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철이 형, 신병철, 병철아!”
오늘은 고등학교 동문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사정이 있어 이번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캠퍼스 시절 한 분기에 한번 정도 고교 동문 선후배들이 같이 얼굴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이제껏 이 모임에 참석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후배들이 1차 모임을 파한 후 오늘 모임에 얼굴은 보이지 않은 나를 다시 찾아 나선 것이었다. 목청을 높여 불러 보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엄연히 내가 선배임에도 대답을 들을 수 없자 후배들은 반말도 불사했다. 법대생 전용 도서관 인근에서 나를 열심히 불러댔다. 나는 어차피 오늘 모임은 거르기로 아주 단단히 작정을 했다. 그런 나로선 대답을 하거나 후배들 앞에서 이제라도 얼굴을 내밀 이유가 없었다. 오늘만큼은 내가 작정한 대로 끝까지 가기로 했다.
내가 대학 문을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신입생 환영회를 겸한 첫 동문회가 열렸다. 등용문에서 코앞에 자리한 2층 한정식집에서 신입생 환영회란 이름을 붙인 모임이 있었다. 등용문을 지나고 약국을 지나 왼쪽 조그마한 버드나무 군락에서 30발짝에 미치지 못하는 빌딩이었다. 직사각형의 번듯한 건물이 아니었다. 사각형의 한 변을 변형하다 보니 사다리꼴 모양의 한 귀퉁이가 우리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당시 동문회비는 ‘3000원 + 알파’가 대세였다. 하긴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300원이면 마실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 이는 결코 작은 금액은 아니었다. 특별한 이슈나 이벤트가 없는 동문회는 중국음식점에 모여 자장면이나 안주용 짬뽕 국물과 공깃밥으로 주문 메뉴를 채우는 것이 대세였다. 오늘은 신입생 환영회를 겸하다 보니 특별한 메뉴를 준비했다. 선배들이 특별회비를 갹출하여 마련했다.
신입생인 나는 당연히 회비의 면제 혜택을 받았다. 메뉴 이름도 난생처음 구경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로 ‘궁중 전골’이었다. 홍합, 오징어,문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해물이 여유 있게 동원되었다. 라면보다 굵은 면발의 국수사리도 구경할 수 있었다. 왕조시대의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음식을 방불케 했다. 내가 이제껏 맛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으로 마주한 적도 없었다.
“이리 와라, 병철이는 이 큰 국대접에다 따라 줄까?”
법대 3년 선배 중희 형은 환영의 뜻에 엄포성 카피를 섞었다. 캠퍼스 안의 우리 동문 식구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모처럼 법대 직속 후배가 등장했으니 매우 흡족해했다.
당시 대부분 도시의 고등학교는 한 클래스 60명 정원에 12반이 대세였다. 하지만 우리 모교는 정확히 이의 절반 규모에 불과했다. 따라서 우리 동문회 규모는 캠퍼스 내에서 상위에 랭크될 수가 없었다. 내가 신입생이 되기 전까지 술자리에서 나의 주력종목은 소주가 아닌 맥주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것이 아니었다.이제부터 소주와 친해져야 각종 모임에서 어색하지 않게 어울릴 수 있었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캠퍼스 안에서 우리 고교 선후배 동문들을 제법 찾을 수 있고 이렇게 모임도 가질 수 있어 든든했다.
아주 고급진 안주를 먹을 수 있었고 회비도 면제를 받았으니 오늘은 정말 수지맞은 날이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나는 생물학과 후배와 같은 방향이란 이유로 같이 노선버스에 올랐다. 평생 한 번 밖에 없는 신입생 환영회는 이리하여 성대하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한 해 늦게 대학문을 들어섰다. 이미 내 고교동기 한의대생만도 3명이나 되었다. 대학에서 학번 기준으로 선후배를 따지듯이 고교 동문들은 학교 졸업 연도가 그 기준이 됨은 너무나 당연했다. 방금 전에 나와 헤어진 생물학과 신입생은 나와 같은 학번이 되었지만 고교 1년 후배이기 때문에 나를 선배로 깍듯이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1년 후배가 가장 무섭고 어렵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오늘 한정식집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에 우리는 그 이름에 걸맞게 ‘얄타 미라’를 연상시키는 동굴 다방이 첫 번째 집결지였다. 실내 공간이 세로로 유난히 길게 배치되어 있었다.
“병철 후배는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신입생인 줄 내가 이미 알아보았어.”
이제 막 20살을 턱걸이하던 시절이었다. 설령 한 두 살이 많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캠퍼스 생활에 아직 적응이 덜 된 이른바 ‘촌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이는 누구에게도 숨길 수 없었다.
‘지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 캠퍼스다.’라는 말에 이 연령대가 인생에서 또한 가장 좋은 시절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