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스펀지(1편)

by 그루터기

초등 5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이 부득이한 사유로 수업시간을 비웠다. 이런 경우엔 대개 다른 학년이나 같은 학년 다른 반 선생님이 대신 수업을 진행하거나 또는 자습으로 수업을 갈음했다. 오늘은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수업을 전혀 맡지 않는 교감선생님이 출두를 했다. 드문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친구들 모두는 적지 않게 놀라는 눈치였다.

개별 과목 교과 진도를 나가지는 않았다. 40분 풀타임으로 이른바 특강을 이어갔다. 다른 반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 반 친구들만이 운 좋게도 이 커다란 혜택을 누렸을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평소 얼굴 혈색이 좋았다. 좀 상기된 표정이 늘 이어졌다. 혈압이 높은 거로 보이기도 했다. 좀 허스키한 목소리를 자랑했다.

전교생이 모이는 운동장 조회 시간에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굵직한 현안을 말씀하시는 교장 선생님과 달랐다. 교감 선생님은 ‘복장을 단정히 할 것’. ‘지각을 하지 말 것’, ‘개구멍을 빠져 다니지 말 것’ 등 학교생활에서 지켜야 할 시시콜콜한 내용의 훈계를 하는 악역을 자처했다. 그러데 오늘은 이와 전혀 달랐다.

본인 소개는 물론 필요가 없었다. 교단에 올라 먼저 친구들을 한 바퀴 휘익 둘러보았다. 이윽고 칠판에 백묵으로 오늘 이야기할 테마를 비교적 커다란 글씨로 적었다. 초등 5학년 어린이에겐 상당히 어렵고 묵직한 주제였다. 어린이는 누구보다 "감수성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感受性이란 어려운 한자도 아래에 병기를 한 후 본격적인 특강에 돌입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궁금해하고 조금은 어리둥절하였다.

나는 초등생활을 비롯한 결코 짧지 않은 학창 시절을 거쳤다. 그 이후 인생 후반부의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느 시절 선생님, 저명한 교수님, 외부 강사 등 내로라는 사람들의 정규수업 내지 특강에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특강의 요지는 지금도 내 머릿속에 화석처럼 박혀 있다. 어린이 여러분은 흔히 ‘감수성이 강하다’고 모두를 꺼내었다. 쉽게 말해 여러분은 ‘스펀치입니다’라는 예기치 않은 비유까지 동원했다. 친구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약간 웅성거렸다.

선생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의를 이어갔다. 평소에 시시콜콜한 말씀 대신 어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테마에 어린이들은 모두 놀랐다. 전교생 운동장 조회 시간에 늘 하시던 말씀과 별다를 게 없겠지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대학 시절 교양 과목인 철학개론 강의에 버금갔다.

어린이는 사물을 보고 듣고 체험하거나 교육을 받으면 그 내용을 조금도 거르지 않고 100%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스펀지가 물이나 잉크 기타 액체를 온몸으로 빨아들이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부모 형제자매 선배 선생님들의 평소 언행 가르침 등을 취사선택할 능럭이 전혀 없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거나 또는 지표로 삼기까지 한다. 그게 정답이고 절대선이고 무조건 옳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향후 성장기 인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항상 큰 뼈대가 되며 많은 세월이 흘러도 앙금만이라도 남는다.

그러니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감수성이 강하고 취사선턕 등 사리의 분별력이 부족한 어린 시절의 체험 교육 가르침 등은 평생 없어지지 않고 머릿속에 빼곡히 남는다. 장차 살아가는데 일종의 좌표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의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 특강의 요지였다.

당시 교감 선생님 특강의 핵심 메시지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평생 머릿속 한쪽에 자리 잡았다. 선생님의 세세한 강의 내용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선생님이 전하고자 한 핵심 포인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후일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을 함부로 걷지 마라. 후일 누군가에게 하나의 좌표가 되리니" 이런 내용인 유명 스님의 시와도 맞닿아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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