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 들어왔지? 종환이가 왔으려나?”
“준수야! 그냥 이야기해 본 거지?”
상곤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내게 물었다.
설날과 추석 민족 양대 명절 전날 우리 고향 친구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고스톱 경연대회와 술자리를 벌인다. 우리 동기들은 이미 스무 살 줄에 들어설 즈음부터 고향에서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추석 이틀 전날인 오늘도 우리 창고집 맞은편 끄트머리에 자리한 양다방에 면소재지 동기들이 모였다.
승용차를 굴리는 형편이 되는 친구들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열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하여 읍에 도착해서 우리 면소재지가 최종 목적지인 버스를 갈아타야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오후 7시 20분 읍내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고향 행 마지막 버스가 도착했는지, 이 막차에 혹시 우리 동기들이 타고 있는지를 알고자 무심코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성곤이 아버지 별명이 ‘막차’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터였다. 고스톱 경기에 몰입해 있는 친구들에게 무심코 던진 ‘막차' 운운에 상곤이 아버지를 놀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우리 초등학교 시절엔 농촌에서 땔감이라곤 나무가 대세였다. 연탄을 쓸 형편이 되는 농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취사용 아궁이에 나뭇가지 등 땔감이 필요했고 쇠죽 끓이는 용도에도 쓰였으며, 군불을 지피는 난방용으로도 나뭇가지 등이 동원되었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산림은 모두가 민둥산이었다고 초등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줄곧 듣곤 했다.
정부에선 녹화사업을 대대적인 국정 중장기 과제 중 하나로 정하고 매년 4월 5일을 나무 심는 날로 정하는 등 대대적인 나무심기에 나섰다. 그런데 우리 고향처럼 화목을 주요 땔감으로 사용하는 이 아궁이 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녹화사업이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우리 고향 나무꾼들은 이 화목을 구하러 소골이나 틸 등 비교적 땔감을 구하기 쉬운 곳에 모여들었다. 나무를 하러 가는 단골 장소가 정해져 있었다. 낙엽, 솔가지, 솔방울, 참나무 가지, 고주배기, 삭도가지 등 여러 땔감을 조달하러 지게, 리어카, 달구지 등을 동원하여 나서는 것을 우리 고향에선 '나무 하러 간다'고 했다. 특히 길고 긴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나기 위해선 어느 때보다 많은 땔감이 필요했다.
그 고달픈 농사일은 물론 땔감을 모으러 어린 나이부터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를 하러 가던 추억을 수시로 불러냈다. 부모나 삼촌 세대 어른들이 사용하는 지게 말고 초등생인 친구들 전용 꼬마지게도 등장했다. 친구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는 훈장이라 내세우며 자랑을 하곤 했다.그래서 지금도 친구들이 어린 시절 추억을 들추어 낼 때 자주 꺼내드는 질문이 있다.
“야, 너는 그래도 지게질은 하지 않았잖아! 그럼 고생하지 않고 자란 거야. 나는 초등 시절부터 내 지게가 따로 있었어.”
동네마다 자주 찾는 땔감 조달처가 따로 정해져 있었다. 황골은 오종골 저수지 인근이었고, 모산 나무꾼들은 소골과 늠벌이라 일컫는 광평을 주로 찾았다. 원당리 앞 뒷산은 모두 사유림이었다. 그래서 땔감을 조달하기 위해선 멀리 양강면 도덕리나 봉림리로 야산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유림이나 종중산은 주인이나 산지기의 철통 같은 감시망을 피해 다녀야 했다. 수은주가 영하 12 내지 15도 내외로 추락해 여러 날을 머물 경우엔 비단 강물은 두껍게 얼어버렸다. 이런 때엔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 리어카는 물론 황소가 끄는 달구지도 강을 덮은 얼음판을 건너 나무하러 틸 골짜기로 향할 수 있었다.
상곤이 아버지 또한 땔감을 조달하러 오늘도 각골 나무꾼들 단골 집결지인 소골로 향했다. 리어카에 지게를 싣고 출발했다. 본래 지독한 애연가인 막차 거사님은 작은 단위로 잘라낸 신문지 조각에 정성 들여 말아낸 봉초를 양쪽 귀 상단 홈에 야무지게 올려 꽂았다. 나머지 한 대는 당연히 입에 물었다. 때론 아들이 건넨 청자 담배는 아들이 보는 앞에선 피웠으나 아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우리 친구네 담배 가게에 들러 단가 6원짜리 생김새가 뚱뚱한 풍년초로 모두 바꾸었다.
대부분 나무꾼들은 새벽 밥상을 일찍이 물리고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 이른 아침 장도에 올랐다. 이와 달리 막차 거사님은 여유만만했다. 해가 중천까지 떠올라온 시각에 느지감치 사립문 밖으로 나섰다. 어느 나무꾼보다 늦은 시각에 출발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막차 거사님은 숲머리를 지나 모리 모퉁이도 거쳐 최종 목적지인 소골로 향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주막의 오른쪽 한 모퉁이에 리어카를 세웠다.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 듯 주막을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바깥 숲머리 주막집, 모리 포수 등 3가구만 모여 사는 근처 모리주막 등은 막차 거사님의 단골 주점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워낙 늦은 시각에 집을 나서기도 했고 해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도무지 짐작도 어려웠다. 새벽에 출발한 동네 청장년, 심지어 초등생 나무꾼들까지, 이미 예닐곱 단의 나뭇짐을 리어카에 가득 싣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행렬이 하얀 먼지가 폴폴 나는 비포장 신작로에 줄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