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집을 뛰쳐나오다

도망의 끝에서 온기를 만났다

by 혜삐
여름방학, 집을 뛰쳐나오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나는 결국 집을 뛰쳐나왔다.
그때의 나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폭력과 욕설, 매일이 전쟁터 같은 집에서 하루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가방에 무엇을 챙겨야 할지조차 몰랐다.
옷 몇 벌, 휴대폰 충전기, 그리고 지갑.
그게 전부였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혹시 아빠가 바로 뒤에서 따라 나오는 건 아닐까, 그 공포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 밖은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햇빛은 눈부셨고, 매미 소리는 귀가 멍해질 정도로 울어댔다.
그 소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자니, 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낯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제 나는 어디서 자야 하지? 밥은 어떻게 먹지?”
해방감과 동시에 밀려온 막막함.
가출은 도망이었지만, 동시에 끝없는 불안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에게 연락했다.
망설임 끝에 친구의 엄마께 내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처음엔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울면서 모든 걸 이야기했다.
친구의 엄마는 조용히 내 얘기를 다 들어주셨다.
그리고 따뜻하게 말했다.
“괜찮아. 힘들었지? 당분간 여기서 지내.”


그 집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전한 공간’이었다.
아침마다 들려오는 식사 준비 소리,
누군가 나를 걱정해주는 그 따뜻함이 낯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세상에 아직 좋은 어른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며칠이 지나고, 시간이 조금 흐른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나를 찾아왔다.
문 앞에 서 있던 엄마의 얼굴은 지쳐 있었고, 울었던 흔적이 보였다.
엄마는 조심스레 말했다.
“이제 집으로 가자.
아빠가… 이제는 안 그러겠다고 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또 완전히 밀어낼 수도 없었다.
엄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바라보다가, 결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은 복잡했다.
두려움과 체념, 그리고 어쩌면 아주 희미한 기대.
그 여름, 나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쳤고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가출은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집, 누군가의 온기가 나를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돌아감’조차 생존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여름의 기억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집을 떠나던 순간의 두려움,
다시 돌아가던 길의 침묵,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보냈던 구조 신호.

이전 05화살기 너무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