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밤새 이어진 고민의 무게 탓일까, 억지로 몸을 일으킨 건 이미 점심때를 훌쩍 넘긴 후였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순간, 허리가 욱신거림을 알리더니, 이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어깨 결림이 뒤따라왔다. 숙면은 이제 누워 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저 멀리 떨어진 사치가 되었다.
'누워 있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대체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불현듯 찾아온 자각은 대뇌 피질의 주름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깊은 고랑을 팠다.
그러자, 곡괭이가 돌에 세게 부딪힌 듯 파팟, 뇌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밤새도록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차가운 걸 먹음으로써 이빨이 시린 것처럼 한순간에 맑아졌다.
"쉰여섯이라니… 젠장."
입에서 절대 내뱉고 싶지 않던 숫자가 툭, 까칠 거리는 모래알처럼 흘러나왔다.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었던 약속. 그 도깨비와 계약했던 나이가 오늘 날짜로 섬뜩하게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반백 년이 넘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이렇게 재빨리 나를 덮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라리 그전에 마음 편히 죽었더라면… 어땠을까.
"젠장. 해야겠지. 안 하면 안 되겠지…."
외할아버지는 무뚝뚝함으로 단단히 둘러싼 경상도 남자였다. 한없이 순하고 가녀리던 외할머니에게 함부로 대하던 그의 모습이 문득문득 잠겨 있던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마루에 외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리고는 재빨리 부엌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 어린 내 눈에도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면 혼이 날까, 서둘러 사라지는 외할머니의 뒷모습이 애처롭게만 느껴졌던 모양이다.
왜인지는 지금도 이유를 모르나, 외할아버지는 어린 외손자가 자신의 방에 드나드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낡은 신문이 빼곡히 발린 방은 조그마한 별채였는데, 늘 열려 있는 대문과 가까이에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탄약통이 놓여 있었고, 안에는 잘게 썬 담뱃잎, 그러니까 담뱃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방문을 열어둔 채 곰방대를 물고 천장을 응시하다가, 방이 하얀 연기로 가득 차면 벌떡 일어나 서둘러 집을 나서곤 했다.
대문 앞은 흔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호수 같은 바다였다. 작은 여러 개의 섬들이 파도를 막는 잔물결만이 있는 곳. 모래와 조개껍데기로 뒤섞인 순결하지 못한 갯벌, 그래서 발이 빠지지 않는 닳고 닳은 창부 같은 무미건조의 갯벌 같지도 않은 갯벌. 그 뒤로 외갓집 한 채만 덩그러니 놓인, 독특하리만큼 고요한 그런 곳이었다.
어느 날, 나는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대문을 나서는 외할아버지의 뒤를 급히 따라갔다. 하지만 짙은 안갯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신기함과 동시에 덜컥 겁을 먹었다.
"할머니, 할머니! 큰일 났어요! 할아버지가 바닷속으로 사라졌어요!"
자욱한 안개 너머 바다로 흰 도포 자루를 끌며 걸어 들어가는 모습에 놀라, 나는 외할머니에게 울며 달려갔더랬다. 그 순간의 극적인 긴장감은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의 충격적인 도입부처럼 뇌리에 박혀, 지금껏 선명하게 남아있다.
방학 동안 또래 친구나 친척 없이 외갓집에서만 지내는 것은 꽤 고된 일이었다. 나 홀로 버스에 태워 외갓집에 보낸 어머니의 결정은 요즘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겠지만, 그때는 모든 게 거칠던, 생존하기 위한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버스는 외갓집 앞의 바닷가 옆으로 난 노선과, 인적이 끊긴 산길에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산길 노선이 있었다. 버스가 바닷길을 굽이굽이 도는 동안, 나는 외갓집을 놓칠세라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보아야 했다. 한두 정거장 전에 내리면, 외갓집까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는데, 그때 떠돌아다니는 개를 만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크르릉....
"여기에 세워주세요."
세우지 않고 그대로 달릴까 조마조마했다. 정거장이 따로 없는 산길에서 내리면, 바닷가에 있는 외갓집까지 족히 1km는 걸어 내려가야 했다. 사방이 벌거벗은 황토인 곳에서, 나무라곤 어린 나보다 키 작은 소나무가 듬성듬성한 정도의 산. 나는 사람들의 발길로 다듬어진 듯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바닷가에 혼자 있는 집이었기에 찾아가기엔 어렵지 않았는데, 그저 안도와 반가움으로 빨리 가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대문을 나서는 걸 기다렸다가, 열린 방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외갓집에서 가장 궁금증을 자극하는 공간이었던 외할아버지 방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모험하는 흥분에 빠져 들었다.
대략 그 기억 속의 내 나이는 열 살쯤 되었을까.
어렸던 나에게 그 방은 낯설면서도 몸이 기우뚱해지는 묘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담배 냄새가 짙게 밴 천장은 아주 깜깜하여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빙글빙글 돌게 했다. 처음엔 몇 번의 숨을 들이켠 것만으로도 구역질했지만, 그것도 점차 익숙해졌는지 빙빙 도는 감각을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기절했는지 잠이 들었는지 모를 상태로 쓰러져 있다가, 어둑해질 즈음에야 스스로 깨어나곤 했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유도를 꽤 잘하셨대. 마을에서 뼈 빠진 사람이 있으면 쉽게 맞춰줄 정도였거든."
잠을 설치던 나에게 작은 외삼촌이 속삭였다. 외할아버지가 유도를 잘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외삼촌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시 집에 머물고 있었다. 외할머니를 괴롭히는 외할아버지를 내심 싫어하는 눈치였으나, 그렇다고 무시하거나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냥 피하는 느낌으로, 밥도 함께 하지 않으려 했고, 얼굴도 마주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모양새였다.
외할아버지가 바다로 들어가는 줄 알았던 그날 밤, 작은 외삼촌은 잠자리에 든 나에게 외할아버지가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아마도 놀란 나를 다독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을 것이다. 외삼촌의 팔베개를 벤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작은외삼촌.. 캄캄한 방에 누워 오지 않는 잠으로 뒤척이다 보면, 가끔 당신이 생각납니다.
"이놈! 잠깐 서 봐라."
어느 밤, 작은 사내 하나가 할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그는 상갓집에 들렸다가 산 두 개를 넘은 후, 고개를 막 넘던 참이었다.
"넌 누구길래 이 밤에 급히 지나가는 나를 부르는 거냐?"
할아버지는 도둑이 별로 무섭지 않았다. 이런 샛길에 도둑이 나타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도둑이 칼을 들고 있어도 업어치기로 맨바닥에 꽂아버리면 그만이었다.
"헤, 맨날 이 길로 놀러 다니는 걸 지켜보았지. 보아하니 오늘도 너만 술을 마시고 왔구나."
조그만 사내는 투덜거리며 할아버지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다.
"내가 술을 먹고 오든 말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할아버지는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이 길은 내 길이다! 이제부터 술을 주고 지나가든지, 나를 이기고 지나가든지 둘 중의 하나다!"
조그만 사내가 겁도 없이 할아버지에게 바싹 다가서며 협박했다.
"이놈아! 뱃속에 가득 든 술을 뱉어줄까? 아니면 네놈을 땅바닥에 대가리를 꽂아줄까?"
턱 아래로 보이는 조그만 사내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할아버지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 뱃속에서 출렁이던 술이 목을 타고 올라와, 조그만 사내의 머리 위로 달콤하게 농익은 술 냄새가 쏟아졌다.
"헤헤헤, 뱃속의 술은 내가 알아서 다 먹을 거다. 넌 나를 이기지 못하면 못 지나간다!"
조그만 사내의 기분이 풀어졌는지,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쪼그만 놈이 뭐라는 거야. 어디 해볼까? 뭐로 할까?"
"헤헤, 씨름으로 하자. 어때?"
그는 싸가지를 똥구멍에 달고 사는지 겁도 없이 할아버지의 배를 툭툭 치며 말했다.
'씨름이라고.... 이놈이 정말 겁이라는 게 없구나. 오른팔 하나를 빼서 덜렁거리게 만들면 두 번 다시 까불지 않겠지....'
"좋다. 씨름으로 하자!"
할아버지는 조그만 사내의 허리 샅바 대신 바짓가랑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목덜미를 살짝 잡아 단번에 끝낼 준비를 마쳤다. 할아버지 눈에는 허리를 굽힌 그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작게 보였다.
"시작!"
할아버지의 양 허리춤을 슬렁슬렁 잡은 조그만 사내가 야무지게 구령을 외쳤다.
"이 얏!"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할아버지는 오른 다리로 허벅다리 기술을 넣었다. 상대는 당연히 공중에 떠올라 맨땅에 매쳐질 터. 그런 후 잡고 있던 오른팔 뼈를 순식간에 빼버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대체 뭐지? 할아버지가 온 힘을 끌어다 써도 조그만 사내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의 몸이 종잇장처럼 허공으로 붕 떴다.
"에게, 너 뭐 하는 게야. 내가 이겼으니 술 한 잔 가져간다."
조그만 사내가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이상한 농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왜 바닥에 누워 있는지 잠시 영문을 몰랐다. '내가 방에서 자고 있나?' 생각했으나, 방이 아니었다. 차가운 바닥의 한기를 손으로 더듬고 나서야 기억이 찬찬히 돌아왔다.
"한 판 더 하자!"
할아버지는 엉덩이를 털털 털며 황급히 일어났다. 순간 알딸딸했던 취기가 가신 느낌. 내뱉은 숨에서 지독했던 술 냄새가 나질 않았다.
"이 조그만 사내는 대체 누구였을까? 할아버지는 그날 밤, 사내와 무언가 알 수 없는 약속을 한 모양이었단다."
작은 외삼촌은 이야기를 이어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자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골목대장은 외가 쪽으로 오촌 친척이었는데, 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그를 '일산 삼촌'이라고 불렀다. 나보다 두 살 더 위였지만, 자기보다 두세 살 많은 동네 형들과 싸워도 절대 지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대장이 가자고 하는 곳은 부하였던 아이들이 무조건 따랐다. 물론 나도 그중의 하나였고, 친척이라는 이유로 나름 일산 삼촌에게 힘을 부여받았다. 일산 삼촌은 나를 앞세워 다른 동네 아이들과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저 애와 싸워라!"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나는 처음 본 아이에게 다가가 무작정 주먹을 휘둘러야 했다.
"이만한 크기의 못을 최대한 많이 모아라!"
대장은 땅에 떨어진 손바닥 길이의 녹슨 못을 한 개 주워 들고 크게 외쳤다. 전투에 앞장서는 군인처럼 말하는 모습이 멋졌다. 쫄따구인 우리는 쪼그려 앉아 경쟁하듯 못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땅에 박힌 새것에 가까운 못 머리를 잡고 끙끙대며 간신히 빼냈는데, 곧고 반듯하게 생긴 못이었다. 못에 묻은 흙을 손바닥으로 깨끗이 닦은 후, 못의 자태에 꽤 만족해했다.
"어디 보자. 오, 꽤 좋은데."
대장은 내가 주운 못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그 못을 가져가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생각보다 나는 빨리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따라라!"
그날따라 대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총을 든 군인처럼 행동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두두! 두두두!'
마치 총알이 쏟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장이 허리를 숙인 채 골목에서 이리저리 몸을 피하면, 우리도 총알에 맞지 않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는 만리장성의 벽만큼이나 높은 언덕이 있었다. 쫄따구들인 우리는 그 언덕을 반드시 올라가야 했다. 적이 지키고 있는 그곳을 탈환해야 한다는 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올라가라! 진지를 탈환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뒤처질세라 경쟁하듯 언덕을 기어올랐다. 나는 다른 또래들에 비해 키가 더 커지는 않았지만 높은 곳을 잘 올랐다. 두어 번 미끄러지면서 뱃가죽이 풀에 긁혀 피가 밴 기다란 상처가 생긴 줄도 모르고 누구보다 빠르게 기어올랐다.
'두두두두!!'
대장보다 더 빨리 적의 진지에 도착한 나는 두 손으로 총알을 사방에 쏘아댔다. 철로에 엎드려 있던 많은 적들이 뒹굴며 죽어 나갔다. 대장이 올라오고 모두가 도착한 후에야 나는 입으로 쏘던 총을 멈췄다.
그때야 입에서 피 맛이 물씬 올라와 콧구멍을 지나 뇌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올라오느라 아랫입술이 찢어진 줄도 몰랐다. 침이 혀에 닿을 때마다 통증이 욱신거렸으나, 이빨로 찢어진 입술을 감싸며 아프지 않은 척 애써 웃어 보였다.
"못은 이렇게 놔야 해."
대장은 철로 위에 내가 주웠던 제일 잘생긴 못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분명 내 못이었다.
나는 손바닥 안에 있던 못 세 개를 철로 위에 띄엄띄엄 놓았다. 다른 아이들도 자기가 주운 못을 이곳저곳에 놓느라 바빠 보였다. 얼핏 대장이 철로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 걸 보았다.
그때 나도 들었다. 멀리서 달려오는 기차 소리가 아스라이 느껴졌다. 철길 위에 흩어져 있던 우리는 천천히 철로를 벗어나 약간 떨어진 곳에 납작 엎드렸다. 잠시 전까지 들리던 바람 소리가 사라졌다. 배 밑에 깔린 자갈을 통해 심장에 그대로 전해지는 '웅-'하는 울림이 나를 점점 긴장하게 했다. 순식간에 다가온 철컹거림의 거대한 쇠가 감은 눈으로도 보이자, 어서 도망치라는 절망이 머릿속 사방에서 외쳐댔다. 시커먼 말이 덮치는 환상에 나는 자갈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철커덩 철커덩'거리는 쇠바퀴의 굴러가는 소리가 지나갈 때, 나는 오히려 고개를 들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바람을 달고 빠르게 지나치는 기차를 보자, 금방까지 휘몰아치던 두려움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2m도 떨어지지 않은 옆을 지나침에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표창을 챙기지 않고!"
대장의 잔소리에 나는 철로에 올려둔 못을 가지러 갔다. 벌써 저 멀리 꼬리만 남긴 채 사라지는 기차를 본 후, 철로 위의 납작해진 못을 보았다. 못은 얇고 뾰족하게 펴져 멋진 표창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표창을 하나 들고 근처 나무를 향해 던졌다.
'빡!' 소리를 내며 꽂힐 것으로 생각한 표창은 바로 튕겨 나와 수풀 사이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찾을 생각도 없이 수풀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금방 툴툴 털어버린 채, 두 개의 표창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여기서 또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저 멀리 두 팔을 벌리고 어딘가로 향하는 철로 위에 올라갔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던 흔들리던 몸이 중심을 잡자, 나는 양팔을 벌리고선 발 앞을 내려보면서 걸었다.
'휘-잉!'
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몸이 날려, 파란 하늘을 향해 똑바로 서서 그대로 날아올랐다. 눈 가득 파랗게 물든 하늘이 파고들었다. 나는 맨발로 모래를 밟은 채 발목에 살랑이는 파도를 느끼며 바닷가에 서있는 편한 기분에 단단히 젖어있었다.
그때, '빠―앙!'
기차 기적 소리가 귓가를 무섭게 울렸다. 그렇게 가까이서 벼락보다 더 큰 소리가 사납게 소리 질렀던 것이다. 나는 본능에 충실하게 사로잡혀, 철로에서 옆으로 냅다 뛰었다. 그건 살기 위한 절대적인 본능이었다.
'끼이잉―!!'
내가 들은 그 소리는, 거대한 쇠덩이가 달려가던 속도를 스스로 도저히 멈출 수 없어 살려달라고 비명 지르는 끔찍한 마찰음이었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잘게 찢긴 무언가의 붉은 덩어리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보면서 그대로 기절했다.
"어떡해. 누가 죽었나 봐."
멈춰 선 기차의 승객 창문에서 고개를 내민 젊은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