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5)
“까마귀 신님. 당신은 무엇 하나 무서울 것 없이 이 넓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시는데, 어찌하여 이리도 허름하고 작은 지붕 위에 머무시는 건가요? 변변한 먹을 것도, 편안한 잠자리도 없는 집인데…”
뱃사공 처녀는 누운 채로 어둠에 잠긴 천장을 향해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물론 저는 까마귀 신님께서 곁에 계셔 주어 이제 밤은 무섭지 않아요. 더 이상 불안함에 뒤척이지 않고, 잠도 푹 잘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좋은데…, 그래서 더…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제 곁에… 아버지만 안 계시네요….”
까마귀가 온 후, 그녀의 밤은 안전해졌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다. 뱃사공 처녀는 끝내 눈시울을 붉히며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그녀의 눈물은 아무래도 하늘에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스러져갈 터였다.
12_도적
“증조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강을 건넜단다. 까마귀는 늘 아주 높은 하늘에서만 맴돌았기에, 사람들은 그 큰 존재를 완전히 잊은 듯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나라가 어지러웠던 시절이니, 결국 나루터에 피바람이 불고 말았단다. 무장한 도적 떼가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재물을 빼앗았단다. 비명과 울음소리,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들로 순식간에 나루터는 공포와 피로 얼룩진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구나.”
말하는 도중에 아빠의 목소리가 순간 그 끔찍한 살기에 눌려 울컥 잠겨 들었다.
“증조할머니는 도적 떼의 두목이 다가오는 것에 놀라 급히 강 안으로 배를 저었지만, 저 도적놈의 움직임이 더 빨랐구나. 그놈은 성큼성큼 달려와 나룻배 뱃머리로 훌쩍 뛰어올랐단다. 할머니가 노를 들어 저항했으나, 그 악랄한 놈은 할머니를 가뿐히 제압하고 배 바닥에 쓰러뜨렸지, 뭐니.”
“강가에서 구경하던 도적 떼 부하들이 구경거리라도 난 듯 소리를 지르는 거야. ‘이야! 두목! 깔깔깔!’ 절망에 빠진 할머니는 무의식중에 가장 보고 싶은 이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단다. 아빠! 아빠! 살려주세요!”
‘아빠’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는 끝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감정을 추슬렀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늘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까마귀가 나타난 거야! 빠르게 날아와 도적 떼 두목의 머리를 향해 그대로 내리꽂았단다! 빠직—”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두목의 머리를 꽉 붙잡은 까마귀와 증조할머니의 눈이 마주쳤구나!”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호랑이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낮고, 무겁게 울렸다.
“까마귀의 발톱 하나가 두목의 머리를 정수리까지 꿰뚫고 있었지. 놀라 굳어버린 할머니의 얼굴에 훅! 따뜻한 숨을 내뱉어 정신을 잃게 했단다. 아마도 이어질 끔찍한 지옥의 광경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거겠지. 그 뒤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손님에게 전해 들은 것이라고 해.”
후— 그는 어둠 속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 피비린내 나는 살기에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까마귀는 두목의 머리를 몸에서 뽑아내 한입에 삼켰단다. 그런 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도적 떼를 향해 날아올라, 도적 떼의 머리를 모조리 뽑아버렸다는 거야! 손발이 닳도록 빌어도 소용없었어. 까마귀는 가차 없이 모든 도적의 목을 뽑아 죽여버렸단다.”
그가 할머니로부터 까마귀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항상 검은 날개를 펼친 거대하면서도 잔인하리만큼 무서운 검디검은 영웅의 모습이 그려지곤 했었다.
‘할머니… 보고싶어요.’
‘까마귀님… 감사합니다…’
아빠는 딸을 품에 안은 채, 어린 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던 그 이야기 속으로 깊이 잠겨 들었다.
부스럭부스럭.
초가지붕을 덮으며 막 내려앉은 거대한 까마귀가 날개를 접었다. 소리를 숨기려는 듯 몸을 뒤척였으나, 그 미세한 기척은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그것은 높은 하늘에 머물던 까마귀가 비로소 자기 집 지붕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13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6)
“까마귀 신님, 저를 살려주셨군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밤, 방에 누운 뱃사공 처녀는 어둠에 까맣게 물든 천장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때 정적을 찢는 소리가 천장에서 터지면서, 칠흑 같은 연기가 천장부터 바닥까지 폭포처럼 쏟아져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대는 연기를 반사된 희미한 달빛으로 겨우 보았다. 이내 연기는 모여들더니, 서서히 늠름한 사내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쟁터로 떠나던 그날의 아버지 모습이었다.
그녀는 단번에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반가움에 달려가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저 슬픈 눈으로 딸을 바라보며 손을 저을 뿐이었다. 입을 뻥긋거렸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애써 다잡고, 사력을 다해 고개만 들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형상이 흩어졌다. 그 자리에 사람 두 배 정도 크기의 평소보다 매우 작은 까마귀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아빠… 절 지켜주시려고… 까마귀가 되어 돌아오셨던 건가요? 흑… 흐윽…”
묶인 밧줄에서 풀려난 것처럼 몸이 자유로워진 딸은 까마귀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목 놓아 울었다. 서러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한참을 울던 딸의 어깨 위로, 까마귀의 따스한 날개가 묵묵히 감싸주었다.
“아빠! 아빠… 보고 싶었어요….”
그날 밤, 부녀는 더 이상 잠들지 못했다. 딸이 쏟아내는 그동안의 수많은 이야기를, 아버지는 날개로 딸을 품은 채, 말없이 모두 들어주었다.
14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7)
새벽부터 내려앉은 안개는 한낮이 되어서도 걷힐 줄 몰랐다. 지척의 얼굴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자욱한 날은, 나룻배를 몰 수 없었기에 고된 노역으로 지친 몸을 늦게까지 이불 속에 뉠 수 있었다.
“아빠도 좀 드세요.”
늦은 아침상을 차렸지만, 고개를 숙여도 천장에 닿을 듯한 큰 까마귀는 밥상 앞에 앉아 딸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딸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까마귀는 소리 없이 방문을 간신히 통과하여 안개 속으로 뒤뚱거리며 걸어 나갔다. 그 큰 뒷모습이 잠시 사람의 형상으로 섬광처럼 변했다가 돌아갔다.
“아… 빠…”
잠결에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아버지를 불러보았지만,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딸은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그 모습이 꼭 저승의 사자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똑… 똑…
깊은 잠에 빠진 처녀의 귓가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녀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똑똑, 똑! 똑똑!
소리가 한층 선명하고 집요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일까? 이 지독한 안개 속에 강을 건널 손님은 없을 텐데….’
“손님. 오늘은 안개가 심해 배를 띄울 수 없습니다. 내일 다시 오세요.”
그날따라 몸이 천근만근이라, 그녀는 누운 채로 힘겹게 말했다.
똑! 똑! 똑! 똑! 똑! 똑!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확 달아났다.
“잠시만요! 안개가 이렇게 짙으면 위험해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연 뱃사공 처녀는 그 자리에 숨 막히듯 얼어붙었다.
뿌연 물안개 속에 고개를 숙인 붉은 옷의 사내 셋이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저… 오늘은 배가…”
그때, 붉은 옷의 사내 셋 뒤로 아홉 명의 사내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오… 오늘은… 안개가…”
소름 때문에 떨리는 입술 사이로 말이 겨우 새어 나왔다.
곧 붉은 옷의 사내 아홉 뒤에도 붉은 옷을 입은 사내 열여덟 명이 나타났다.
“내… 내일… 오세요….”
입안이 바싹 마르며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총 스물일곱으로 늘어난 붉은 옷의 사내들이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인 채 일제히 입을 열었다.
“안… 된… 다….”
“안… 된… 다….”
“안… 된… 다….”
기이한 합창에 뱃사공 처녀는 오금이 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는 대문 밖에 서 있었다. 언제 걸어 나갔는지도 모르게.
그녀의 주위를, 그들이 여러 겹으로 둘러쌌다. 그러더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너울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일렁임이 커지며 크게 출렁하는 순간,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통, 통, 튀어 올랐다.
통통 통—
붉은 옷의 사내들은 공중으로 통통 뛰는 처녀를 에워싼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욱한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 본 이미지는 구글 Gemini를 활용하였습니다.
15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8)
짙은 안갯속으로 끌려 들어간 뱃사공 처녀의 의식은, 물안개에 젖은 나룻배 위에서 몽롱한 상태로 깨어났다.
“이보게, 뱃사공 처녀! 나를 좀 기다려 주게!”
물안개를 날려버릴 만큼 호탕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몹시 급한 용무가 있어 그러니, 지금 당장 배를 타야겠네.”
패랭이를 쓴 거구의 사내가 안개를 헤치며 나섰다. 노를 잡으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미 검은자위가 사라지고, 온통 시뻘건 핏빛만이 가득했다.
“손님…이… 하나도… 없었는데… 잘됐네요….”
그녀의 눈에는 나룻배가 텅 비어 보이는지, 초점 없는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비켜라! 내 지나가겠다!”
패랭이를 쓴 사내가 나룻배 앞을 가로막은 붉은 옷의 사내들을 향해 천지를 울리는 위엄으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기세에, 붉은 옷의 사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물에 빠진 시체처럼 허우적대며 뒤로 밀려났다. 그들의 몸뚱이는 물결에 휩쓸리는 미역처럼 힘없이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나룻배 위에도 그녀를 둘러싼 붉은 옷의 사내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패랭이 쓴 사내가 나룻배에 발을 올리는 순간,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뚫어져라 매섭게 노려보았다.
딱! 딱딱! 딱!
스물일곱의 사내들이 그를 향해 위협적으로 이빨을 부딪치는 기괴할 정도의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후—우—!
하지만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짧게 입김을 불며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걸음걸음마다 붉은 옷의 사내들이 우수수 강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배에서… 떠나라…! 떠나라…!”
강물에 빠진 붉은 옷의 사내들은 목만 내민 채 썩은 호박처럼 둥둥 떠서 크게 소리쳤다. 그들은 물 위로 광적일 정도로 통통 뛰며 너울을 일으키고자 했다. 파도는 금방이라도 나룻배를 뒤집을 것처럼 거칠어지고 있었다.
패랭이 쓴 사내가 입김을 불 때마다 붉은 옷의 사내들이 강물에 떨어졌지만, 어느새 다른 붉은 옷의 사내가 그 자리를 악착같이 채웠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들의 몰골은 물귀신 그 자체였다.
“얘야, 잠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사내는 뱃사공 처녀를 안심시키듯 나지막이 말하며, 패랭이에 붙어 있던 민들레 씨앗 두 개를 떼어 그녀의 양쪽 귀에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배를 뒤덮은 사내들을 향해 천지를 울리는 목소리로 호령했다.
“물러가면 너희를 구할 것이나, 맞서면 영영 물귀신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계속 물귀신으로 있을 것인지 너희가 선택해라!”
가가가! 가가! 가가가가가!
나룻배 위에 있던 붉은 옷의 사내들이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신경질적으로 질러댔다.
통통통! 첨벙! 첨벙!
배 위와 강물의 사내들이 일제히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거친 물살에 나룻배가 기어이 수직으로 치솟으며 뒤집히려 했다.
텅!
결국 뱃머리가 하늘로 치솟으며, 노를 잡고 있던 처녀가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깍—!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물안개를 뚫고 나타난 거대한 까마귀가 뱃사공 처녀를 발톱으로 낚아채 날아갔다.
그러자 그 뒤를, 굵고 기다란 무언가가 안개를 휘감으며 맹렬히 뒤쫓는 것이었다.
“어딜 가느냐. 내가 너를 오랫동안 지켜보았거늘. 마지막으로 아껴 먹으려던 내 것아.”
물안개를 타고 다가온 싸늘한 기운의 목소리가 처녀 귓가에서 속삭였다.
“까마귀야, 내 일을 방해하지 마라!”
까마귀가 뱃사공 처녀를 낚아채 날아간 바로 그 순간, 나룻배는 완전히 뒤집혀 강물에 처박히기 직전이었다.
짝—!
절체절명의 그때, 패랭이를 쓴 사내가 손뼉을 쳤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박수가 강물을 뒤흔드는 거대한 파동이 되어 춤추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동은 뒤집히던 나룻배를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 압도적인 충격에 배 위에 남아있던 붉은 옷의 사내들은 목과 팔다리가 잘려 사방으로 날렸다.
짝! 짝! 짝!
잘려 나간 살덩이가 강물에 채 닿기도 전, 패랭이를 쓴 사내는 손뼉을 세 번 연달아 쳤다. 첫 번째보다 더욱 강력해진 파동이 강물 위의 사내들을 휩쓸며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살점과 피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면서, 압록강은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물에 빠져 죽은 지 오래된 시신들, 즉 물귀신의 본체가 산산조각 난 채 강을 뒤덮었다. 뼈와 살가죽만 남은 그들의 몸뚱이에서는, 수많은 뱀의 사체가 쏟아져 나와 검붉은 강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이것이 바로 탐욕에 눈이 멀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만들어낸, 끔찍하고 더러운 물귀신들의 잔해였다.
16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9)
“우리 딸, 일어났니?”
“아함… 아빠, 언제 오셨어요? 진지는 드셨고요?”
“오랜만에 우리 딸 얼굴 보며 함께 먹고 싶어서 기다렸단다.”
“금방 차려올게요.”
처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니다. 이미 밥상이 차려져 있으니 어서 앉거라.”
아버지 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상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숟가락도, 밥그릇도 유난히 작아 보였다.
“우리 딸, 많이 컸구나. 네 숟가락은 이제 너무 작지 않으냐?”
“어? 정말 제가 밤새 키가 컸나 봐요. 그런데 아빠는 왜… 입을 크게 벌리고 손가락으로 밥을 먹는 거예요?”
바로 그 찰나, 처녀의 시야에 손으로 밥을 퍼먹는 아버지의 몸을 칭칭 감은 어마어마한 이무기가 비쳤다. 그의 목은 이무기의 몸통에 이미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몽롱함에서 깨어난 뱃사공 처녀의 눈앞에, 악몽보다 더 끔찍하고 끈적거리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다.
방 안은 거대한 이무기의 몸뚱이로 가득 차 숨쉬기조차 비좁았다. 이무기는 까마귀의 형상을 한 아버지를 머리부터 통째로 삼키는 중이었다.
“안돼… 제발…!”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무기의 아가리를 붙잡고 벌리려 애썼지만, 끈적이는 이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발이라도 붙잡고 버텨보려 했으나, 가녀린 몸은 함께 아가리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딸려 들어갈 뿐이었다.
콰앙—!!
그때, 초가집이 안에서부터 폭발하듯 산산이 부서졌다. 지붕을 뚫고 나온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을 향해 대가리를 광포하게 쳐들고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목구멍으로 삼켜진 까마귀와 딸의 형상이 불룩하게 비치며, 이무기의 내장이 꿈틀거렸다.
“이놈, 이무기야!”
천둥 같은 고함과 함께 패랭이를 쓴 사내가 폐허 위에 나타났다.
“네놈이 기어코 용의 길을 버리고 살생의 길을 택했구나! 그렇다면 내 손에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외침과 동시에, 검은 막대 하나가 번쩍이며 날아와 이무기의 혀를 꿰뚫고 땅바닥에 박혔다. 사내는 연달아 막대를 던져 이무기의 거대한 몸통을 땅에 촘촘히 고정했다. 이무기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무기의 윗입술을 잡아 머리부터 배를 향해 찢어 내리기 시작했다.
아가리부터 뱃속까지 길게 갈라지자, 그 안에서 수많은 알과 새끼 뱀들이 올챙이 떼가 논둑에서 쏟아지는 것처럼 우글우글 쏟아졌다.
그 역겨운 틈 사이로 까마귀와 뱃사공 처녀가 밀려 나왔다. 까마귀는 딸을 가슴에 품은 채 이미 숨이 멎은 듯 돌덩이처럼 차가워졌다.
쿵!
패랭이를 쓴 사내가 폐허가 된 방에 들어서며 강하게 발을 굴렸다.
“얘야, 언제까지 꿈속에서 헤맬 것이냐! 네 아비가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테냐!”
“커헉… 으… 아버지를… 구할… 거예요….”
그녀는 기침하며 비몽사몽간에 깨어나려 애썼다. 곧 그녀의 입에서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안개… 때문에… 배는 못 나가요…. 하지만 정 급하시다면….”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모든 기억과 감각이 뒤죽박죽이었다. 방바닥은 끈적하고 역한 이무기의 체액과 부화한 새끼 뱀들로 가득했다. 새끼 뱀들은 숨이 멎은 까마귀의 입안으로 집요하게 기어들었다. 그 옆에서 뱃사공 처녀가 노를 젓는 시늉을 하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네 정녕 아비를 살리고 싶으냐?”
패랭이 쓴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운명의 심판자처럼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를… 살려…?”
그 말에, 이무기에게 잡아먹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눈 안에서 번쩍거렸다.
“헉! 아버지!”
그녀는 마침내 온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를 살리고 싶어요!”
뱃사공 처녀의 눈빛이 절박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패랭이를 쓴 사내는 그 의지를 확인하자,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렇다면 정신 바짝 차려라. 지금부터 네 아비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저 뱀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네, 손님!”
그녀는 엉겁결에 '손님'이라고 말한 후 실수했다는 느낌에 얼굴이 불그레해졌지만, 곧 아버지의 생명 앞에서 모든 것을 잊고 명령에 바로 따랐다.
“당겨라!”
사내의 외침에 그녀는 까마귀의 벌어진 목 안에 손을 넣어 뱀의 꼬리를 붙잡았다. 미끄럽고 차가운 감촉, 살을 파고드는 작은 가시로 인한 고통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하지만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오히려 까마귀의 목구멍 깊숙이 더욱 힘껏 기어들어 갔다.
“그게 다냐! 네 아비가 죽게 내버려둘 셈이냐!”
사내의 호통이 그녀의 귓가를 아프게 찔렀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필사적으로 뱀을 잡아당겼다. 뱀이 조금씩 끌려 나오자, 사내는 뱃사공 처녀의 손 위로 자기 손을 거칠게 겹쳐 잡더니 단숨에 뱀을 쭉 뽑아냈다. 딸려 나온 뱀은 다른 뱀의 꼬리를 물고 있었는데, 까마귀의 숨통은 여전히 막힌 채 점점 차가워졌다.
“계속해라! 쉬지 말고, 당겨라!”
사내는 더는 도와주지 않고, 옆에서 신이 난 듯 손뼉을 치며 응원할 뿐이었다. 그녀는 입이 바짝 마르고 손발이 떨려왔지만, 오직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쉴 틈 없이 뱀을 끄집어냈다. 까마귀의 목에서 뱀 한 마리가 끌려 나올 때마다, 바닥의 새끼 뱀 한 마리가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이제 됐다. 잘 해냈구나.”
마침내 마지막 뱀이 끌려 나왔다. 그는 그 뱀의 목을 억세게 거머쥐더니 보자기에 싸서 단단히 묶었다.
“아버지… 아버지…”
모든 힘을 소진한 뱃사공 처녀는 털썩 실신하며 주저앉았다. 사내는 그녀를 왼팔로, 그리고 숨이 멎은 까마귀를 오른팔로 조심스럽게 감싸안았다. 그는 폐허가 된 집 위로 끝 모를 우주를 올려보았다.
17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10)
구름인지 안개인지, 혹은 세상의 경계인지 분간이 안 되는 무한하면서도 적막한 공간에 나룻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뱃머리에는 패랭이를 쓴 사내가 쪼그려 앉아 있고, 맞은편에는 뱃사공 처녀가 무릎을 꿇은 채 숨이 멎은 까마귀를 끌어안은 채 애달프게 울고 있었다.
“아버지, 이대로 가시면 안 돼요. 아버지, 제발…!”
그녀의 간절한 흐느낌이 고요한 공간을 찢으며, 아버지의 영혼이 갇힌 차원으로 파동이 되어 퍼졌다.
한편, 그 시각 또 다른 차원인 영혼의 갈림길에 선 사내의 영혼이 끔찍한 고통 속에 공중에 뜬 상태로 부들거렸다.
사내의 눈구멍, 귓구멍, 구멍이란 구멍에서 손바닥만 한 새하얀 구더기가 쉴 새 없이 꿈틀대며 기어 나왔다. 구더기 떼는 마치 죽어가는 사내가 아비라도 되는 것처럼 곁을 떠나지 않고 축축한 무덤처럼 몸을 하얗게 뒤덮었다.
“억울… 하다…. 너라도… 죽여야겠다….”
뻥 뚫린 눈구멍 아래의 오므린 입에서 한 맺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때, 그의 목구멍에서 커다란 뱀의 대가리가 튀어나와 침이 번질거리는 기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뱀은 구더기 떼를 밀치고 사내의 목을 칭칭 감아 조르려 하였으나, 사이사이에 구더기가 끼이면서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후드득!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구더기 떼는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대신, 물에 반쯤 잠긴 사내의 옆에 눈코입 없는 흰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 무언가를 주무르고 있었다.
“어머, 옷에 구멍이 났네. 내가 기워줄게요.”
눈코입조차 없는 여인은 사내의 목에 감겨 있던 검은 천 조각을 가위로 조각조각 잘라내더니, 잘린 천을 실로 꿰매어 수십 척 길이의 기다란 줄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줄로 사내의 양손을 묶어 무심하게 질질 끌었다.
“끼아아악!”
줄이 탱탱해질 때까지 천천히 끌던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다. 여인의 다리가 기이하게 늘어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달리자, 묶인 사내는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통통 튕기며 속수무책으로 한동안 끌려갔다.
그때 허공에서 웅장한 힘이 느껴지는 호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네 선택을 기다린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기다린다! 기다린다! 어서 선택해라!”
목소리에 반응한 끌려가던 사내가 묶인 양손에서 새끼손가락 하나를 필사적으로 빼내 ‘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꺾었다. 꺾인 손가락은 저 멀리, 여인의 반대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경쾌한 새소리와 화사한 빛이 사내를 유혹하고 있었다.
“거긴 안 된다! 안돼!”
바로 그 순간, 흰옷의 여인이 광기에 찬 목소리로 거칠게 소리쳤다.
“여보!! 딸에게 당장 돌아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여인은 잡고 있던 줄을 채찍처럼 휘둘러, 사내를 빛의 반대편,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어둠 속으로 가차 없이 던져버렸다. 다시 돌아가야 할 그 길을 향해 사내는 줄에 이끌려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18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11)
까마귀의 검은 털 사이로 희미한 온기가 돌아왔다.
“커…헉!”
마치 깊은 강물 속에서 솟구치듯, 숨이 멎었던 까마귀가 길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다.
“해냈구나. 네가 아비를 살렸다.”
패랭이를 쓴 사내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패랭이를 벗어 구름이 깔린 허공으로 던졌다. 그와 동시에, ‘쩌억!’ 공기의 경계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몸이 거대하게 팽창했다. 뼈와 살이 터져 나오는 기세로 부풀어 오른 그는 순식간에 나룻배를 발밑의 나뭇잎처럼 보이게 하는 압도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발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왼발 하나로만 나룻배에 섰으나, 배는 거짓말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평온했다. 뱃사공 처녀는 아버지의 회생에 기뻐할 새도 없었다. 눈앞에 선 존재가 사람이 아닌 인간을 굽어보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큰족 도깨비임을 직감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꺅!' 그녀의 비명에, 방금 깨어난 까마귀가 딸의 뺨에 부드럽게 머리를 비비며 짧게 울었다. 그 따뜻하고 익숙한 감각에 공포에 질려 있던 그녀는 차츰 평온을 되찾았다. 안심한 까마귀는 미련 없이 그 큰 도깨비의 어깨 위로 날아가 앉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북부의 큰족 도깨비이며, 이 세대를 이끄는 대장 중 하나, 나이울려라 한다.”
나이울려는 뱃사공 처녀와 눈을 맞추려 거대한 몸을 구부렸다. 작은 나룻배 때문에 양쪽 엄지발가락에 겨우 힘을 준 채 쪼그려 앉는 그의 기묘한 모습에, 그녀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이것은 네 아비의 목숨과 맞바꾼 마지막 부탁이자, 앞으로 너와 나, 그리고 너의 후손이 맺게 될 기나긴 계약에 관한 이야기다.”
나이울려의 이마에 밭고랑처럼 깊은 주름이 졌다. 그는 마치 그때의 고통을 회상하듯 손가락을 떨었다.
“오래전, 서쪽의 당나라가 국경을 넘었을 때를 기억하느냐? 그때 당은 인간의 군대뿐 아니라, 다른 세계의 흉악한 괴수들을 이끌고 왔다. 고구려 왕의 요청에 따라 우리 큰족 도깨비들은 그 괴수들과 맞서 싸웠다.”
“전쟁터에선 인간과 도깨비, 괴수가 뒤섞여 싸우기 마련. 나의 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네 아비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 내 아들을 구했다. 나는 그 빚을 갚고자 했다. 네 아비의 영혼을 인도하던 까마귀의 몸에 그의 영혼을 옮겨 담았다. 비록 육신은 까마귀지만, 그 안의 영혼은 온전히 네 아비의 것이다!”
“아이월, 이제는 네 차례다. 이것이 ‘도깨비 계약’에 대한 나의 제안이다.”
나이울려가 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손바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라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사람도 결국엔 스러지는 법. 하지만 도깨비의 계약은 그보다 더 길게 살아남는다. 이 땅의 고구려는 사라져도, 너의 후손이 너의 이름을 잇는 한 까마귀는 영원히 그 곁을 지킬 것이다.”
그의 손바닥 위로, 물속에서 막 건져낸 듯 젖어 있는 까만 돌 하나가 파르르 떨리며 떠올랐다.
“아이월! 이제 선택하거라. 나와 이 긴 계약을 맺겠느냐?”
그의 목소리가 물결처럼 출렁이며 온 공간을 흔들었다.
“도깨비 대장님… 아버지가 영원히 제 곁에 계시게 해주세요. 계약을 맺겠습니다.”
아이월의 눈빛에는 모래 한 알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오직 아버지를 향한 간절한 사랑과 굳건한 의지만이 남았다.
아이월의 눈앞으로 도깨비의 솥뚜껑만 한 손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