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과 월산대군(2)

유유자적하는 삶

by 그루터기

당시 나무꾼들이 자주 찾는 소골 산자락은 나무꾼들 개인 사유림이 아니었다. 국유림이거나 다른 개인의 소유 또는 종중 소유지였다. 그래서 때론 산 주인이나 이 산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산지기에게 적발될 경우엔 땔감을 조달하는데 애로가 따랐다. 줄행랑을 치거나 산지기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작업을 이어가야 했다. 거기에 더해 산림 감시원의 출동에도 때론 신경을 써야 했다.


야산의 주인이 나무꾼들을 막아서거나 때론 지서 등 사직 당국에 고발하는 사례도 가끔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정한 가이드라인은 분명히 따로 있었다. 어디까지 눈을 감아 줄 것인지, 이른바 관행이 있었다. 멀쩡한 소나무 가지를 일컫는 생솔가지는 채취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땅바닥에 쌓인 낙엽을 갈퀴로 긁어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썩어서 퇴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대로 두어야 했고 때론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땔감의 표적이 되는 나무는 주로 1년생들이다. 이번에 베어내더라도 일 년 후엔 또다시 그전 수준까지 자라날 수 있었기 때문에 산림 감시자도 그 정도는 눈감아 주었다. 1년생엔 아카시아, 버드나무, 물푸레나무, 참나무 등이 그 명단에 올라 있었다. 이들처럼 금세 다시 줄기가 자라나는 나무는 눈감아 넘겼다. 겨울엔 얼어버린 송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솔가지는 최고의 땔감으로 꼽혔다. 화력이 무척 뛰어났고 연기도 많았다. 쇠죽 끓일 때 땔감으로 가장 많이 쓰였다.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가지가 나무 본래의 주 기둥에서 떨어져 나가 땅바닥에 떨어진 삭도가지나 건축 자재로 요긴하게 사용하기 위해 원목을 베어낸 나무 밑동아리인 고주배기(그루터기) 등이 채집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 어쩌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관행을 어기고 생솔가지가 제법 모아진 경우엔 나뭇단 깊숙이 이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하여 혹시 지서에 근무 중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5일 장터를 우회하여 재빨리 통과하는 방법도 동원했다.


건축자재 등으로 쓸 수 있는 높은 등급 소나무는 행정 당국의 사전 벌목 허가를 받아야 했다. 베어낸 원목 양쪽 끄트머리에 시퍼런 색상의 동그란 모양 검인이 찍혀야 반출이 허용되었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엔 형사처벌 대상에 올랐다.


오늘도 어느덧 땅거미가 밀려왔다. 초가집 굴뚝마다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막차 거사님은 땔감의 단골 조달처이자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소골에 아예 도착을 하지도 못했다. 단골 주막집에 진을 치고 동동주가 담긴 노란색 주전자 20여 개를 비우고 낮잠까지 달게 챙겼다. 이에 나무하러 나선 본래의 목적은 잊은 지 오래였다.


학교 공부를 파한 친구 상곤이는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분부에 따라 자신의 어린이 전용 지게를 짊어지고 아버지 나무 마중에 나섰다. 아버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자전거는 물론 버스를 이용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늘 높이 쟁여 쌓은 나뭇단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귀갓길에 오른 아버지를 생각하며 상곤이는 발길을 재촉했다. 나무꾼들은 라어카나 달구지에 높이 쌓아 올린 나뭇단을 단단히 동여매야 했다. 탄력은 떨어지고 취성은 큰 이른바 뚝고무줄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 대신 칡넝쿨은 고무 밧줄 대신에 쓸 수 있는 아주 좋은, 훌륭한 대체재였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초등학생인 상곤이에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로등이란 구경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가깝고 먼 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에 머리끝이 쭈뼛쭈뼛했다.


각자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같은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나무꾼 행렬만 계속 이어졌고 그렇게도 눈앞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곤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막내아들이 나무 마중에 나서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막차 거사님이 알 리가 없었다.


막차 거사님은 오늘도 이미 두세 곳 주막에 들러 여유 있게 동동주 잔을 기울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어 날이 어둑해지고 초저녁이 되자 땔감 조달이란 자신의 본래 임무를 잊어버렸다. 양쪽 귀 위쪽 여유 공간에 풍년초 가치담배를 끼우고선 또 한 대는 입에 물고 주막 문을 나섰다. 오늘 아침 늦은 시각에 보금자리 사립문을 나서던 때와 똑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오늘도 우리 막차 거사님은 언제나 그랬듯이 결국은 빈 지게를 리어카에 싣고선 여유 있는 걸음으로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막차 거사님의 리어카엔 땔감이라곤 한 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칡넝쿨로 야무지게 묶인 푸르디푸른 달빛 여나무 단만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나무를 하러 제일 늦게 출발하고 제일 늦은 시각에 보금자리로 돌아온다고 해서 상곤이 아버지에겐 이 '막차 거사'란 별칭이 붙었다.


여기서 월산대군의 그 유명한 시조 '추강' 마무리 부분이 떠올랐다.

‘석양에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라’


이는 한적한 가을밤 풍취를 드러내어 물욕을 벗어난 탈속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물욕과 명리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을 그린 시조의 마무리 부분 풍경과 오버랩이 되었다. 막차 거사님은 생활고에 결코 연연하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실천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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