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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Jan 24. 2024

하숙집 아줌마배 쟁탈 장기대회(2편 완)

                      

이래서 무작정 상경하여 여러곳을 어슬렁거리던 강호의 고수라 자칭하던 손님도 여러번 경기에서 단 1승도 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구도와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박포장기의 생리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원권 지폐 한장을 베팅하고 경기에 나서는 무모한 시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덩치도 깍두기에 버금갔고 인상도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주최측 스텝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만의 하나 손님이 경기에서 이기더라도 자신이 베팅한 금액을 포함하여 그 두배를 회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 했다. 손님을 가장한 바람잡이들이 이 무리엔 항상 끼어 있었던 것이었다.   

   

프로는 언감생심, 아마츄어 선수 반열에도 이름을 절대로 올릴 수 없었던 나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 하숙집 장기대회에선 선전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선 예선은 단판 승부, 결승전만 32선승제로 룰을 정했다. 나는 예선에서 파죽의 2연승을 이어갔다. 공교롭게도 결승에선 내 룸메 공대 신입생과 마주 앉았다. 우리 둘은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불꽃 뛰는 접전을 벌였다. 결승전다운 경기에서 21로 내가 신승을 거두었다.    

  

오늘 치른 하숙집 아줌마배 쟁탈 장기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나는 솔직히 좀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하숙생이 볼 때 대회 경기종목 선정에서부터 경기방식, 우승상품 선정에 이르기까지 내가 진주형과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진주형에게 우호적으로 보인 근태성적덕분이라 넘기기로 했다.      


계절의 여왕이란 불리는 5월 초 어린이날 행사는 이렇게 해서 모두 마감되었다. 밤 늦은 시각에 나와 룸메는 이부자리를 챙겨 같은 방에 나란히 드러 누웠다. 나는 곧장 잠을 청했지만 평소와 달리 꿈나라 여행의 출발이 순조롭지 못했다. 비몽사몽 상태가 이어졌다. 하숙방 천장위엔 장기판이 파워포인트 화면처럼 구현되어 비쳤고 한나라와 초나라의 말들이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오늘 하루 종일 장기경기에 몰입한 유증이었음은 물론이었다.   

   

당시 바둑판을 들고 모교 숲속 빈자리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바둑경기에 빠져 있던 대학 동기 호준이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번 동네 공중목용탕에 갔었는데 타일 바닥이 모두 바둑판으로 보이더구먼...”
 

장기,바둑, 당구 등 어떤 놀이나 경기에 몰입하다보면 이런 환영이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순간 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았다. 하숙방 천장에 비추어진 파워포인트 화면에 국가고시 2차시험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이 구현되는 행운이 혹시 내게 올 날이 있지않을까 하는 기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내가 우승 상품으로 손에 쥐었던 1,000원을 호가하던 검은색 샤프펜슬은 아직도 내 필통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당당히 버티고 있다. 그 이후 긴 세월 동안 이어간 학창시절에 더하여 수험생 기간 동안 내내 나의 친한 벗이 되었다. 충직하게도 스스로 내 곁을 한번도 떠나지 않고 있다.    

  

수험생활을 계속 이어가던 중이었다. 중앙도서관 3층의 지정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도 우리 모교가 자랑하는 대학의소리(vou) 학교방송 평일 오후 정규 프로그램이 마감될 무렵 마무리 배경음악이 깔리고 있었다. 주문 제작한 목재 독서대 위에 올린 교과서를 정독하던 중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손때 묻은 교과서 2권을 세로변으로하고 대여섯권을 높이로 쌓았다. 그 위에 수건을 세로로 길게 두겹으로 접어 올려 깔았다. 양팔을 접어 팔장 끼어 올리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뺨을 팔뚝 위에 부드럽게 안착시킨 후 눈을 감았다. 이것이 내가 평소 달디단 낮잠을 청하던 방식이었다.

     

잠시후 이번에도 파워포인트 화면이 정면으로 구현되었다. 예전 어린이날 장기대회 시절의 그것과 똑 같았다. 방금 전 내가 읽었던 교과서의 내용이 문단을 나누어서 그대로 비추어졌다. 순간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차근 차근 줄을 바꾸어가며 읽어내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런 경우 누구는 몇 대조 할아버지가 나타나 로또 복권 1등 번호를 점지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네게 더 간절한 것은 국가고시 2차 주관식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이었다. 

    

무릇 자신이 가고자하는 길을 선택하고 집중하여 이를 이루고자하는 일에 몰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플러스 알파의 효과가 이에 뒤따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고 이제껏 살아왔다.   

   

준수야, 인생 별 것 아니다. 그저 바둑 한 판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평소 내게 그토록 우호적이고 나를 응원해주던 진주 형이 어느날 갑자기 내게 던진 한마디였다. 당시로선 내 수험생활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젠 국가고시 2차시험 예상문제와 모법답안지의 점지를 바라던 것 보다 훨씬 내 피부에 와닿는 보다 현실적인 명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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