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 준비와 달력

가곡리 300번지 시대

by 그루터기

"기태야 닭장과 새장 에는 닭과 새가 있지? 그럼 모기장 안에는?"

세살 터울 형은 오늘도 나를 한 번 놀려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앞의 두개 물건과 뒤의 것은 용어는 같았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게 할 일이 생겼다. 세상에 나온 지 꽤나 오랜 세월이 지난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국방색의 팽팽하지 않고 후줄근하면서 크기는 넉넉한 모기장이었다. 이것을 안방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도 이 모기장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공정을 외면해서는 아니 되었다. 길이가 누나들이나 형에게 훨씬 미치지 못했다. 사방 벽마다 박힌 못에 모기장 고리를 걸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낑낑거리며 미션을 마무리해야 했다. 방바닥에 베개를 받치거나 까치발로 신장의 열세를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쾌적한 수면을 위해서 이 정도의 수고는 감수해야 했다. 틈새를 노리는 모기나 파리의 잠입을 막기 위해선 중간중간 찢어진 곳이나‘튿어진’ 곳을 얇은 담요로 틀어막는 세심함도 필요했다.


풀무 모양인 플라스틱 재질의 소형 간이식 모기약 분무기에 액체 모기약을 채웠다. 왼손으로 원통형의 기다란 몸체를 잡고 오른손으로 대장간에서 풀무질 하듯 손잡이를 앞으로 밀었다 당기기를 반복했다. 액체 모기약은 공중에 작은 알갱이로 골고루 떠돌아다녔다. 저녁 식사 전에 안방 사랑방 모두 한꺼번에 모기약을 뿌리고서 얼마간 창호지 방문을 닫아두어야 했다.


지속적인 ‘밀당’을 하는 부분인 기다랗고 직경이 훌쭉한 세로의 원통인 것과 달랐다. 액체 모기약 저장통 역할을 하는 곳은 가로 방향으로 된 짧고 뚱뚱한 원통이었고 분무기 전체는 T자형이었다. 검푸른 바닷물 색상을 뗬다. 모기약을 뿌리고 30분 정도 후엔 방바닥에 널린 모기와 파리의 잔해를 기다란 수수비로 깨끗이 쓸고 걸레로 깔끔하게 닦아냈다. 환기를 위해 일정 시간 방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했다.


‘파리 목숨’이란 말과 달리 모기보다는 파리가 목숨이 모질었다. 모기와 파리약 각각 두 가지로 나누어 사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독성이 강해 약효가 먹히는 액체로 파리도 잡는 모기약이었다. 때론 파라치온 같은 유기수은제를 담은 모기약은 재래식 화장실에도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한 페이지에 보통 1, 2, 3개 월 분이 인쇄된 달력과 달리 12 개윌 1년분이 한꺼번에 인쇄된 달력이 대세였다. 이는 대개 지역 현직 국회의원이나 출마 예정자들의 홍보물로 활용되었다. 2절지 크기에 홍보하고자 하는 정치인의 인물사진이 빠지지 않았다.


눈높이에 맞추어서 방 벽에 자그마한 못을 박은 곳에 거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했다. 됫 면의 일부에 도배용 재료인 밀가루 풀, 아니면 밥알을 으깨어 떨어지지 않게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가며 붙였다. 그래서 부착제와 달력은 1년 내내 동고동락했다. 해가 바뀌면 새해의 달력을 작년 그것의 윗부분에 똑같이 덧붙이곤 했다. 그렇게 열약한 시절에도 메인스트리트에 자리한 금호 약방엔 뒷면이 훤히 비치는 습자지 재질의 일력은 약품 진열장 중간 기둥 위쪽에서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당시 정치인들의 정체성과 행태를 풍자하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말들이 회자되었다. 이름을 빗댄 ‘정직하다 정직래’ 당적을 자주 바꾸는 ‘왔다 갔다 이동진’ 자주 낙선을 하는 ‘미끄러졌다 민장식’, 아깝게 낙선을 하던 ‘서운하다 서정옥" 등이 그것이었다.


특정한 정당이 장기 집권 포석을 다질 즈음이었다. 무소속이나 중소정당 소속 대통령 후보 슬로건 중 단연 압권이 있었다. 당시 민생의 어려움을 적나라하고 적확하게 표현했다.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살 길 찾자"의 오재영 후보도 있었으나 당선권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운이 좋게도 한 면에 2 개윌 분을 인쇄한 달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용기간이 지난 페이지는 한 장씩 떼어내 새 학기 새 책의 포장지로 근사하게 활용했다. 이마저 여의치 않을 경우엔 마분지와 유사한 종이가 다음 차례였다. 시멘트 포장지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깨끗이 닦아서 꿩 대신 닭으로 갈음했다. 때론 아버지가 직접 챙겨 멋지게 포장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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