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풍 대형
“아니, 이 더위에 지금까지 뭘 하다 나무 하나 없이 빈손으로 집에 온 거요!”
빈손으로 돌아온 볼따구 영감을 보고 할멈이 불같이 화를 냈다.
“머리카락 몇 올 없는 사람이 자꾸 긁으면 어쩌려고 그러오! 가려우면 모자를 벗으면 될 것을, 내 눈에 보기 에 꼴도 보기 싫으니 그만 좀 긁어요!”
그러지 않아도 찜통 같은 날씨에 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온 영감이 머리를 자꾸 벅벅 긁어대자, 할멈은 결국 짜증을 참지 못했다. 할멈은 냅다 영감의 모자를 잡아채어 마당에 휙 던져버리고 말았다.
“할멈, 내가 언제 집에 왔는가?”
볼따구 영감은 자신이 언제 집에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의 눈은 아직도 무언가에 홀린 듯 초점을 잃고 있었다.
“에구머니나, 여.. 영감... 머리에.. 터.. 털이....”
할멈은 정신 못 차리는 영감보다 그의 머리를 보고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몇 올 남지 않았던 대머리에, 잡초처럼 억세고 까만 머리털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던 것이다. 마치 밤새 땅을 파고 돋아난 새싹들 같았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일었다.
처음에는 영감이 쓰고 온 모자가 구미호 털로 만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신기해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시큰둥한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쯧쯧, 구미호 모자는 무슨. 털 색깔 보니 딱 족제비 털이구먼.”
그러나 의심은 영감이 모자를 벗자마자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아니, 이럴 수가! 벌건 대머리에 정말로 머리털이 숲처럼 수북하게 났네!"
영감의 풍성한 머리칼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여우 털로 만든 모자라는데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상황을 '도깨비장난'으로 해석했다.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자네가 도깨비장난에 놀아난 게 분명하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하네!”
“도깨비가 대머리라고 장난을 쳤나 본데, 조만간 놀려대며 머리털을 모조리 뽑아갈지도 모르잖는가.”
겉으로는 영감이 화를 당할까 봐 걱정하는 척하거나 혹은 놀려댔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영감의 풍성한 머리털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시샘과 부러움이 가득했다.
“영감, 잘 때는 모자를 벗어야지 뭐 하는 거요?”
“안 돼! 꼭 쓰고 자야 한다고.”
볼따구 영감은 대머리를 빼곡하게 채운 머리털이 너무 좋아 잠잘 때도 털모자를 벗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볼따구 영감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젊은 아들 내외는 패수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전날 밤에 친 그물을 올리는 도중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떠내려오던 아이를 우연히 구해주었다. 평양 시내에서도 매우 부자였던 아이 부모는 많은 돈으로 후하게 보답했다.
단칸방에서 자던 영감 내외와 아들 내외가 방 세 개짜리 큰 집으로 이사했다. 영감 내외와 다른 방에서 자게 된 아들 내외가 곧 아이를 갖게 되자, 부러움과 시기하는 많은 눈이 볼따구 영감을 주시하며 따라다녔다.
“그 소문 들어보았나? 오봉산 밑의 마을에서 도깨비가 할아버지에게 도깨비장난을 쳤다는 소문 말일세.”
“아, 그 소문! 나도 들었지. 대머리 영감의 대머리에 머리털이 시커멓게 났다는 소문 말이지?”
“맞아. 도깨비가 진짜로 있긴 한가 봐. 진짜인지 보고 싶은데 어디 구경하러 가지 않을 텐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먼. 그 마을에.... 그걸 보러 간다고? 자네, 미쳤나?”
“자네나 나나 머리털이 자꾸 빠지는 게 조만간 대머리가 될 팔자 아닌가. 둘이 함께 구경 가보세.”
도깨비장난에 대한 소문이 점점 부풀려지면서 오봉산 밑의 작은 마을을 벗어나 평양 시내까지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네놈이 도깨비장난으로 벌거벗은 대머리에 머리털이 수북하게 났다는 소문의 그 도깨비 영감이냐?”
평소 대머리 때문에 속앓이가 심했던, 돈이 넘쳐 흐르는 부유한 풍 대형이 건장한 하인 다섯을 거느리고 볼따구 영감이 사는 누추한 마을로 직접 찾아왔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영감을 굽어보며 호통쳤다.
“네? 전 도깨비 영감이 아닙니다만.... 무슨 일로 누추한 이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요?”
볼따구 영감은 마당으로 불쑥 말을 타고 들어온 풍 대형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놈이 쓰고 있는 그 도깨비 모자를 써보고 싶어 왔느니라! 이리 가지고 오너라.”
풍 대형은 몹시 거만하게 명령했다. 볼따구 영감을 파리 보듯 하찮게 여기는 태도였다.
“네..에? 무슨 그런 말씀을... 아,안 됩니다요! 이 모자는 다른 사람이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 받은 모자입니다. 절대 남에게 줄 수 없는 물건입니다. 남이 쓰면 큰일이 나고 맙니다!”
볼따구 영감은 화들짝 놀라며 안된다고 하소연했다. 도깨비에게 들었던 섬뜩한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쓰고 싶다는데 웬 말이 이리도 많으냐! 당장 모자를 벗지 않고 뭘 하느냐! 이놈! 당장 내놓지 못할까!”
풍 대형이 호통치며 쓰고 있던 관모를 벗었다. 그의 이마부터 뒤통수까지가 햇빛에 반짝거려 눈부실 지경이었다.
“도.. 도.. 깨비가.. 절..대로... 안 된.. 다고.. 했습니.. 다요.”
볼따구 영감은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면서도, 풍 대형의 위압적인 태도에 결국 모자를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에 꼭 맞는 게 딱, 내 것이구나. 흐흐, 흐.”
풍 대형은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자신의 대머리에 깊숙이 눌러 썼다. 그는 마치 자기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봐라. 도깨비 영감에게 모자값을 넉넉히 주거라.”
풍 대형은 마음이 흡족하여 목소리에 자신이 넘쳤다. 그는 볼따구 영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돈을 던지게 하는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였다.
황망해하는 볼따구 영감 따위는 풍 대형의 안중에 없었다. 그는 새로 얻은 모자를 쓴 채 유유히 말을 돌려 마을을 떠나 버렸다.
※ 본 이미지는 구글 Gemini와 Microsoft Copilot를 활용하였습니다.
풍 대형이 말을 타고 떠나자마자, 볼따구 영감의 머리카락은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다시 원래의 붉은 대머리로 돌아왔다.
영감은 허망함보다 큰 골칫덩이를 넘겼다는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풍 대형이 던져주고 간 돈 꾸러미를 줍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다른 사람이 쓰면 큰일이 난다'던 도깨비의 경고만이 맴돌았다.
05 _털
“에취! 에취! 에취! 에... 에취―!”
연신 재채기를 터뜨리며 집으로 향하던 풍 대형은 모자에 달린 여우 꼬리털을 계속해서 어루만졌다. 털이 콧구멍을 간질였지만, 대머리에 머리털만 날 수 있다면 이 사소한 기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부인, 구미호 털로 만든 도깨비 모자를 드디어 손에 넣었소! 하하하!”
풍 대형은 대문까지 마중 나온 부인에게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모자를 자랑했다.
“이게 바로 소문으로 자자하던 도깨비 모자요. 말로만 듣던 구미호의 꼬리털이 아니겠소. 흐흐, 흐....”
두 손으로 모자를 받치듯 부인 앞에 선 그의 표정은 마치 세상의 보물을 독차지한 사람처럼 희색이 만연했다.
“여보, 정말로 그 도깨비 모자란 말인가요?”
하얗게 센 부인의 머리숱은 듬성듬성하여 두피가 잘 보일 정도였다. 부인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탐욕스러운 눈을 반짝이며 팔을 내밀었다.
“맞을 뿐이겠소? 이 모자가 바로 구미호 꼬리털이요!”
남편이 한 손으로 모자의 윗부분에 삐죽 솟은 꼬리털을 만지작거리며 자랑했다.
“여보, 여보. 저도 만져 보고 싶습니다.”
부인은 남편의 모자를 향해 폴짝폴짝 뛰며 손을 뻗쳤다.
“만져 보는 게 어디 대수겠소. 자, 마음껏 만져 보시구려.”
머리숱 때문에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던 부인의 마음을 알았기에, 남편은 고개를 숙여 모자를 만질 수 있게 했다.
“서방님 꼬리! 서방님 꼬리!”
부인이 모자의 털을 만지작거리면서 평소와 다르게 섬뜩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남편이 쓰고 있는 모자를 확 낚아채듯 뺏어 자신의 머리에 쓰고는 안방으로 도망을 쳤다.
“부인!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오...!”
안방으로 따라 들어간 남편은 뺏긴 모자를 되찾기 위해 부인과 격렬한 실랑이를 벌였다. 모자를 뺏기지 않으려는 부인과 뺏으려는 남편이 뒹굴다가, 결국 모자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에, 에취!!”
때마침 콧구멍이 간지러워진 남편이 크게 재채기했다.
“딸꾹! 딸꾹!”
이번에는 남편의 기침 소리에 놀란 부인이 경련하듯 딸꾹질했다.
“여, 여보. 딸꾹! 코... 코에서 털이... 딸꾹! 기다란 털이.... 딸꾹!”
딸꾹질로 인해 겨우 정신을 차린 부인이 남편의 콧구멍을 보고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남편 콧구멍에서 삐져나온 검은 털 뭉치가 이미 아랫입술에 닿아 축 늘어져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남편이 손가락으로 입술 주변을 더듬자, 콧구멍에서 삐져나온 털이 어느새 아랫입술을 넘어 길게 자라나 있었다.
“어허, 이게 무슨 도깨비 조화란 말인가! 밖에 누구 있느냐? 빨리 가위를 갖고 오너라!”
부부는 도깨비에게 홀렸다고 생각했지만, 모자를 만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마침, 밖에 있던 하인이 급히 가위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부인, 코털을 조심해서 잘 잘라주시구려.”
남편이 부인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서는 콧구멍에서 삐져나온 털을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거참 이상하네. 부인 턱에 시커먼 수염이 잔뜩 자란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눈이 침침해서 헛것을 보는구먼.”
무릎에 누운 채로 부인 얼굴을 올려보던 남편이 대수롭지 않게 혼잣말했다.
“에구머니! 이게 뭔 일이람!”
남편 말에 무심코 턱을 만지던 부인이 꺼칠한 턱수염의 감촉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다, 당장! 도깨비 모자를 버.. 버려야겠소!”
남편이 놀라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는 공포에 질려 정신없이 우왕좌왕했다. 차마 손으로 만지지는 못하고, 등긁이로 모자를 들어 마당에 던져버렸다.
그 일이 있고부터 열하루가 지났으나, 남편의 코털은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 문턱을 기어 다닐 지경이었다. 아내의 턱수염 또한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 덥수룩한 몰골이 되었다. 탐욕의 대가를 털로 치르는 부부가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도 벌써 열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 본 이미지는 구글 Gemini를 활용하였습니다.
부부는 혹시라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몰골을 알게 될까 두려워 아예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숨으려 해도,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는 남편의 코털과 부인의 턱수염에 대한 소문은 이미 평양 시내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돈 많고 거만했던 풍 대형 부자가 도깨비 장난에 놀아났다는 이야기는 금세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풍 대형의 으리으리한 집 주변에는 코털과 턱수염을 단 한 번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던 평양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매일이 장날처럼 붐볐고, 집 대문 앞은 연일 시끄러운 잔치판이었다.
“엿 먹어시오!― 엿을 먹어시오!―”
엿장수의 엿을 파는 우렁찬 목소리는 온종일 담을 넘어 안방에까지 들렸다. '엿 먹어라'는 조롱 섞인 외침은 그러지 않아도 비탄에 잠긴 부부의 심기를 매일 건드리며 그들을 괴롭게 했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네, 쇤네 여기 있습니다.”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엿장수 놈이 ‘엿 먹어라’라는 말을 더 이상 못 하게 입을 당장 꿰매거라!”
분노한 풍 대형이 호통쳤으나, 하인들은 그저 난감해할 뿐이었다.
싹둑싹둑! 싹둑싹둑!
나란히 누운 부부 옆에 하녀 두 명이 달라붙었다. 한 명은 남편의 마르지 않는 코털을 잘랐고, 다른 한 명은 부인의 맹렬한 턱수염을 잘랐다. 잠을 포기한 하녀들은 털을 자르고 또 잘랐지만, 털은 마치 물속에서 돋아나는 해초처럼 금세 자라날 뿐이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라치면, 남편의 코털은 이미 가슴까지 길게 자라 있었고, 부인의 턱수염은 배꼽에 닿을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어이쿠! 부인, 걱정이오. 이 일로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남편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푹푹 쉬며 절망했다.
“평양 시내 사람 모두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찌 앞으로 얼굴을 들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흑. 흑. 이대로 죽는 게 낫겠어요....”
부인은 말하다가 서러움에 북받쳤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밤에도 털은 멈추지 않고 자랐다. 잠 대신 졸음과 싸우며 털을 깎는 하녀들이나, 깎이는 내내 불안에 시달리는 부부나, 그들에게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06_여인
밤이 깊어졌다. 풍 대형 부부가 코털과 턱수염을 자르느라 지쳐 잠시 눈을 붙이려 할 때였다.
“어르신, 밤중에 죄송합니다만 주무시는지요?”
방문 밖에서 하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풍 대형의 목소리에는 수염을 깎아도 끝이 없다는 절망 때문에 기력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
“밤중에 웬 여인이 찾아와, 도깨비 모자 때문에 생긴 털을 없애준다면서 꼭 뵙게 해달라 합니다.”
“뭣이라고? 그게 사실이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부는 자신들의 무성한 털을 양손에 받쳐 들고 부리나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흰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긴 머리카락을 거의 땅에 끌릴 정도로 풀어 헤치고 서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섬뜩한 기운이 감도는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두 분께선 그 모자로 인해 아주 힘드셨을 겁니다.”
꼿꼿이 선 여인은 부부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도 웃음기 없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네. 자네가 어떻게 이 털을 없앨 방법이 있겠는가?”
부인이 턱수염을 주섬주섬 챙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원하듯 물었다.
“그 모자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알겠네. 여봐라. 궤짝에 넣어둔 모자를 당장 갖고 오거라!”
풍 대형이 하인에게 명령했다. 달려온 하인이 보자기에 싸인 모자를 들고 오자, 풍 대형은 여인에게 주라고 손가락질했다.
“내 서방님, 내 서방님....”
보자기를 풀어 모자를 손에 든 여인은 겁도 없이 모자의 털을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이보게, 털을 그렇게 만지면 자네도 큰일 나네.”
부인이 그 모습에 의아하면서도 여인을 걱정했다.
흑흑.. 흑... 흑 흑 흑...
여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얼굴을 모자에 파묻은 채 서럽게 눈물만 흘렸다.
“갑자기 왜 우는 건가? 이 도깨비 모자에 사연이 있는 건가?”
부인이 조바심을 누르며 물었다.
“도깨비 이놈을 내... 흐흑..흑. 소금과 가위를 준비해 주세요.”
여인이 여전히 울면서 소금과 가위를 달라고 했다.
“알겠네. 에취! 여봐라, 집에 있는 소금을 모두 갖고 오거라.”
코털을 손에 받친 풍 대형이 하인에게 지시한 후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가슴에 모자를 품은 여인이 방문 앞에서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자, 뒤에 서 있던 부인이 등을 밀었다. 그러나 여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끙끙, 자네 안 들어가고 뭐 하는 건가?”
부인이 밀어도 들어가지 않자 여인에게 물었다.
“방에 초대해 주세요.”
“알겠네. 자네를 안방에 초대하니 어서 들어가게.”
여인의 말에 부인이 뒤에서 방으로 초대했으나, 여인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 말고! 네가 초대해라!”
여인의 싸늘한 말에 소름 돋은 풍 대형이 얼떨결에 방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어, 어서.. 들어오시게나....”
“자네가 말한 것을 모두 준비했네. 제발 우리 두 사람의 털을 없애주게. 내 뭐든지 자네 소원을 들어주겠네.”
풍 대형이 엉거주춤 서서 여인에게 부탁했다. 여인이 말한 소금이 소복한 그릇과 가위가 방 한가운데 준비되었다.
“서방님... 곧 구해주겠소....”
여인이 모자 안쪽을 꼼꼼히 살피더니, 소금을 한 줌 쥐어 그곳을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다.
“으악―!”
여인의 비명과 동시에 손에 들린 모자가 천장으로 휙 날리면서, 소금이 사방에 흩날렸다. 여인 또한 날아가, 벽에 걸린 호랑이 가죽에 세게 처박히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 괘.. 괜찮은 건가?”
풍 대형은 난데없는 난리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여, 여.... 우...!”
벽에 세게 부딪힌 여인이 걱정되어 다가간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혼절했다. 여인의 얼굴이 이미 짐승처럼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휙! 휙! 휘리릭!
흰옷을 걸친 여우가 세 번 방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꼬리가 무려 일곱 개였다.
애매모호하게 사람 모습으로 되돌아온 여인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풍 대형을 노려보았다. 소금으로 모자를 문지르면서 도깨비 털로 만든 실에 손이 닿아 여우의 둔갑술이 풀려버린 것이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풍 대형은 여우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방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로 싹싹 빌었다.
“서방님을 죽인, 죽일 놈의 도깨비!”
여우가 방에 떨어진 모자를 보며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버럭 냈다.
뿌득뿌득!
“저년을 당장 깨워라!”
이를 뿌드득 갈던 여우가 남편에게 부인을 깨우라고 명령했다.
“이년아 뭐 하고 있느냐! 당장에 가위로 실을 자르지 않고!”
깨어난 부인에게 모자 안쪽의 실을 자르라고 명령했다.
부인은 두려움에 오줌을 싸고 말았으나, 경황이 없어 알지 못했다. 여우에게 엉금엉금 기어가서 모자 안쪽의 실을 자르는 것만도 벅차했다.
“실을 잘랐으면, 멍청히 있지 말고 당장 뽑아내거라!”
“주.. 죽을죄를.. 죄.. 죄송..합니.... 다.. 당장.. 뽑겠.. 습니..다....”
부인이 덜덜 떨면서도 용케 실을 뽑아내자, ‘포옹’하는 소리와 함께 모자는 아홉 개 꼬리가 달린 구미호의 털가죽으로 바뀌어 방안에 날아다녔다.
“내 너희에겐 원한이 없으니 그냥 가겠다!”
“내가 너희를 살려준 것에 평생 감사해하면서 살아라!”
서방의 털가죽을 손에 쥔 여우가 부부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털가죽을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이후로 풍 대형은 방에서 자지 못했다. 아무리 추워도 마루에서 잠을 잤는데, 마당에 개 다섯 마리를 풀어 놓았다. 부인은 아예 짐을 싸서 친정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07_영감님의 대추
여우가 떠난 다음 날, 정신을 차린 부부가 털을 잘라내자 남편의 코털과 부인의 턱수염은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았다. 저주는 풀렸지만, 평양 시내에 퍼진 구미호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은 하루 만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소문이 퍼진 이후로 평양 시내의 그 누구도 여우 털로 만든 모자나 옷을 절대 사지도 입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혹여나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가진 모자나 옷을 절에 바치며 안녕을 빌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평양에서는 혹시라도 흰여우를 보게 되면, 허리를 굽히고 세 번 애원한 후 뒤를 보지 않고 급히 자리를 뜨는 전통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풍 대형 부부는 안방 마당에 여우상을 만들어 밤마다 음식을 정성스레 올리고 빌었다.
“여우님,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들은 공포 속에서 신앙을 얻은 듯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풍 대형의 으리으리했던 집은 재산이 탕진되고 황폐해져 제대로 된 기와 한 장 남지 않고 무너져 사라졌지만, 그들이 만든 여우상만은 덩그러니 남았다. 탐욕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조악한 제단뿐이었다.
어느 날 그 여우상 앞을 볼따구 영감이 지나갔다. 영감은 여우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품에서 주섬주섬 대추 한 알을 꺼내 상 앞에 조용히 놓았다.
“허허, 노래 잘하는 비결이 여기 있었구먼요.”
볼따구 영감은 그저 허허 웃으며 제 갈 길을 갔다. 그때부터 대추를 여우상 앞에 바치는 풍습이 생겼다.
'여우상을 보았다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반드시 먹을거리를 조금이라도 떼어 바쳐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삼 년 동안 재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졌다.
“겁도 없구먼. 여우상을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가면 삼 년 동안 재수 없는데, 허, 내 말을 우습게 여기다니 난 모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