오늘 무슨 날인 줄 알아?"
식탁에 앉자마자 아내가 넌지시 묻는다.
눈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곡밥과
정갈하게 무쳐낸 나물들이 가득하다.
평소에도 장모님이 보내주신 귀한 식재료로
아내가 나물을 자주 해주다 보니
내게 나물 반찬은 고맙지만 익숙한 일상이었다.
사실 대보름의 기억이 희미한 내게
이 풍성한 식탁은 매번 낯선 퀴즈 같다.
"글쎄, 맛있는 나물 먹는 날인가?"
쑥스럽게 대답하면 아내는 이내 정월 대보름이라며 조목조목 설명을 보탠다.
결혼하고 벌써 몇 년째인가
아내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 손 많이 가는 음식을 내어준다.
내가 자라며 놓쳤던 계절의 매듭을
아내는 매년 이렇게 정성껏 묶어주고 있었다.
사실 나의 어린 시절 대보름은
'맛'보다는 '불'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탓일까
우리 집 식탁엔 오곡밥도 나물도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
동네 아이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빈 깡통을 찾았다.
못으로 구멍을 뚫고 굵은 철사를 연결해
손잡이를 만든 뒤
안에 솔방울과 나뭇가지를 가득 채웠다.
논둑으로 달려 나가 힘껏 깡통을 돌리면
어둠 속에서 붉은 원들이 수없이 그려졌다.
뜻도 모르고 "망월이야!" 외치던 함성
매캐하지만 정겨웠던 연기 냄새
내게 대보름은 배를 채우는 날이 아니라
밤하늘을 불꽃으로 수놓는 축제였다.
그렇게 자라면서
한 번도 제대로 맛보지 못했던
대보름의 오곡밥을
나는 역설적이게도 어른이 되어
아내를 만난 뒤에야
매년 '보약'처럼 선물 받고 있다.
아내가 묻는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라는 질문은
어쩌면 "내가 당신의 빈 기억을 채워주고 있다는 걸 알아?"라는 사랑의 확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세월의 빈틈을
아내는 정성스러운 밥상으로
묵묵히 메워주고 있었다.
입안 가득 씹히는 오곡의 고소함과
나물의 쌉싸름한 향을 느끼며 생각한다.
밤하늘에 서툰 불꽃 원을 그리던 소년에서
이제는 아내의 정성을 귀하게 대접받는
중년의 가장이 되었노라고.
올해도 아내 덕분에
내 마음의 보름달은 환하게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