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공 처녀와 까마귀 1

by Tigerwood

07. 4시 44분

'벌써 수요일이라니.'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러고도 노트북 앞에서 멍하니 이틀을 더 허비해야 했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증세는 마찬가지였다. 책상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텅 빈, 까만 어둠만이 들이 찬 창고. 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오직 모니터 속 까만 그림자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만 공허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뭘 하고 있니, 너는… 제발 다음 이야기라도 좀 생각해 내라고!'

꿀꺽,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마른침을 여러 번 삼키던 바로 그때였다.

"우욱…!"

헛구역질과 함께, 모니터 화면에 불투명한 핏물 섞인 살점 세 점이 달라붙었다. 마치 목구멍 안쪽에서 찢겨 나온 붉은 모래알 같았다. 그 작은 살점들이 점점 출렁이는 강물처럼 느껴질 무렵, 섬광처럼 거대한 날개를 펼친 시꺼먼 새가 강물을 향해 날아가는 잔상이 시야를 강타했다.

"흡…!" 엉겁결에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꿀꺽 삼켜졌다. 엄습한 불안감에 고개를 조심스레 들자, 사무실 천장 전체를 시커멓게 메운 거대한 새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그림자는..! 분명 뱃사공 처녀 이야기에 나오는…'


나는 침대에 누워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의 망망대해처럼 검은색으로 짙게 물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암막이 드리워진 방은 빛이라곤 먼지 한 톨도 없는, 무한한 어둠 그 자체였다.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이거 어지러운걸…'

양쪽에서 뇌를 짓누르면서 돌리는 듯한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내가 누워 있다는 사실만이, 내가 기대고 있는 곳이 바닥이고 마주하는 곳이 천장임을 억지로 명시할 뿐이었다.

'이 정도로 잠을 못 자면 정말 위험한데, 제기랄. 갑갑하다.'

입 밖으로 걱정을 내뱉기엔, 어둠이 그 말을 엿들을지 무섭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돌아가지 않으려 뻗대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책상 시계를 보았다. 형광으로 빛나는 어둠의 지표, '4:44'. 유일하게 시계의 밝은 빛만이 현실이라는 자각에 힘을 보태주고 있었지만, 세 번이나 반복되는 '4'의 불길한 숫자는 오히려 공포를 증폭시켰다.

'또또, 이 시간이야!'

속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시계 속 '4:44'이라는 숫자에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간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방 전체를 휘감는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덮쳤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방 천장의 어둠을 밀어내며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날아오르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

'어? 까마귀 왕이… 나를 지켜주려는 건가?'

문득, 저 높은 곳에서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 생겼다.

그러자 목덜미를 묶고 있던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짐과 동시에, "하아...!" 밤새도록 애타게 기다리던 하품이 터져 나왔다.

'다행이다…. 이제야 잠이 들 것… 같….'


세 번째 이야기인 <뱃사공 처녀와 까마귀>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 27년의 일이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그 연도와 이야기는 마치 뜨거운 불도장처럼 머릿속에 찍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스스로 선명하게 꿈속에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걸 깨어나서도 기억해야 해. 반드시 기억해야 해.'

눈에 보이는 장면과 귓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을 잃지 않으려 나름 필사적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른 이야기들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점차 기억의 조각들이 온전히 자리를 찾아올 것이라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더욱 깊고 깊은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 아래. 바닥의 비밀스러운 문이 조금 열리자, 엄마가 고개를 내밀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야, 살 수 있다… 엄마만 믿고 … 가야 한다. 알겠지."

간절하게 애원하는 듯한 엄마의 그 말은 깬 후에도 틈만 나면 달팽이관에서 속삭였다.





뱃사공 처녀와 까마귀


01_아빠와 딸

강물은 흙탕물을 가득 품은 채 사나운 기색 없이 유유히 흘러 밤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 강가, 나루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초가집 한 채가 외로운 방랑객처럼 서 있었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물소리가 밤이 되면 방바닥을 타고 올라와 잠을 재촉하곤 했다.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방 안에서 더욱 크게 들리는 것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어린 몸뚱이의 작고 불안한 소리였다.

“아빠, 너무 깜깜해서 잠이 오질 않아요.”

내내 잠 못 이루던 어린 딸이 어김없이 아빠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조심스레 속삭였다.

“이런. 우리 딸. 잠이 달아나서 큰일이네. 증조할머니 이야기, 또 해줄까?”

그는 팔베개를 베고 누운 딸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작은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초가집에서 어린 딸과 단둘이 사는 그는 나루터를 지켜온 뱃사공이었다. 옛 고구려 땅이 된 강 건너편으로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것이 곧 그의 가업이자 운명이었다.

“네네! 해주세요! 증조할머니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오늘은 끝까지! 꼭! 들을 거예요!”

흥분으로 상기된 딸의 목소리에는 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했다.

“이번에는 잠들지 않고 끝까지 들을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동굴처럼 짙은 어둠이 무서운 어린 딸은 섣불리 잠들지 못하고 아빠의 품을 파고들었다. 오직 그 단단한 품 안에서만이 호랑이도 곰도 무섭지 않았다.


02_이름에 깃든 운명

찌르륵, 찌르륵!

손을 더듬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방 안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밖도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 박혀 있었지만, 압록강 주위는 짙은 어둠에 푹 잠겨 있었다. 다행히도 수십 마리 귀뚜라미들이 짝을 부르려 목청껏 질러대는 덕에 숨 막힐듯한 고요는 아니었다.

아빠는 자신의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이제는 어린 딸에게 밤마다 들려주고 있었다. 딸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매번 이야기의 절반을 넘기지 못하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곤 했다. 아마도 그래서 딸은 이 이야기가 지루해지지 않고 늘 궁금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여보, 우리 딸이… 잘 자라게…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딸을 낳고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간절한 부탁. 그는 아내 몫까지 딸을 잘 키워내고 싶었다.


“자, 그럼 뱃사공 처녀와 까마귀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빠가 너스레를 떨었다.

짝짝— 짝!

“와— 오늘은 끝까지 들을 거예요. 아빠,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예쁘신 우리 따님‧‧‧”

어둠 속에 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딸을 응시하며 잠시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뱃사공은 배에 사람을 태워 강을 건네주고 뱃삯을 받는 사람을 말한단다. 비록 누군가에겐 별 볼 일 없는 일일지라도, 아빠는 우리 가업에 대한 긍지가 아주 높구나. 우리 딸도 그 긍지를 이어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란다.”

아빠는 언제나 뱃사공에 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별 볼 일 없는 직업일지라도, 그는 자기 일에 대한 긍지가 높았다. 그런 긍지를 딸이 잘 이해하고 이어가기를 바랐다.

“아빠도 세상에서 제일 큰 압록강의 뱃사공이잖아요.”

어린 딸이 야무지게 말했다.

“맞아, 아빠는 우리 딸의 증조할머니로부터 이 강을 물려받았지.”

“그럼, 증조할머니는 누구에게서 물려받았어요? 저는 맨날 헷갈려요.”

앞으로는 더 이상 헷갈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듯, 오늘따라 딸은 유독 말이 많았다.

“증조할머니는 증조할머니의 아빠, 즉 우리 딸에게는 고조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단다.”

“아하, 그렇구나!”

어린 딸이 마치 이해했다는 듯 말했지만, 여전히 증조나 고조의 의미를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바로 아빠의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가 우리 딸만큼 어릴 때, 밤마다 할머니는 손자인 아빠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셨지.”

그때 아빠는 딸을 꼭 안았다. 마치 할머니가 손자인 그를 안아주던 것처럼, 기억 속 할머니의 따스했던 온기를 딸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증조할머니도 엄마 없이 고조할아버지인 아빠와 단둘이 살았는데,”

“아빠, 증조할머니는 왜 엄마와 함께 살지 않았는데요?”

자신처럼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는 증조할머니의 이야기에, 어린 딸은 묻고 또 물었다.

“증조할머니가 살던 때는 싸움이 수시로 일어나고 노략질도 빈번했던 혼란한 시기였단다. 이 강나루에는 강을 건너려는 손님이 많았는데, 강나루에 들이닥친 도적에게 돌아가셨다는구나.”

“아빠, 무서워요. 도적이 방에 들어오면 어떡해요?”

어린 딸은 겁에 질린 듯 아빠의 팔을 붙들고 더욱 안겨들었다.

“아빠가 옆에 있는데 뭐가 무섭다고 그러니? 아빠가 우리 딸을 반드시 지켜줄 텐데, 눈곱만큼도 무서워하지 말렴.”

“그래도 엄마가 죽어서 무서워요.”

“그래, 그랬구나…. 엄마가….”

그는 딸이 태어나고 커가는 것을 보지도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만 목이 먹먹하게 메어왔다.

“그래서요?”

말을 실수했다 싶은 어린 딸이 급히 아빠에게 재촉했다.

“예쁜 우리 딸, 증조할머니 이름이 뭐였지?”

“증조할머니 이름은 아이월이고, 아빠 이름은 아이단이고, 제 이름은 아이해잖아요.”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딸의 목소리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역시 똑똑한 우리 딸답구나. 우리 가족은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따르고 있는 걸 잘 알지? 아빠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 중 ‘아이’ 뒤에 ‘단’ 자를 하나 더 붙인 거란다. 딸도 나중에 엄마가 되면 아이에게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이어줘야 한다. 꼭! 알겠지?

“아빠, 왜 우린 남들과 다르게 그래야 하는데요?”

항상 같은 질문이었지만, 아빠의 설명을 들어도 어린 딸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는 어린 딸의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누가 들을까 조심스레 속삭이는 흉내를 냈다.

쉿, 조용. 이름에는 우리 가족만의 아주 오래된 비밀이 숨어있단다.”


03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1)

압록강 나루터 가까이에 있는 초가집에는 뱃사공 아빠와 딸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어허, 바람이 심상치 않네그려.”

날이 밝기까지 아직 시간이 꽤 남았지만, 심상치 않은 바람은 그에게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음을 알렸다. 무엇보다 바람이 세게 불거나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궃은날에는 유독 강을 건너야 할 손님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는 쉬어야 할 날에도 쉬지 못하고 나루터에 나갈 수밖에 부지런한 뱃사공이었다. 그는 날씨를 확인하고 너울도 미리 살피며, 배나 노에 문제가 없는지 새벽부터 서둘러 점검했다.

“아빠는 일하고 올 테니 잘 자고 있으렴.”

딸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뱃사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새벽 일찍부터 강나루에 나가 당장이라도 배를 몰 수 있게 꼼꼼히 준비했다.

“이보시게, 압록강은 언제부터 건널 수 있소? 지금 가면 안 되오? 급해서 서둘러 가야 하는데.”

오늘처럼 꼭두새벽부터 오는 손님들은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강을 건너자며 재촉하곤 했다.

“아유,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다른 손님도 태워야지요.”

뱃사공은 너스레를 떨며, 바쁜 척 횃불을 들고 나룻배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압록강 너머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이른 새벽부터, 해가 떨어질 즈음 온 손님까지 다양했기에 그는 온종일 노를 저어야만 했다. 오랜 세월 뱃사공 일을 해온 그였지만, 강을 여러 번 왕복하는 것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별을 보고— 집에서 나와, 별을 보고— 집에 들어가네. 강의 신이 지켜주네— 오늘도 지켜주네—”

터벅터벅 발걸음이 무거웠으나, 흥얼거리는 노래만으로도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비록 손목은 저렸고, 새끼손가락은 딱딱하게 굳어 접히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자네 소문 들었는가? 서쪽 땅의 당나라가 우리 국경을 침범했다는구먼.”

“네? 그런 소문은 처음 듣는데요. 엄청 크다는 그 당나라와 전쟁이 났다는 겁니까?”

“어허, 전혀 모르고 있었구먼. 벌써 국경 가까운 곳에선 난리가 났다는구먼.”

최근 압록강 너머에서 온 한 손님이 당나라가 고구려 국경을 공격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처음에는 변경 너머의 돌궐이 노략질한다는 소문이었는데, 지금은 당나라 왕이 직접 고구려 국경을 공격했다는 소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벌써 흉흉한 게 어찌 될는지 걱정이구먼. 어서 강이나 건너세. 나도 얼른 가족한테 가야지, 불안해서 더는 못 기다리겠구먼.”

“알겠습니다. 다른 손님도 없으니, 당장 배를 몰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건너실 겁니다.”

노를 젓는 데 이골이 난 뱃사공이었으나, 자꾸 손에서 노가 미끄러졌다. 전쟁이란 말에 내내 가슴이 두근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04_왕명

“이날따라 나루터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으로 붐볐단다. 고조할아버지인 증조할머니의 아빠는 새벽부터 몰려든 손님들로 인해 강을 벌써 건너려던 참이었지.”

“그때였어!”

아빠가 딸을 놀라게 하려는 듯 목소리를 깜짝 높이자, 딸은 아빠 품에 더욱 꼭 안겨들었다.

“다각! 다각! 저 멀리서 말을 탄 전령이 다급하게 외치며 달려왔단다.”

그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박진감 있게 말했다.

“나룻배는 제자리에 있어라! 그 누구도 배를 타서는 안 된다! 당장 배에서 내려라!”

“전령이 달려오는 와중에 나룻배가 떠날까 걱정되었는지 소리 높였단다. 나룻배에 올라타던 모든 손님이 달려오는 전령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구나.”

“히힝—! 말의 거친 숨과 함께 전령의 숨 또한 몹시도 거칠었단다. 헉… 헉헉… 헉… 전령은 숨이 가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다급했던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문서를 펼쳐 들고는 이렇게 외쳤단다.”

“왕명이다! 전쟁이다! 당나라가 국경을 넘어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아빠는 전령의 거친 숨과 진정되지 않은 말투를 흉내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왕의 명으로 여기에 방을 붙이니, 십칠 세 이상의 사내는 전쟁에 나간다는 보장왕의 엄한 명이시다! 속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전쟁에 나갈 채비를 해라!”

강을 건너려던 손님들이 한참 웅성거리더니,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어구! 큰일이 났구먼. 이를 어째, 빨리 집에 가야 하는데.”

“강 건너에 집이 있으니 이번 한 번만 건너게 해주시오!”

“손님들이 애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쯧쯧… 쯧.”

그는 꽤 그럴싸하게 혀를 찼다.

“강 건너편에 집이 있는 사내들은 속히 우리 군이 주둔 중인 고림성으로 가서 합류하라! 지금부터 배로 허락 없이 그 누구도 건널 수 없다!

압록강 가까이에 있는 고림성은 나루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산성이었다.

“강 건너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단다. 엉엉… 엉….”

아빠는 우는 흉내를 내다가 그만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에야 말에서 내린 전령이 나루터 기둥에 방을 붙였단다. 그런 후 고조할아버지에게 다가와 말했다는구나.”

“아저씨도 징집되셨습니다. 어서 집으로 가서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나룻배로 사람을 더 이상 태워주면 큰일 납니다.”

아빠는 목소리를 전령의 목쉰 소리처럼 내려고 애썼다.

“전령은 평소 고조할아버지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지 않았겠니. 강을 자주 건넜기에 소식을 주고받는 친구처럼, 삼촌과 조카 같은 친척처럼 친하게 지냈단다.”

“이보게, 동생. 나라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집에는 어린 딸밖에 없다네. 방법이 없는 건가?”

전령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저씨, 나라가 망하면 남아날 가족이나 있겠습니까? 우리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지요. 이겨서 돌아와야 합니다.”


05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2)

“아빠,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네요.”

딸이 부엌에서 나오며 반갑게 물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아빠는 대꾸도 없이 기운이 쭉 빠진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마당에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아빠는 그제야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무슨 일인데요.”

“우리 딸… 아… 어찌하면 좋으냐…”

고개를 숙인 아빠의 어깨가 딸의 목소리에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빠, 금방 밥상 차려올게요. 우선 진정하고 계세요.”

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애써 침착하려 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불안한 마음에 밥상을 차리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평소와 너무도 다른 아빠의 모습이 알 수 없는 공포를 몰고 왔다.

“아빠, 우선 밥부터 드시는 게 좋겠어요.”

밥상을 들고 온 딸의 손과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 전쟁이… 났단다….”

아빠가 겨우 내뱉은 말은 딸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 아비가… 전쟁터에… 나가야… 한단다….”

와장창! 아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깜짝 놀란 딸이 밥상을 놓치고 말았다. 널브러진 식기와 쏟아진 반찬들로 인해 방바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빠, 제가… 상을 다시 차려올게요. 잠시만요….”

딸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황급히 고개를 숙인 채 부엌으로 달려갔다. 따뜻한 밥을 그릇 가득 푸는 동안에도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갓 지은 밥 위로 뚝, 뚝 떨어졌다.

딸그락- 딸그락-

부엌에서 나가기 전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고 다시 밥상을 들었지만, 그 손은 계속 떨렸다. 밥상 위 숟가락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방안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사랑하는 내 딸아, 어서 먹자꾸나.”

아빠의 그 말에 딸은 기어이 울컥하고 말았다. 부디 이 밥상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딸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눈물범벅이 된 밥을 억지로 삼켰다. 한술, 한술 밥을 떠넘기는 것이 마치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




06_소녀 뱃사공, 아이월

고구려군에게 패배나 후퇴란 없었다. 오직 목숨을 걸고 싸워 용맹을 증명하는 길뿐이었다. 설령 살아 돌아온다 해도 온전한 몸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압록강 나루터를 떠나 전쟁터로 향하는 길은 곧 죽으러 가는 길과 다르지 않았다.

반면, 전쟁 통에도 아이들은 철없이 해맑았다. 눈물을 훔치며 마을을 떠나는 장정이 보이면, 아이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우는 시늉을 하며 놀려댔다.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를 노래, 전쟁터로 떠나는 아비의 심정을 담은 그 노래를 아이들은 그저 신나게 부르며 온 마을을 뛰어다녔다.

“따라! 따라! 우리 따라!”

“아비는 전쟁터로 나간다네.”

“살아 못 보면 꿈에라도 보자꾸나.”

“따라! 따라! 우리 따라!”

“보고픈 우리 따라!”


“증조할머니는 뱃사공 일을 하기엔 너무 어리고 약했지.”

아빠는 품에 안긴 딸의 조그만 손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힘주어 잡으면 바스러질 듯 가녀린 손목이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어. 저 압록강 너머에서 아빠를 태우고 돌아올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며, 매일 같이 노를 저었거든.

“처음엔 힘에 부쳐서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강을 건너는 게 고작이었단다.”

“아빠, 증조할머니는 몇 살이었어요?”

“글쎄, 아마 지금 우리 딸보다 한두 살 많았을까?”

“와… 그래도 배를 몰기에는 너무 어리잖아요.”

“그렇지. 그 어린 나이에 가업을 잇는 뱃사공이 된 거야. 압록강의 뱃사공.”

“저는 노를 들지도 못할 것 같은데…”

“아빠가 있는데 뭘 걱정해. 힘은 차츰 붙는 거고, 무엇보다 넌 증조할머니의 피를 물려받았잖니. 똑 닮아서 틀림없이 잘할 거야.”

“그래서, 그 뒤로는 어떻게 됐어요?”

“어느덧 해가 바뀌고 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었단다. 다행인 건 그사이 증조할머니의 키도 크고 힘도 붙어서, 어엿한 ‘뱃사공 처녀’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거지.”

아빠의 목소리에서 안도감과 자랑스러움이 섞여 묻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아빠가 갑자기 목소리에 힘을 주자, 딸이 품에서 움찔했다.

“아빠…, 무서워요….”

“아이고, 우리 딸 놀랐구나. 아빠가 너무 실감 나게 했나 보네. 미안하다.”

항상 이 대목에서 놀라는 딸의 모습에 아빠는 미안해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딸의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괜찮아요. 그래서요?”

“어느 날 손님 한 명만을 태우고 강을 건너는데, 물 위로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자꾸 비치는 거야. 이상하게 여긴 손님이 위를 쳐다본 게 아니겠니.”

그는 마치 천장에 무언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까마귀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하늘을 뒤덮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까마귀가! 뱃사공 처녀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고 있었던 거야.”


07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3)

까마귀의 그림자는 실로 거대하여, 강 한복판의 나룻배를 통째로 삼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까마귀 또한 배 위의 두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아는 듯했다. 그 불룩 튀어나온 눈동자에 작은 배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허, 저 까마귀 신기할 세. 이 넓은 강에 먹을 게 뭐가 있다고 배를 따라다니는 건지. 이보게, 뱃사공 처녀. 저 새는 강의 수호신이라도 되는 게요?

손님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손님, 저도 저런 까마귀는 처음 봅니다. 그림자 크기 좀 보세요. 말이 안 될 정도로 큽니다!”

뱃사공 처녀는 정체 모를 까마귀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묘한 충동이 들었다. 때마침 까마귀의 그림자가 배를 완전히 뒤덮자, 마치 아래로 내려오려는 듯 그림자는 더욱더 짙고 거대해졌다.

“뱃사공 처녀! 이거 뭔가 위험한 징조 아니오? 노를 더 빨리 저어야겠소!”

느긋하던 손님이 불안한 듯 처녀를 재촉했다.

처녀는 안간힘을 다해 노를 저으면서도, 정체를 향한 궁금증 또한 커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림자가 사라지려 하면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고개를 들어 까마귀를 살폈다.


바로 그때였다. 잔잔하던 강물이 갑자기 뱀처럼 꿈틀대며 사납게 너울대기 시작했다.

웨웩—! 웨엑—!

거친 물결에 뱃멀미가 난 손님이 강물에 토악질을 해댔다.

“뭐, 뭐지… 으악!”

토악질하던 손님이 무언가에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마치 토사물 냄새를 맡고 몰려든 듯, 수만 마리 뱀이 너울이 되어 나룻배를 집어삼킬 듯 덤벼들었다. 배는 더 이상 처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뒤집힐 듯 위태롭게 휩쓸리고 있었다.


08_까마귀

“으악! 결국 큰일이 나고 만 거야. 너울에 휩쓸린 뱃머리가 하늘로 치솟으며 배가 뒤집히려 했단다.”

“어떡해요! 그래서 배는요? 증조할머니는요? 살아남으셨어요?”

“어떻게 됐을 것 같니?”

“음… 증조할머니는 힘이 세니까, 노를 힘껏 저어서 파도를 넘어갔을 거예요!”

“오, 그것도 좋은 생각인데. 아까 배 위를 따라오던 게 뭐였지?”

“까마귀요! 설마… 까마귀가 구해줬어요?”

“역시 우리 딸이구나. 맞아! 뒤집히려던 뱃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와 앉았단다.”

“우와! 역시 수호신이었네요!”

“과연 그럴까? 뱃사공 처녀를 구해준 게 아니라… 잡아먹으려고 온 거라면?”

“아빠, 안 돼요! 증조할머니가 잡아먹히면 안 돼요!”

“하하, 까마귀가 우리 딸 마음에 들었나 보다. 까마귀는 워낙 커서 두 발을 다 올리지도 못하고, 오직 한 발로 뱃머리를 꾹 누른 채 너울을 잠재우기 시작했단다.


※ 본 이미지는 구글 Gemini를 활용하였습니다.


09_뱃사공 처녀와 까마귀(4)

족히 십 척(약 3m)은 될 법한 까마귀가 날개를 펼치자, 그 길이는 이십 척(약 7m)을 훌쩍 넘었다. 퍼억! 거대한 날갯짓 한 번에 성난 뱀 너울은 힘없이 짓눌렸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파도는 이내 잠잠해지며 살랑이는 갈대밭처럼 잔잔해졌다.

“까마귀 왕이시여,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배에 타고 있던 손님은 저승사자를 목도한 듯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목이 쉬도록 애원했다. 반면, 뱃사공 처녀는 까닭 모를 경이로움과 벅찬 감정으로 까마귀를 올려다보았다. 괴물 같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푸른 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는 묘하게도 따스한 빛을 품고 있었다.

“까마귀…신(神)이시여… 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녀는 부드러워진 강물을 확인한 뒤, 까마귀를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정중한 절을 올렸다.

나루터에 도착할 때까지 까마귀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배는 마치 강물을 미끄러지듯 순식간에 강변에 닿았다. 손님은 처녀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땅에 내렸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나루터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다른 손님들마저 두려움에 휩싸여 모두 도망가 버린 모양이었다.

까마귀는 떠날 생각이 없는 듯 뱃머리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다시 저쪽으로 가야해요.”

그녀는 가날픈 손가락으로 강 건너를 가리키며 사람 머리만한 까마귀의 눈을 바라보았다. 까마귀는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까마귀를 닮은 신을 태운 채 다시 강 건너편으로 노를 저었다.

하루 일이 끝나자, 뱃사공 처녀는 우물쭈물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저… 까마귀…신님, 이제 저는 집으로 가봐야…”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그녀는 다시 한번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집으로 뛰어갔다. 까마귀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10_이무기

“참, 그때 뱃사공 처녀와 손님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어. 바로 너울을 일으킨 게 강에 살던 이무기였다는 거란다.”

“네? 이무기요?”

“그래. 압록강에는 용이 되길 기다리는 이무기 세 마리가 살았는데, 금기를 깨고 사람을 해치면 용이 될 수 없었지. 하지만 스스로 물에 빠진 사람은 먹어도 됐거든. 강 가운데를 다스리던 이무기 하나가 매일 지나다니는 처녀의 '살냄새'를 못 참고 너울을 일으켜 잡아먹으려 한 거야. 다행히 까마귀가 그 이무기의 낌새를 눈치채고 계속 따라왔던 거지.”

“와! 그럼, 까마귀만 이무기의 짓인 줄 알았네요?”

“그렇지. 뱃머리를 딛고 있던 발 말고 다른 발은 물속에 담근 채, 날갯짓으로 너울을 누르며 이무기와 싸우고 있었던 거야.”

아빠는 팔로 허공을 할퀴는 시늉을 했다.


※ 본 이미지는 구글 Gemini를 활용하였습니다.


“결국 이무기는 까마귀의 발톱에 치명상을 입고 물러났어. 뿔까지 돋아나 용이 되는 게 얼마 안 남았던 녀석인데… 욕심을 못 이긴 거야.”

“왜 참지 못했을까요? 조금만 기다리면 용이 됐을 텐데.”

살아있는 모든 건 욕망을 다스리기 힘들어하거든. 하지 말라는 걸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해선 안 되는 금기는 못 본 체하면 되고, 하지 말라는 금기는 안 하면 된단다. 그런데 그럴수록 욕망이란 벌레가 귀에 기어와 속삭이며, 갉아먹으라고 부추긴단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여 더 욕망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행하고 마는 거지.”


“아…함… 아빠, 그래서… 그 뒤에는요?”

아빠의 이야기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하는지, 딸의 눈꺼풀이 스르르 무거워졌다.

“우리 딸, 또 잠이 오는구나.”

아빠는 잠든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에게 들려주듯 나지막이 이야기를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할머니에 대한 짙은 그리움과 함께 깊은 안도감이 배어 있었다.

“까마귀는 처녀가 사는 초가집 지붕으로 날아갔단다. 그 거대한 날갯짓에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지. 그날 이후로 뱃사공 처녀는 더 이상 외로운 밤을 보내지 않았다고 해. 지붕 위 까마귀 덕분에 누우면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거든.”

밖에서는 귀뚜라미 소리가 할머니의 자장가처럼 울려 퍼졌다. 아빠는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빠는 잠든 딸을 품에 안은 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저 깊고 깊은 어둠을 향해 바라보았다.

“여보, 당신은 처음 이 집에 와 그 까마귀를 보고 기절했었지. 당신이 놀란 후로… 까마귀가 초가 지붕에 앉는일이 없어졌구려. 하지만 우리 딸은… 아무래도 그 까마귀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소.”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목 안에서 뜨거운 울음이 맴돌았다.

그때, 강가 초가집 위로 별똥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그 밤하늘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조용히 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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