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을 달래는 건 국물이 아니라 추억이었다

찹쌀순대는 모르는, 속 편한 위로의 맛

by 온새미로

​병천순대는 흔한 찹쌀순대와는 결이 다르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찹쌀 대신 부드러운 채소와 고기가 꽉 차 있어, 먹고 나면 속이 참 편안하다.


마치 내 인생도 이 순대처럼 부대낌 없이 술술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뚝배기를 마주한다.


나에게 병천순대국밥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음식을 넘어, 삶의 고비마다 마주했던 기억의 이정표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길은 유난히 길었다.

차도 띄엄띄엄 다니던 그 한적한 길을 한참이나 걸어 장터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국밥의 김을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떠올리다 보면, 그 시절 몇 안 되는

따뜻한 기억 중 하나인 그 시장 길이 유독 선명하게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 국밥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맛본 '진짜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국밥은 인생의 쓴맛을 같이 삼켜주는 동료가 되었다.


친구들과 모여 앉아 인생이 왜 이렇게 쓰냐며 소주 한 잔을 기울이던 술안주였고, 다음 날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던 해장국이었다.


인생이 해장국처럼 뜨거운 맛 좀 보여줄 때마다, 나는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 시련을 다 들이켜 버렸다.


​명절이면 큰집을 다녀오는 길에 온 가족이 약속이라도 한 듯 들렀던 그곳.


그때의 국밥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확인시켜 주던 정해진 의례였다.

그 길을 이제는 아내와 함께 걷는다.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여전히 병천순대국밥을 즐긴다.


연애 초반엔 예쁘게 먹으려 애썼지만,

이제는 "크으~" 소리를 누가 더 크게 내나 대결하며 뚝배기를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다.


​음식은 추억을 박제한다.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것은 육수만이 아니다.


그 안에는 가족의 온기, 친구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그리고 아내와 마주 보며 깍두기를 집어주는 오늘이 함께 녹아 있다.


속을 달래주는 것은 결국 뜨거운 국물이 아니라,

그 국물에 배어 있는 포근한 기억들이었다.


​오늘도 완뚝.

내 추억의 유통기한은 다행히도 무제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