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따구 영감의 대추 1

by Tigerwood

04. 희미한 기억 속 선명한 이야기

"너는... 나와.... 계약.... 서른넷...."

그 알 수 없는 문장은 내 뇌의 깊은 심연에서부터 솟아올라, 쉰여섯 살이 된 지금. 쉬지 않고 내 뇌리를 맴돌았다. 지금까지 애써 외면하며 단단히 쌓아 올렸던 방어기제가, 밀려든 바닷물에 서서히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귀청을 흔들어댔다. 다행히 그 말의 의미는 아직 희미하여, 극심한 스트레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막연한 불쾌감과 알 수 없는 의무감만이 나를 짓누르며 구석으로 내모는 기분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고,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뇌의 신경돌기에 새겨진 이야기들이 꽤 많은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깨비와 관련한 이야기가 시간순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고 어렴풋하게나마 생각 들었지만, 정작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특별할 것 없는 옛이야기들의 흔적에 불과했기에, 이 한 편의 이야기가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를 나 자신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마주해야겠지. 이야기 순서는 기억나지 않아. 떠오르는 확실한 이야기는 오직 이 것뿐이다. 그건 그렇고.. 대체 나는, 지금, 무슨 상황에 놓여 있는 건가."

타닥, 탁탁탁! 새벽 1시. 결국 노트북 앞에 앉은 나는 고민했다.

'이 이야기를,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게시판에 쓰는 건지... 원 참.... 약속이라 했나? 아니면, 지울 수 없는 계약이라 했던가....'

파편처럼 날리는 이야기 중 유독 기억나는 이 이야기는, 듣는 내내 깔깔거렸던 유쾌한 잔상과 함께, 어눌하지만 흥겨운 노랫가락이 나에게 평온함과 안도감을 선사했더랬다. 그 감각이 이 이야기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루가 기부니조으고.. 노라도조으구...."

그 어눌하지만 흥겨운 노랫가락을 들었을 때 마치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어린 손자처럼, 도깨비 앞에서 신이 나 노래를 따라 불렀었다. 그때 나는 도깨비가 처음으로 크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어이없게도 이건 착각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기억이 분명 맞다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왜냐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그때의 어린 나는 틈만 나면 그 노랫가락을 반복해 불렀던 기억이 갈수록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내 기억 속 유쾌함의 근원이리라. 어쩜 무섭다고 느끼던 감정이 이때부터 달라졌기 때문일까.

아무튼, 볼따구 영감은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북부 도깨비에 얽힌 이야기다. 전체 시간 흐름으로 보면 중간쯤 되는 이야기지만...

'흠... 모든 이야기가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라 별문제 없을 것 같긴 한데...'

어차피 다른 이야기는 전혀 떠오르지 않으니, 선택의 여지 또한 없는 셈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원치 않는 결과가 생길 것 같은 불안이 나를 심하게 짓눌렀다.

이런 변명으로, 첫 번째 이야기인 <볼따구 영감의 대추>를 쓰고자 한다.



볼따구 영감의 대추


패수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주변의 웅장한 산들에 비하면 산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야트막한 언덕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언덕을 오봉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평양 시내에 사는 이들에게 오봉산은 단순한 언덕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도깨비산'이라 불리며 금기시되었고, 그 이름조차 입에 담지 못하게 한 탓에 언젠가부터는 오봉산이라는 완곡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오봉산에 놀러 가는 것을 극도로 염려했다. 무서운 줄 모르고 호기심에 이끌리는 철없는 아이들을 막기 위해, 어른들은 오봉산과 관련하여 호랑이에 대한 으스스한 속언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오봉산에 가면, 집으로 호랑이가 찾아온다."

"죽으려고 오봉산 가는 거냐."

"겁도 없이 호랑이한테 팔다리 줄려고 간다."


아들을 앞에 무릎 꿇린 아빠는 버럭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놈 보게.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게다! 만일 근처라도 갔다가는 앞으로 싸돌아다니지 못하게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테니 그런 줄 알거라!"

"아빠, 호랑이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신기한 거만 보면 정신 못 차리고 따라가는, 아직 무서운 게 뭔지 잘 모르는 어린 아들은 아빠 앞에서 까불거렸다. 아들은 킥킥대며 재미있어할 뿐이었다.

"어흥! 이놈 안 되겠구나. 잡아먹어야겠다!"

아빠는 두 손을 호랑이 앞발처럼 치켜들고는 겁을 주었다.

"이놈아, 오봉산에 들어가면 호랑이로부터 살아나도 삼 년간 재수 없다."

"왜요? 왜요? 왜 그런대요?"

아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재차 물었다. 아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들아, 그곳은 사방에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엄한 산이라 아이는 한입에 먹히고 만다는구나. 다행히 죽지 않아도 삼 년간 하는 모든 일에 재수가 아주 없어진단다."

"아빠, 저렇게 조그만 곳에 호랑이가 많다고요? 친구가 그러는데 그건 어른들이 만든 거짓말이랬어요."

오봉산의 호랑이 이야기는, 또래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이 강 건너 남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어른들이 만든 거짓말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01_구미호

"세상에나! 벌건 핏덩이가 나를 이리도 유혹하는구먼!"

패수로 산책 나온 두 사내 중 덩치 큰 사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남쪽의 불그스레하게 피어난 꽃들로 인해 온 산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두 사내는 강 언덕에 대낮부터 자리를 깔고 앉아, 고기와 술을 먹고 마시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어허, 이 사람이 핏봉산 무서운 줄도 모르고 헛말을 하네. 핏봉산은 쳐다도 보면 안 된다고. 웃어른 말씀에 언제 간을 뺏길지 모른다며 쳐다도 보지 말라더군.”

목 대형이 태 대형에게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금기의 말로 겁을 주었다. 가을 단풍이 빨갛게 물들면 오봉산이 온통 붉은 핏덩이처럼 보인다고 하여 '핏봉산'이라 불리었다. 평양 사람들에게 그곳은 근처에도 가선 안 되는 금기시된 산이었다.

“에라, 살 만큼 산 놈이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걸 아직도 믿는 게야? 껄껄. 어릴 때부터 겁이 그리도 많더니, 너는 어째 나이 먹어서도 여전하구먼. 껄껄껄!”

태 대형은 목 대형보다 머리 한 개가 더 큰 키에, 우람한 덩치의 장군 같은 풍채를 갖춘 사내였다. 호랑이도 잡아본 적이 있었기에 스스로 간 큰 사내대장부라 자부했다.

"그건 그렇고, 내 평생 처음 들어본 소문이로구먼. 도깨비가 간을 빼간다는 건가? 대체 왜? 자네가 말한 이야기가 정말인 게야?"

태 대형은 소싯적에 도깨비나 귀신을 만나고 싶다며 혼자 떠돌아다닐 정도로 겁 없고 호기심이 강했다.

“맞다 말다! 술이 들어가 얼큰하니 기분이 좋으니, 집안 어른한테서 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줌세.”

목 대형은 취기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꺼낼 생각만으로도 무서웠는지, 태 대형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원래 저 산은 이름이 없는 그저 그런 언덕일 뿐이었다는군. 이곳에 조상님네가 처음 자리를 잡아 고구려 왕궁을 짓고, 다리를 만들었다는 건 자네도 나한테 들어서 잘 알 테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왕궁의 기틀이 잡힐 즈음에 불길한 소문 하나가 떠돌기 시작했다네, 밤마다 젊은 여자가 꼭 한 명씩...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거야. 어휴,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구먼.”

목 대형이 말하는 도중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휴, 이 겁보하고는. 자, 술 한잔 쭉 들이켜고 이야기를 이어보게. 젊은 여자를 누가 납치했을까? 그래서?”

태 대형이 목 대형 입에 자기 술잔을 갖다 대어 마시게 했다.

“벌컥벌컥! 그, 그만. 성질도 급하... 컥컥, 컥!”

목 대형의 입에서 마신 술의 절반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걸세!"

화난 얼굴의 목 대형이 소매로 입술을 닦은 후, 태 대형의 가슴을 툭 치며 짜증을 부렸다.

"킬킬, 장난쳐서 미안하네, 오랜 벗이자 소중한 친구여. 빨리 계속 이야기하게. 얼른, 궁금해 죽겠으니 뜸 들이지 말고."

태 대형이 목 대형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았다.

"보름이 되는 동안 밤마다 군사들이 길목마다 지켰으나, 지나다니는 그림자 하나 보지 못했다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네. 고운 옷을 입은 처녀가 대문에서 나와,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군사들이 목격했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다음날 마을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네. 그 집의 둘째 처녀가 옷이 전부 벗겨진 채로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쓰러져 있었으니, 싸우려 했던 모양이더군. 가슴에는 짐승 이빨 자국이 자욱하고 등에 구멍이 날 정도로 파 먹혔다네."

목 대형은 태 대형의 몸에서 전달되는 따스한 온기와 취기에 힘입어 술술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런데 말일세. 몸에 피 한 방울 없었다네. 더군다나 찢긴 가슴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내장을 꺼내 먹었는지, 몸속이 뼈만 빼고 텅텅 비어 있었다는 거야. 허허, 세상에나! 어찌 사람이 벌인 짓이라 할 수 있겠나? 그래서 평양의 모든 개를 긁어모아 골목마다 묶어두었다지.”

목 대형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오호! 도깨비가 벌인 일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이상하고. 미친 도깨비도 있을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니면 여우짓인가? 오, 맞나? 그럴싸한데. 아무튼 개를 배치한 건 잘한 게 맞네. 나라도 그렇게 명령했겠지.”

태 대형은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보게, 좀 더 들어보게. 개를 곳곳에 둔 이후로, 개가 짖어대면 군사들이 바로 달려갔고 집집이 불이 환해졌다네. 그러니 들키지 않을 수 없었겠지? 마침내 범인이 모습을 드러냈어. 개에 쫓겨 지붕 위로 도망가는 것을 몇몇 군사도 보았다고 하더군. 골목을 따라 수십 마리 개가 맹렬히 쫓아갔다네. 그 정도면 호랑이라도 거뜬히 잡고 말 숫자 아니겠나. 드디어 개들이 구석으로 내몰았지. 지붕 위로 붕붕 건너뛰던 놈이 실수한 건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거든. 가장 앞에서 달려가던 군사 하나가 막다른 골목에 도착했을 때는, 수십 마리 개가 빼곡하게 모여들어 겹겹이 싸고 물어 죽일 기세였다네. 얼핏 보기에도 아름다운 처녀가 긴 손톱을 세우고 싸울 기세였는데, 그걸 본 군사가 깜짝 놀라 개들을 물리치며 다가갔다네. 개가 처녀를 죽일까 걱정해서 한 행동이겠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다가가던 군사의 눈에는 웬 처녀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빙글빙글 돌더니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거야. 그때 얼핏 보았다더군. 여우 꼬리를…."

쉬지 않고 단숨에 이야기를 풀어내던 목 대형이 잠시 숨을 골랐다.

"오호라, 아무래도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로구먼. 그렇지 않나? 내 말이 맞지? 그렇지?"

태 대형은 긴장하여 목 대형 어깨에 걸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줄도 몰랐다.

"눈앞에서 본 군사는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라고 확신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꼭 분명하지는 않았는가 보더군. 막 도착한 군사마다 여섯 개라고도 하고, 누구는 일곱 개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여덟 개라고 하니 말이야. 그 후로도 본 이는 있었지만, 꼬리 개수가 그때마다 달랐다네. 죽은 처녀만도 열 명이 넘고, 다른 죽은 이까지 합치면 스무 명이 넘었다지. 그러니 평양이 발칵 뒤집히지 않았겠나? 군사만으로는 잡을 수가 없어 결국 도사를 불러 함께 잡으러 갔지. 도사가 다섯에 군사만도 백 명이 넘었다고 하더군. 구미호가 사라진 곳이 바로 저 핏봉산이라네. 그때는 여우산으로 부르던 곳이 도깨비산이 되고 지금의 오봉산이 된 게지."

목 대형의 이야기가 그렇게 마무리되려 했다.


※ 본 이미지는 구글 Gemini를 활용하였습니다.


"그 참 이상하군. 어찌 이런 중대한 이야기가 자네 집안에만 대대로 내려온단 말인가? 한둘이 본 것도 아닌데 말일세."

태 대형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이야기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물었다.

"백 명의 군사를 지휘한 게 윗대 젊은 조상이셨거든. 그분이 도깨비와 약속했다고도 하고, 몇 대가 지나면서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게 했다더군… 내 집안 조상님만 빼고 말이야. 내 비록 지금은 덩치가 자네보다 작지만, 우리 집안은 암, 그런 집안이라고!"

목 대형은 으스대듯 집안 자랑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으려 했다. 하지만 얼핏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망설임이 비쳤다.

"이봐, 이야기가 잘 나가다가 구미호에서 뜬금없이 도깨비가 나오고 싱겁게 끝나는 게 어디 있는가!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지? 나한테 숨기는 게 없더니, 서로서로 모든 걸 다 말하는 소중한 친구인 나한테! 얼른 말해보게!"

태 대형은 목 대형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재촉했다.

목 대형은 한참을 망설였다. 깊은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결국 결심한 듯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리 조상님께서 보시기에, 구미호의 복수심은 끝이 없었고, 그로 인해 평양 백성들의 공포는 극에 달해 도읍 전체가 무너질 판이었다네. 그때 도깨비가 나타나 '이 재앙의 기억을 모두에게서 지워주겠다. 대신 앞으로 누구도 이 산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계약하라'고 했다더군. 도읍의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게지."

목 대형은 그제야 집안의 오랜 비밀을 태 대형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비밀을 누설한 자기 모습이 한심하여, 그는 자책하듯 입술을 톡톡 때렸다.

"난 더 이상 모른다네. 정말 모른다네. 아, 내 입이 방정이여! 방정!"


02_도깨비산

평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동원되던 시기, 오봉산 밑에는 작은 마을이 들어섰다. 평양 시내에 거주할 수 없는 곤궁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 이름 없는 곳이었다. 한참 뒤, 시내에서 간이 사라진 채 죽은 사람들의 끔찍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으나, 평양 시내에 물건을 팔러 다니거나 일하러 나서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봉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깨비산'이라 불렀다. 산에 나무하러 올라가도 아무 일 없는, 그저 야트막하지만 나무는 빼곡한 평범한 산일 뿐이었다. 오히려 평양 시내에 일 년에도 서너 번씩 출몰하여 사람을 죽이고 난리를 치던 호랑이가 오봉산과 마을에는 단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이 평온함이야말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위안이자 자부심이었다.

"여보, 도깨비산에 나무하러 갔다 오겠소."

"아빠,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아빠 일하는 데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집에서 엄마를 돕거라."

아내의 엄한 말에도 아들은 풀이 죽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소. 아들, 심심하지? 아빠랑 도깨비산에 올라가자꾸나."


"여보쇼. 무섭지 않소? 어휴, 생각만 해도 팔에 소름이 돋는 것 좀 보게. 얼른얼른 장작이나 부엌에 갖다주쇼."

큰 기와집에서 나온 나이 든 하녀가 나무꾼을 보며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재촉했다. 아침 일찍부터 집집이 돌아다니며 나무를 파는 젊은 나무꾼은 오봉산에서 베어온 질 좋은 나무라며 자랑하고 있었다. 평양의 윗사람들은 쉬쉬거렸지만, 아랫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봉산 장작이 연기도 없이 잘 타서 은근히 많이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참말로 다 헛소문입니다요. 얼마나 살기 좋은걸요. 여기에 한 번씩 나타나는 호랑이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는걸요."

젊은 나무꾼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어허! 호랑이가 대수인가, 도깨비인지 여우인지… 아닐세, 못 들은 척하게."

나이 든 하녀는 말하다가 입을 꾹 다물더니, 얼른 부엌으로 장작을 지고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평양 시내 사람들은 오봉산 바로 밑 마을에 사는 사람을 만나면 몹시 무섭다는 듯 놀라워했다. 그러면서도 소문이 진짜인지 궁금해하며 이것저것 묻곤 했다.


마을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큰 일이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너무 평온한 곳이었다. 간혹 아침까지 술에 취해 길바닥에서 잠든 술꾼이 "어젯밤에 도깨비와 놀았다!"며 허튼소리를 하곤 했지만, 그건 고주망태가 된 못난 자신이 민망하여 떠든 말일 뿐이었다.

"형님, 어젯밤에 봤소? 봤냐고요. 못 봤죠?"

"뭘 봤냐는 거야? 대체 또 뭘 보고 이 호들갑을 떠는 건데."

"개울에서 첨벙첨벙 뛰어놀며 시끄럽게 노래하고 춤추던 도깨비를 봤냐고요?"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나이가 몇 살 적은 총각이 춤추는 도깨비 흉내를 내며 열을 올렸다.

"또 또 거짓말한다. 맨날 도깨비를 봤대! 고놈의 도깨비 좀 동생만 보지 말고 나도 좀 보자."

역시 장가를 못 간 노총각이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니라니까요! 어젯밤에 일찍 잠들었는데 글쎄 방바닥이 쿵쿵 울리더라고요. 그래서 마당에 나가 귀를 갖다 대고 울리는 곳으로 가보았잖소. 글쎄 키가 산보다 크더라니까!"

어린 총각이 깨금발로 서서 한 손을 머리 위로 높게 들어 올려 도깨비가 얼마나 컸는지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만 됐네! 아침부터 헛소리는 그만 됐고, 동생이 본 도깨비나 찾으러 산에 얼른 올라가세. 글피까지 팔 숯을 만들려면 나무를 많이 해와야 할 거야."

이 마을에서는 사람 다섯 중 한 명은 도깨비를 보았거나 만난 무용담을 자랑삼아 떠드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심심한 마을에서 그나마 도깨비에 얽힌 이야기가 은근히 자랑이 되는 셈이었다.


03_볼따구 영감

오물오물― 오물오물―

오봉산 밑 마을 외곽에 집이 있는 볼따구 영감은 늘 양쪽 볼을 쉬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는 양쪽 볼에 잘 익은 대추를 한 개씩 넣고 산에 땔감을 구하러 자주 올라갔다. 볼따구 영감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들 내외와 단칸방에 함께 자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워낙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매사에 마냥 태평하고 느긋했다.

"할멈, 내 산에 나무하러 갔다 오겠네."

"그러시구려. 이왕이면 좀 많이 해오시구려."

볼따구 영감은 해가 좋은 날 도깨비산에 오르면 평소보다 흥이 쉽게 오르는 듯했다. 그는 노래를 되는대로 크게 부르곤 했다.

"이래어도기부운니조흐구.. 저래도기브니조오구 기부니.."

양쪽 볼의 대추 두 개로 인해 안 그래도 앞니 두 개가 빠진 볼따구 영감의 노래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어눌하게 들렸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흥이 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이, 앞에 노래하는 영감!"

여우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호랑이 털 상의에 곰 털 바지를 입은, 매우 큰 덩치의 사내가 산에 오르던 볼따구 영감을 불러 세웠다. 그의 범상치 않은 외모는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무... 무스니리... 요...?"

볼따구 영감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사내의 모습에 흠칫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세상에 모르는 노래가 없는 줄 알았건만, 껄껄, 내가 처음 듣는 노래가 다 있다니. 껄껄껄.”

덩치 큰 사내는 볼따구 영감의 얼굴 가까이 커다란 눈을 붙이고는, 이리저리 콧대의 모양과 콧구멍, 입 구멍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노래하는 영감, 참 신기한 노래요.”

그 호기심 가득한 시선은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탐색하는 듯했다.

"뭐... 뭘으으 그러케 보느으거시오."

덩치 큰 사내의 행동이 불쾌할 수도 있었지만, 순수한 듯 보이는 그의 호기심이 내심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볼따구 영감은 노래를 잘 부른다는 칭찬에 히죽거리며 웃었다. 입안 가득 고인 침이 입 밖으로 줄줄 흘러나오는 줄도 몰랐다.

킁! 킁! 킁!

침에서 달콤한 대추 향을 맡은 덩치 큰 사내는 더욱 호기심에 안달 나는 모양새였다.

"노래를 잘하는 비결이, 혹 입안에 들어있는 것이오?"

볼따구 영감의 볼록한 볼과 살짝 벌어진 입술을 바라보며 노래 비결을 물었다. 그 말에 볼따구 영감은 껍질이 녹아 통통 불어 알아볼 수 없는 대추 두 개를 앞니 빠진 자리에 두고는 헤벌쭉 웃어 보였다.

"하루가 기부니조으고.. 노라도조으구.."

노래 실력을 뽐내고 싶었는지, 입술을 오므리고 다시 노래를 불렀다. 마침 수그리고 있던 덩치 큰 사내의 얼굴에 굵은 침이 튀고 말았다.

"아, 갖고 싶다! 갖고 싶어. 저 노래 잘하는 비결을!"

덩치 큰 사내는 간절한 눈망울로 깜빡거리며, 볼따구 영감에게 들으라는 듯 애달프게 중얼거렸다.

"노래하는 영감, 내가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입에 있는 노래 잘하는 비결을 여우 털로 만든 내 모자와 바꾸지 않겠나?"

덩치 큰 사내가 모자를 벗어 볼따구 영감 앞에 내밀었다.

"무려 꼬리 아홉인 여우 털로 만든 모자라네. 쓸모가 아주 많을 걸세."

누리끼리한 여우 꼬리털이 여러 개 둘러 만들어진 털모자는 생각보다 훨씬 윤기가 흘렀다.

"그으미호터로 마드는 모자라구요?"

볼따구 영감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여… 여기… 노래하느으거시이이… 여기이소이다…"

볼따구 영감은 냉큼 입안에 있던 통통 불은 대추 두 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오라, 이게 노래를 잘하는 그 진기한 보물이로구나! 오오…!"

그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영감 입속에서 침에 불어버린 대추를 손에 들고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노래하는 영감, 옜네! 머리에 잘 맞는지 어디 보자고."

머리카락이 몇 올 남지 않은 볼따구 영감의 반짝이는 대머리에 모자를 씌워주었다.


※ 본 이미지는 구글 Gemini를 활용하였습니다.


"어어, 이거 너무 크지 않나....?"

모자에 푹 파묻혀 앞이 보이지 않던 영감이 혼잣말했다.

"줄어들어라, 줄어들어라, 에헤 요. 구미호야, 줄어들지 않으면, 에헤 요.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에헤 리요, 에헤 리요."

너무 큰 모자에 파묻혀 앞이 보이지 않는 볼따구 영감 앞에 선 덩치 큰 사내가 골목에서 아이들이 놀 듯, 흥얼거리는 노랫말을 읊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모자가 스르르 오그라들면서 볼따구 영감의 머리에 딱 들어맞게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오호라! 오랜만에 사람과 계약하는구나!"

그는 바지 안쪽에 손을 넣고 뭔가를 찾는 듯 뒤적거렸다. 곧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보랏빛과 붉은빛이 감도는 보자기를 꺼내더니, 불어 터진 대추 두 개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홉! 호홉! 홉홉! 호홉! 호홉! 홉홉!"

그가 보자기에 입을 댄 채 연신 '홉 홉' 소리를 외치며 짧게 숨을 불어넣었다. 볼따구 영감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몹시 궁금했다. 단물이 전부 빠지고 침에 통통 불어 누가 보더라도 더러울 수밖에 없는 대추로 무얼 하려는 지, 영감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짜잔-!"

덩치 큰 사내가 신나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보자기를 펼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어 터진 대추 두 알은 온데간데없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롱한 옥구슬 두 개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옹...? 저 저, 진기하게 생긴 옥구슬은 뭐지...?'

볼따구 영감은 마치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대낮인데 설마 저 사내가 도깨비는 아니겠지? 이렇게 해가 쨍쨍한데, 설마?'

알 수 없는 기이함에 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덩치 큰 사내가 구멍이 숭숭 뚫린 옥구슬 두 개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빨아댔다. 그러고는 휘파람을 불려는 듯 입을 오므리고 숨을 내쉬었다.

휘리리-링 휘링 휘링 휘리리- 휘리리-링, 휘파람보다 훨씬 맑고 영롱한 소리가 옥구슬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아름다웠다.

"오호! 좋구나, 몹시나 좋아!"

소리가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표정은 잔뜩 들떠 불그레했다.

"노래하는 영감!"

그가 난데없이 모자를 쓴 볼따구 영감의 머리를 툭툭 쳤다.

"구미호 모자는 남 주면 절대! 절대! 절대 안 돼! 알았지? 내 말을 꼭꼭 알아들었겠지? 그래, 이제 난 모른다. 저 간사한 여우 놈들은 털가죽조차 요물이라, 어설픈 놈이 다루면 큰일이 나지. 껄껄. 영감처럼 순박한 양반이니 내가 주는 게야."

절대 깨서는 안 되는 금기라도 되는 양, 그의 말은 볼따구 영감의 마음속 깊이 뚜렷하게 각인되는 듯했다.

"구미호 모자는 영감만 쓰는 거야. 내 분명 말했다!"

비록 장난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깔려 있었다.

"구미호 모자는 노래하는 영감만 쓰는 거라는 걸 잊으면 안 돼. 남이 쓰면... 그 대가가... 따른다는... 걸...."

다짐을 받듯이 말하는 도중에 덩치 큰 사내가 볼따구 영감의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볼따구 영감은 대낮부터 도깨비에 홀린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해 질 때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 있었다.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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