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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Sep 23. 2023

홀로 찬 강의 눈을 낚다

                    

아니, 정답이 1번이 아니고 4번이라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야.”

고교 1학년 2학기 시절이었다. 하루 날을 정한 수업 시간엔 지난번에 치른 월말고사 국어 시험문제 해설이 있었다. 두보를 비롯한 옛 중국 유명 시인의 한시에 관한 문제도 이번 시험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나라 시대 오언절구의 절창으로 꼽히는 유종원의 ‘강설’ 마지막 절에 관한 문항이 이슈가 되었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萬經人踪 滅(만경인종멸)/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온 산에 새들도 자취를 감추고/ 길에는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데/외로운 조각배에 도롱이 삿갓 쓴 노인/ 눈보라 치는 강 위에서 홀로 낚시하네     


대부분 참고서엔 이런 정도로 풀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월말고사에서 이 5언절구 중 마지막 행인 ‘독조한강설’ 부분을 우리말로 가장 적절한 게 옮긴 것을 고르라는 4지 선다형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 문항의 정답지 중 1번 선지는 ‘눈보라 치는 강 위에 혼자 낚시질’ 또는 ‘홀로 낚시질, 차가운 강엔 눈만 내리고’라는 무난한 풀이에 가까웠다. 그래서 대부분 친구들은 고민할 여지도 없이 1번을 골라냈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번 선지 이후 나머지 2~4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당시 국어 담당 추 선생님이 국어 참고서로 추천한 ‘하이라이트’와 ‘으뜸국어’를 떠들어 보아도 1번 선지와 같이 무난한 해설을 달고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이와 달리 추 선생님은 우리 친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해설을 입 밖에 내었다. ‘1번은 정답이 아니고, ’ 홀로 찬 강의 눈을 낚는다’고 적힌 4번을 정답으로 하여 채점을 마쳤노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교실 안은 갑자기 크게 술렁였고 친구들은 웅성거렸다.  

    

선생님, 대부분의 참고서엔 1번 선지가 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이 낚시이지 어떻게 ‘눈’을 낚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답을 1번으로 정정하거나 아니면 1번과 4번 두 개를 모두 정답으로 채첨 하는 복수정답으로 해야지 않나요?”   

  

친구 환규는 한 손을 번쩍 들고 얼굴을 붉혀가며 거칠게 항의를 했다. 나도 환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했다. 하지만 똑같은 건으로 추 선생님께 어필하는 것은 좀 과잉대응이란 생각에 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환규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거친 항의와 반발에도 추 선생님은 이 문항 정답을 4번으로 정한 것을 번복하거나 한 발 양보하여 복수정답으로 인정하는 것도 완강히 거부했다. 더 이상 논란거리로 삼지말자며 단호하게 틀어막았다.     


이번 문항을 출제하고 4번을 정답으로 정한 데는 나름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었다. 이 5언 절구 한시의 마지막 행을 직역을 한다면 당연히 1번, 아니면 의역을 한다면 4번이 정답에 가깝다는 정도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었다. 운치를 돋우고자 하는 한시 특성을 살리자면 4번도 택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듯했다.      


최근 수학능력시험의 난이도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유명학원 일타강사들이 변별력을 키운다는 이유로 이른바 ‘킬러 문항’을 가르치고 이는 실제 수능문제에 등장한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추 선생님도 일찍이 이런 일타 강사들처럼 자신이 맡고 있는 월말고사 국어시험에서 만점자가 속출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를 막기 위해 이 문제를 끼워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할 듯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엔 나는 4번을 정답으로 채점을 마친 추 선생님의 결정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하게 되었다. 문학의 세계에서, 특히 은유와 축약 여백의 미가 강조되는 시 중에도 한시 문구는 단순히 한 음절 한 단어의 지구에만 매달려서 논리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강설이란 오언 절구를 살필 때 물고기를 낚으러 배에 오른 것이 논리적으론 백번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한시의 저자가 살아온 생의 여정이나 이 한시를 지어낼 때 처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며 감상하려면 의역도 충분히 좋은 풀이 방법 중 하나로 볼 수 있었다. 이 시인은 부침이 심한 생을 살았다. 절구 속에서 낚시질하는 노인으로 표상되는 시 속 화자는 이제 말년엔 속된 세상을 떠나 그저 유유자적하고 싶었다. ‘물아일체’ ‘물심일여’의 경지에 이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 한시의 원문에 충실한 해석인 직역을 굳이 해야 한다면 당연히 1번 선지가 정답이 되는 것이 바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시적 화자의 처지나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떠올린 시심 등에 더 무게를 둔다면 의역에 가까운 4번을 정답으로 결론을 내도 그리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결국은 '한강설'을 목적어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낚시하는 배경을 묘사하는 부사어로 볼 것인가에 귀착된다. 1번과 4번 모두가 각각 직역과 의역의 산물이 될 수 있었다직역을 할  생각으로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놓았더니 의역이 되었고 물론 그 정 반대도 가능했다.   

  
여기서 갑자기 '뫼비우스의 띠'  머릿속에 떠올랐다면에는 안과 밖이 있다예를 들어 종이는 앞 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외부와 내부를 갖는다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면 사각형으로 오려 그 양끝을 붙이면 역시 안과 밖 양면이 있게 된다그런데 이것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이것이 뫼비우스의 띠이다. 한자어를 의역했다고 생각했으나 우리말은 직역이 되었고 이와 반대로 직역의 결과는 신기하게도 의역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직역과 의역은 안팎이 따로 없는 결국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곡면 위를 오가는 풀이 방법이었다.         

    

다가오는 연말엔 나도 다시 귀촌을 할 예정이다. 그래서 비단강 상류의 @@여울이나 영국사 인근 저수지를 찾아 이 시속 화자처럼 겨울 낚시를 즐겨보고 싶다. 매서운 강풍에 휘날리는 찬눈을 한량없이 낚아보고 싶다. 8세기 말을 너머 9세기 초까지 짧은 생으로 마감한 오언절구의 시인이 가졌던 시심에 동참해 보고 싶다. 부침이 심한 치열한 생애를 살아낸 회한이 이 시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었다.    

 

국어시험에서 만점자가 속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추 선생님이 다른 문제 사이에 끼워 넣은 이른바 ‘킬러문항’으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나 앞서간 추론이었다. 당시 4번 선지를 정답으로 정한 추 선생님의 결정에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릇 ‘행간의 뜻을 읽다(read the betweens)’란 유명한 말을 나는 평소 아주 좋아한다. 이 말을 떠올리면 이는 더욱 확연해진다. 시인의‘내심의 효과의사’에 한 발 더 가까운 한시 감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내가 기억이 나는데 그때 그 문제는 나만 맞힌 것 같은데...”

국문학을 전공한 절친 문성이가 너스레를 떨었다. 작년 7월 초 우리 고향에서 멀지 않은 무주구천동 어사길을 고교동기들과 트레킹 할 좋은 기회가 있었다. 이 행사 뒤풀이 자리에서 친구는 이렇게 자랑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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