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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Jan 23. 2024

하숙집 아줌마배 쟁탈 장기대회(1편)

                   

아주머니, 어린이날인데 무엇 없나요?”
 그래 그럼 내가 무엇을 해주면 될까?”

내가 대학교 2년 시절 모교 후문 인근 한옥이 많은 주택가에서 하숙생활을 할 때였다. 내 룸메 공대 1년생 후배가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뜬금없이 들이댔다. 우리 하숙생 8명 모두는 최소 10대 말에서 20대 초중반, 또는 30대 초반이었으니 그 누가 보더라도 어린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숙집 아주머니 입장에서 보면 어린이로 볼 수도 있었다. 아주머니는 슬하에 20대 초중반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으니 그랬다. 이런 내 룸메의 돌출발언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좀 황당한 이 요구에 스마트하게 응대를 했다.   

   

그럼 병맥주(4) 10병에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2 마리면 되겠어?”

이런 아주머니의 뜻밖의 호의에 우리 모두는 반색을 했다.     

그런데 이것 맥주 파티로는 2% 부족해 보이는데요?”

나도 추임새를 한마디 보탰다.     

그럼 무엇을 하면 좋을까?”

바로 우리 옆방의 내 띠동갑 치대 본과 4학년 선배 진주형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주머니배 쟁탈 장기대회는 어떨까요?”

“그것 괜찮은데, 준수야 그럼 우승상품으론 무엇이 좋겠어?”

아주머니께 큰 부담을 드리면 아니 되니까 샤프펜슬 1자루 걸면 어떨까요?”

그래, 그것 괜찮겠네 그럼 우리 하숙생 모두 모여 의견을 물어보자고...”


 당시 하숙생 8명 연령별 분포를 살펴보았다. 아직 군복무를 마치지 않은 현역 신입생과 재학생은 기껏해야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올해 캠퍼스애 새로 발을 들여놓은 신입생은 무려 3명이나 되었다. 이에 반해 예비역 선배, 대학원생, 이미 봉급생활자로 자리를 잡은 선배 직장인은 20대 후반을 넘어 30대 진입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치대 본과 4학년 진주형은 나와 띠 동갑으로 최고 연장자였다. 

    

우리 하숙집 아주머니는 평소 예비역 선배들에게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주고 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경어를 사용했으며 실제 본인들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아주 적절한 대안을 찾았다. 각자의 출신지 명으로 불렀다. 이를테면 체대 대학원생 선배는 공주,치본과 4학년 선배는 진주, 이제 직장을 잡고 야간대학원에 재학 중인 선배에겐 충무라는 식으로 불렀다. 나를 비롯해 우리 후배들은 선배 출신지 지명뒤에 형을 붙여 불렀으니 이 또한 무난한 방식이었다.  

  

이 선배 중 특히 진주형은 나를 남달리 신뢰하여 챙겼고 내 의견을 늘 존중해 주었다. 오늘 어린이날을 맞아 이 장기대회가 성사되는데도 이 진주형이  단계마다 내 제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 덕분에 쉽사리 성사되었다.   

   

지난 3월 초엔 이번 신입생이 3명이나 우리 하숙집에 합류하여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 하루는 저녁식사 밥상머리에서 진주형은 나를 공개적으로 치켜세운 적도 있었다.      

어이, 이번 신입생들 앞으로 공부나 대학생활 등에 관해선 준수 선배를 본받고 따르면 될 거야. 준수가 학교 문을 조금 늦게 들어섰으니까 아마 바로 위 형뻘은 될 거야. 캠퍼스 생활은 낭만 어쩌고 하는데 이제 이도 많이 바뀌었어. 도서관 다니고 시험공부 등에 관해선 준수에게 자문을 구하라고.”   

  

학기 중은 물론 겨울방학 기간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 도서관을 오가는 내 공부 패턴을 가까이서 지켜본 진주형은 과분할 정도로 나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어린이날 행사를 성사시키는데도 주위의 눈치를 살펴야 할 정도로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사실 바둑보다는 장기가 내 주력 종목이었고 우승 상품으로 정한 샤프펜슬도 내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정한 것이었다.  

    

드디어 대망의 하숙인 장기대회가 그 막을 올렸다. 8명 하숙생 모두는 사다리를 타는 방법으로 대진표를 정했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하기로 정했다. 그래서 3경기만 연속해서 이기면 우승자가 되는 구조였다.  

    

당시 도심지 공터나 도로변 공간에선 이른바 박포 장기게임을 쉽게 지켜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 주최 측은 구경꾼들이 제법 모여들면 돈내기 게임을 제안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바둑이나 장기 경기에서 프로기사들은 @수 앞을 내다본다고 하지만 우리 아마추어에 불과한 보통 사람들이야 이 정도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 박포장기는 만 원권 두어 장을 바둑판 한쪽 귀퉁이 아래에 물려놓고 주최 측에서 이기면 상대가 판돈으로 건넨 돈을 돌려주지 않고 만약 자신들이 패하면 2만 원을 돌려주는 방식을 이어갔다. 이 주최 측 선수들 장기실력도 프로 선수들의 그것에 어림도 없는 수준에 불과했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손님이 한 수만 삐끗하는 실수를 저지르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구도를 미리 세팅해 놓는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손님은 경기에서 백전 백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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