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어떤 계약
첫 번째 이야기였던 <볼따구 영감의 대추>가 게시된 지 일주일. 조회수는 고작 3회였다.
"휴―!"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잘 됐어. 주목받지 못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올렸으니 내가 할 일은 끝난 거야.'
사람들이 무관심하면, '그것'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기 합리화와 근거 없는 기대를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곧 섬뜩하고 생생한 통증으로 돌아왔다. 위장 깊숙한 곳에서 예리한 칼로 살점이 도려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살모사가 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역겹고 더러운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난 뭘 기대했던 거지? 잊으면 끝인 줄 알았어? 꿈이 아니란 걸 알잖아! 제발 정신 차려!"
자신을 비웃으며 검지 두 마디를 입에 넣고 꽉 깨물었다.
"앗!" 찌릿한 고통이 오히려 각성제가 되었다. 나는 급히 노트북 앞에 앉아 텅 빈 화면을 응시했다. 마치 백지 앞에 선 작가처럼, 이야기가 터져 나오길 바라며 텅 빈 머릿속으로 우주를 유영했다.
'어쩌지.... 못 쓰면, 이 통증이 계속 나를 갉아먹을 거야. 나는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건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공포는 이제 완전히 표면까지 떠올라, 시퍼런 입을 벌리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국밥이 뜨끈하니, 불편했던 속이 확 뚫리는 것 같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원들을 향해 애써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불안하게 떨렸다.
"부장님, 역시 '향 국밥' 집이 최고죠! 다음엔 제가 찾은 국밥집으로 모실 기회를 주십시오."
박 대리가 잔망스럽게 '△' 버튼을 연거푸 누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말이 끝마칠 때 즈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그 좁고 밀폐된 공간으로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뒤로 비집고 들어가려던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구역질이 목구멍을 뚫고 치솟아 올라왔다.
"웩―!"
촉촉하고 시뻘건, 피 묻은 살점 덩어리 한 개가 엘리베이터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뭐지? 이건, 내 위장의 살점인가?'
"부장님, 괜찮으세요. 드신 고기에 상한 게 있었나 보네요."
놀란 박 대리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에게는 그저 토사물로 보였을 것이다.
'상했다고? 이건 상한 게 아니야! 핏줄이 선명한 연분홍의 생살이잖아! 제발, 제대로 보란 말이야!'
기찻길에서 보았던 그 섬뜩한 살점이,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처럼 눈앞에 다시 보였다. 이번에 떨어진 것은 명백히 자신의 일부였다. 막연했던 공포가 뇌리를 가르며, 기어 나와 비로소 실체를 가졌다.
'그렇구나! 그때 그건 계약이었지. 내가 '살아남는' 대가로, 쉰여섯 살까지 '도깨비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거였어. 이야기가 늦어지거나, 주목받지 못하면,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거야! 약속된 '그때'가 결국 오고만 거야!'
나는 입에서 줄줄 떨어지는 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백하게 굳은 채 바닥의 내 살점만을 응시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했던 경계가 무너지는 찰나였다.
“헉.. 헉 헉헉...”
꿈에서 깨어난 나는 키보드를 쉬지 않고 쳤다. 잊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빠르게 독수리타법으로 두드렸다. 100m를 달린 아이처럼 나의 숨은 심하게 거칠어졌다.
나는....
살점을 본 이후로 떠오른 두 번째 이야기를 쓰는 중이다. 모두가 잠든 밤에, 집 안에 환하게 불을 밝힌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내 몸 전체에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이야기가 고려 문종 19년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정확히 알았다. 눈앞에 '고려 문종 19년'이라는 글자가 2초 정도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것이다. 이내 예성강을 따라 외국 선박들이 오고 가는 화려한 모습이 잠시 스치더니, 온통 주변이 깜깜해졌다. 짙은 어둠을 헤치고 반짝거리는 배가 안개를 헤치고 나타났다. 나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빠르게 다가오는 배 선미를 마주하고 있었다.
낯선 외국에서 첫 아침을 맞이한 부리부리한 코의 아라비아 상인이 맨발로 모래 위를 걷고 있었다. 고향 사막의 모래와는 감촉이 아주 달랐다. 모래가 굵고 거칠어서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그는 짙은 안개 덕분에 신비한 나라 고려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햇살이 따스해지자, 안개가 서서히 물러났다. 희미하게 무언가가 띄엄띄엄 보이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다가가자, 발에 물컹한 것이 밟혔다.
“아악, 사… 사람이 죽었다!”
아라비아 상인은 기겁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모래사장으로 걸어오는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쳤지만, 그들은 못 본 척 무심코 상인을 지나쳐 갔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면서 드러난 모래사장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마치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정신 차려, 정신!”
노인이 죽은 듯한 중년 사내의 뺨을 툭툭 쳤다.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중년의 여자는 부드러운 말투로 쓰러진 여인을 흔들었다.
그러자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었다. 노인부터 젊은 사내까지, 모래사장에서 노숙한 것도 모자라 웃통을 벗은 이, 여전히 술에 취한 이 등 모습은 다양했다.
“어휴, 결국 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구나.”
깨어난 젊은 사내는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닦으며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여기는 대체 어디요? 나는 아직 보여줄 검술이 더 있는데…”
웃통을 벗은 젊은 사내의 허리에는 칼이 다섯 자루나 있었다. 그는 억울한 표정을 한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의 출중한 검술이 밤새 제대로 펼쳐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 웃옷이 어디 갔지?”
옆에서 술에 취한 이들이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쓰러져 있던 아리따운 아가씨가 일어나자마자 옷매무새를 고치지도 않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옷을 입은 채로 오줌을 쌌는지 지린내가 날렸다. 이들은 모두 밤의 유흥에 젖어버린 자들이었다. 끝까지 남지 못하고 쫓겨나 버린....
01_주막배
달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밤이면, 예성강을 따라 무역항 벽란도까지 주막배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개경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졌다.
적어도 길이가 열다섯 척이 넘는 거대한 배 위에 주막이 서 있으며, 그곳에서는 돈이 아닌 오직 재주 있는 손님만을 받는다는 기묘한 소문이었다. 나루터에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배에 타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는데, 그 소문을 듣고 온 거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밤새도록 기꺼이 취할 수 있다는 소문에 놀고 싶어 왔답니다.”
앞뒤로 선 두 사람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안개가 강을 집어삼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 위에 주막이 있다는 소문은 왠지 헛소문인 것 같은데.”
“더 기다리면 ‘호랑이 나올 시간’이다! 배가 오긴 오는 거야!”
“그만 집에 가자!”
기다림에 지친 구경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저기 초롱이 보인다!”
안개 사이로 붉은 초롱을 밝힌 거대한 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와―! 모든 구경꾼이 손뼉을 치면서 함성을 질렀다. 그 순간, 주변의 개들이 꼬리를 감추고 엉거주춤 숨기 바빴다.
나루터에 닿은 배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고, 주막은 끝 모르게 높았다. 초롱 빛이 팔 층 높이까지 붉게 스며들어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그때 안개를 옷처럼 두른 듯, 새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소리 없이 뱃머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리따웠으나 묘한 서늘함이 감돌았다.
“배는 예성강을 흘러 벽란도까지 간답니다. 지금부터 재주 있는 손님을 받겠으니 한 분씩 나오세요.”
“자, 이 정도 돈이면 어떠신가?”
하인 셋을 거느린 양반은 부채를 펼치며 거만하게 말했다. 하인이 상자를 여니 돈 꾸러미가 가득하였다.
“당신의 돈에서는 아무런 이야기나 즐거움도 느껴지지 않는군요. 돈보다 나은 재주는 없으시오?”
“작단 말이지? 돈을 더 보여주거라!”
여인의 말에 양반이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두 하인이 상자를 열자, 상자 속 돈의 가치가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가득했다.
“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음!”
여인의 단호한 말에 양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양반이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때마침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땡중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나요! 나요!”
땡중이 손을 들고 폴짝 뛰며 여인 앞에 섰다. 여인은 땡중 얼굴 가까이 초롱을 갖다 대고는 물었다.
“스님, 무슨 재주가 있으신가요?”
“내 배를 보시오! 술이 한없이 들어가는 배요!”
옷을 올려 배를 드러내더니, 손으로 퉁퉁 소리가 나게 쳤다.
“호오, 술배군요.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다음 손님!”
“자… 잠깐만!”
땡중이 다급히 여인을 붙잡고는 등짐에서 먹통과 붓을 꺼내 들었다.
“내가! 내가! 고려 최고의 잉어를 그리는 화가요!”
“호오, 그래요? 그럼, 이 천에 잉어를 그려보세요.”
땡중이 바닥에 천을 놓고는 잉어를 그렸다. 화려한 손놀림과 함께 물 위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듯한 잉어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보기에 어… 어떠시오?”
천을 건네주며 간절한 눈망울로 여인을 바라보는 땡중이었다. 여인이 천의 그림에 길게 숨을 불어 넣은 후 공중에 털자, 천이 꿈틀거렸다.
포옹―!
그림 속의 잉어가 천을 뚫고 튀어 올라 공중에서 꼬리를 흔들더니 진짜 잉어처럼 강물로 뛰어들었다.
“우와―! 봤어? 봤냐고?” .
여인의 신통력에 구경꾼들이 흥분하여 난리를 쳤다.
“스님, 기대할 테니 재미없으면 안 돼요. 올라가세요.”
땡중은 신이 났던지 배에 오르면서 큰 소리로 노래했다.
“술배를 저어! 술술― 술배를 저어보자! 술술술.”
“술배로 노세! 술술― 술배로 놀아보자! 술! 술! 술―!”
“술배가 오른다! 다음 손님―!”
다음으로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른 아가씨가 삿갓을 벗으며 사람들을 밀치고 나왔다.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은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는 호기심에 여인이 든 초롱 가까이 입을 붙여 숨을 불었다.
마치 반딧불 무리가 모인 것처럼, 반짝이는 팔이 초롱에서 쑥 나오더니 아가씨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아가씨는 몸을 살짝 비틀어 그 팔이 어깨 위로 지나가게 한 후, 양 소매에서 꺼낸 쌍칼을 휘두르며 팔을 이리저리 갖고 노는 게 아닌가.
아가씨는 동작을 크게 하여 칼을 화려하게 휘둘러 아름다운 칼춤을 추었다.
창! 창! 창―! 창창!
칼에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부드러움과 강함을 다 갖춘 춤사위여서 구경꾼들은 넋을 잃고 구경했다. 칼 하나를 손에서 놓더니 발로 차서 높게 올린 후 다른 칼을 공중으로 차올렸다. 제기를 차듯이 두 칼을 가지고 노는 솜씨는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칼날이 부딪혀 나는 소리는 아가씨의 춤과 더불어 음악이 되어 구경꾼들의 흥을 돋웠다.
짝! 짝! 짝!
아름다운 여인이 먼저 손뼉을 치자 구경꾼들도 따라 힘차게 손뼉을 쳤다.
그녀는 떨어지는 칼 두 자루를 완벽하게 잡았다.
“재주꾼 아가씨, 당신의 재주를 더 보고 싶군요. 얼른 올라가세요.”
여인은 아가씨의 재주를 칭찬했다.
연신 거절당하는 와중에 몇몇 손님이 재주를 보여주고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여인은 초롱을 높이 들어 흔들면서 아리따운 목소리로 배의 출발을 알렸다.
“손님이 되지 못해 매우 아쉽네요. 여러분의 집으로 가는 밤길이 부디 편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