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용 로울러식 간이 영어 단어장

디지털과 아날로그

by 그루터기


“저기 손들어 보세요 김종성 학생을 칭찬합니다. 지난번 전체 마당 조회 시간이었어요. 저 학생은 오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자주 힐끗힐끗 처다 보았지요. 알고 보니 그 조회 시간도 아껴 영어 단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조회 시간이었다.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교감 선생님이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우리 1년 선배를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본래 교감 선생님은 평소 학생을 칭찬하는데 인색한 편이었다. 혹시 다른 선생님이었다면 자신이 훈시를 하는 동안 딴전을 핀다고 꾸지람을 할듯했다. 그런데 의외의 광경이 벌어진 것이었다.


선배가 들고 있었던 도구는 다름 아닌 ‘간이식 영어 단어장’이었다. 이는 강당 옆 울타리 밖에 자리한 문구점에서도 취급을 했다. 읍내 서점을 찾으면 참고서나 교양도서 보단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고급 노트 2권 가격이면 충분히 장만이 가능했다. 학년마다 별개의 단어장으로 구분되었다. 교과 과정 전 단원에 등장하는 새로운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옮겨 놓았고 때론 숙어도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예문도 가끔 눈에 띄었다.


좌우 양쪽이 트인 투명한 비닐 재질의 원통 안에 국수 가닥을 뽑아내는 기계와 같은 원리로 작동했다. 가로면이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 한 쌍인 로울러가 장착된 듯했다. 영어 단어 해설이 적힌 종이가 감긴 휴대용 약식 단어장이었다.


둥글고 기다란 나무 꼬챙이에 차곡차곡 감기다 풀리다를 반복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내용을 양쪽 방향으로 돌려가며 보기를 원하는 곳으로 조절이 가능했다. 로울러에 감긴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기다란 종이가 감긴 뭉치를 한쪽으로 굴려 점차 두꺼워지면 맞물려 돌아가는 다른 한쪽의 종이 뭉치는 부피가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른바 제로섬 게임 시스템이었다. 저고리나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볼 수 있었다. 당시로선 대단히 앞서가던 아이템이었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4개의 손가락으로 몸체를 받쳐 들었다. 이어 엄지손가락 지문 부분으로 일정한 두께로 감긴 종이 뭉치를 밀었다 당겼다 굴리는 방식이었다. 원하는 부분을 디스플레이해가며 반복해서 작동을 시켰다. 소나무 동네 제방둑에 널린 쇠똥구리가 마치 자신의 먹이를 굴리듯 했다.


“경호야? vacation이 무슨 뜻이지?”

“그거야 무어 휴가나 방학이란 뜻 아니야?”

“이야! 1학년 영어 단어 중 어려운 것도 다 알고 있네?”

우리는 중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절친 백주는 1학년 과정을 복습한답시고 이 로울러식 간이 영어 단어장을 밀었다 당겼다를 반복하며 나를 테스트했다. 1학년 과정을 복습하다 보면 금세 2학년 말이 코앞에 곧 닥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어느 세월에 진도를 따라잡을지 요원했다. 그럼에도 영어 공부를 아예 접는 친구들보다 훨씬 나은 편에 속했다.


당시는 종이로 제작된 영어사전으로 단어를 찾아가며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전자 사전을 넘어 모바일 앱을 검색하여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 일단 새로운 단어를 품을 들여 영어사전을 찾아내 노트에 적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미 단어를 어는 정도 암기하는 효과를 거들 수는 있었다. 이 종이사전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간이식 단어장이었다. 물론 교과 과정을 넘어서는 낯선 단어는 하는 수 없이 종이 사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서 대비 부피를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휴대가 간편한 것이 최대 이점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일정한 범위 내에선 이 단어장이 다시 등장하면 제법 주위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을 가미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갑자기 제법 궁금해졌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단서를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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