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여동생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동생네는 제법 규모가 큰 단지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입주한지도 시간이 좀 지났지만 흔치 않게 상가, 특히 식당이 아직 골고루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기보다는 야채를 선호하는 매제의 취향에 맞추고자 했다. 나 역시 식성이 비슷했다. 그래서 요즈음 점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쭉쭉 늘어나고 있는 ‘연안 식당’으로 들어섰다. 개업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이른바 `개업 빨` 때문인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기 번호에 올리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대단한 맛집도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대부분 고깃집이나 부대찌개 식당밖에 없었다. 좀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다. 우리 일행은 처음에 가려고 작정했던 곳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기다려 가까스로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가장 기본 메뉴 중의 하나인 꼬막 비빔밥에 막걸리 한 통을 반주로 알뜰하게 비우고 밖으로 얼른 나섰다. 길게 줄지어 기다리는 다른 방문 손님에게 조금이라도 일찍 자리를 내어주고 싶었다.
요즈음 추세와는 역주행하기라도 하듯 아직 애연가로 남아 있는 매제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처남! 교장 선생님 정년퇴임식에 참석해야지요?"
순간 나는 우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은사님 여러분을 머릿속으로 쭈욱 스크린해 보았다. 좀 의아했다. 나는 남도 지방이 고향인 매제와 출생지가 달랐다. 그렇다고 매제와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문이나 동기는 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정년퇴직 예정인 선생님 중 매제와 내가 같이 알고 있는 분이 퍼뜩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매제가 내게 퇴임식에 같이 가자고 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뒤통수를 가벼운 둔기로 얻어맞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색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의문이 풀렸다.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매형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서야 깨달았다. 나는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렸던 은사 선생님들은 교육공무원 정년인 만 62세에서 이미 한참이나 멀어진 뒤
였다. 바야흐로 우리 세대가 정년 퇴임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잠시 후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내가 가끔 정기 모임이나 각종 경조사에서 만나는 고교 동기들이 이미 교장, 교감 선생님이 된 지 제법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런 사실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정년퇴직 대상은 나보다 하나 위 세대가 아니었다. 나와 같은 세대가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움직이지 못할 사실이었다. 휴가를 내서라도 매형 퇴임식에 당연히 축하하러 참석할 작정이었다.
‘매형의 정년 퇴임식에 혹시 참석하지 않으면 아직도 나는 퇴직 세대가 아닌 하나 아래 세대로 인정받을 수 있으려나'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였다. 나는 오늘도 삶의 일상인 늪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일부 차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