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할매
“보리 엄마, 나와보거라—!”
마치 벼락이라도 친 듯, 홀로 사는 옆집 할매 무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평소보다 한층 거칠고 짜증 섞인 목소리에는 불길한 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할매 왔어요? 엄마는… 순이 엄마가 불러서 잠시 나갔는데요.”
대신 문을 연 것은 맏아들 보리였다. 보리는 사냥을 나간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려 자신이 짊어질 수 없는 무게를 다 잡는, 억지로 의젓한 척하는 아이였다.
“이런, 그럼 안 되는데…”
할매 무녀가 깊게 팬 주름 가득한 이마를 더 찌푸렸다.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이 귀기가 서린 듯 더욱 사나워졌다.
“할매요? 왜요? 뭐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요?”
다른 아이들은 할매만 보면 도망치기에 바빴지만, 보리는 그녀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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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아, 할매가 지금은 저래 보여도 젊었을 때는 주변 마을까지 곱기로 소문이 자자했었느니라.”
“할매가 예뻤다고요? 애들은 할매가 늙어 쪼그라든 호박 같다고 놀리는걸요.”
보리는 아이들이 함부로 할매를 놀리지 못하게 막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보리에게 할매 무녀는 무서운 무당이 아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자신을 구원해 주었던 그녀의 손길과 목소리를 보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보리 엄마! 보리가 앓고 있지? 내 들어갈 테니, 얼른 준비하거라.”
할매 무녀는 이상할 만큼 보리가 아프기만 하면 어김없이 찾아왔다고 했다. 늦은 밤에도, 마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보리야, 거기서 헤매지 말고, 할매 목소리만 듣고 따라오너라. 옳지, 옳지. 잘한다. 우리 똑똑한 보리, 할매 말 잘 듣고 따라오는구나.”
그녀는 마음을 안정시키듯 보리의 귀에 중얼거리며, 쭈글쭈글한 손으로 보리의 아픈 부위를 한참이나 문질러주었다. 놀랍게도 사경을 헤매던 보리는 어느새 숨을 고르며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훠이— 훠이— 보리 몸에 달라붙은 잡것아, 당장 꺼지거라!”
엄마 말로는,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긴 것도 다 할매 무녀 덕분이라 했다. 보리에게 할매 무녀는 귀신보다 무서운 병마로부터 자신을 지켜준 생명의 은인이자, 절대적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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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흉몽이 내내 마음에 걸려 왔느니라. 호랑이가 네 아비를 물고 가는 불길한 꿈이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보리를 걱정하더구나. 큰 변고가 현실로 닥치기 전에 알려주러 왔느니라.”
할매 무녀는 무당 일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였다. 누군가는 신이 더 이상 그녀에게 점지해 주지 않는다고 했고, 누군가는 몸이 쇠약해져 굿판조차 설 수 없어 그만뒀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주름 속에는, 젊은 날 인간의 생명에 깊이 관여하며 반드시 치러야 했던 업보의 대가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할매, 장난치지 마세요. 아빠한테 그깟 호랑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컷 호랑이를 네 마리나 혼자 잡은 아빠가 당할 리 없어요.”
보리는 고개를 들고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 마을 사냥꾼 중에서 아빠가 제일 세고, 고구려에서 최고로 활을 잘 쏜다며 늘 자랑하곤 했었다.
“네 이놈!! 고놈의 주둥아리 때문에 부정을 탄다! 네 아비가 호랑이한테 죽어도 좋다는 말이냐?”
할매 무녀가 귀청이 찢어질 듯 무섭게 호통을 쳤다. 평소 구부정하던 허리가 순식간에 꼿꼿하게 펴지며, 작던 몸집이 갑자기 보리의 아버지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다. 매서운 눈초리가 보리를 꿰뚫자, 보리는 덜컥 겁을 먹어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아가, 벌써 울 필요는 없다. 신께서 이미 점지하신 일이나, 지금이라도 빨리 신께 간절히 기도하면 어찌 피할 수 있을지 모르니라.”
다시 평소의 구부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할매 무녀가 보리의 등을 다독였다.
“흑… 할매… 엄마가 안 계시는데… 제가 대신 기도해도 괜찮을까요?”
“손을 이리 내보거라.”
할매 무녀는 보리의 손목을 잡고, 자기 얼굴을 보리의 손바닥에 가까이 갖다 댔다. 그리고 천천히,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하느리나 땅이나… 하느리나 땅이나… 하느리나…”
“엉엉… 할매요… 아빠를, 살려주세요… 엉… 엉엉…”
보리는 참고 있던 울음을 마침내 터뜨렸다. 억눌렸던 두려움이 폭발하는 순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아버지의 흉몽이 흡사 눈앞의 현실처럼 선연하게 아른거렸다. 아직 어린아이인 보리는 서러움에, 무서움에 목 놓아 오열했다.
05_백발의 노인
바로 그때,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할매 무녀의 영(靈)이 복사꽃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신령의 마당에 홀연히 닿았다.
“아가야, 그만하거라. 사람 일에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네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더냐?”
평상에 누워 있던 백발의 노인이 길게 끌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의 옆에는 시중드는 백발의 노파가 지루한 표정으로 부채질하고 있었다.
“네 살날도 이제 손가락으로 셀만큼 남았느니, 남은 삶은 편히 쉬거라. 아가가 할 일은 이전에 모두 끝났니라.”
백발의 노인은 자기에게 절하고 있는 여인이 안쓰러웠다.
“에고… 에고, 나도 쉬고 싶다오… 쉬고 싶어…”
옆에서 듣고 있던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발의 노파가 백발노인에게 부채질하다가 힘이 들었는지, 자기 등을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노파는 목이 기이할 정도로 길었고, 얼굴의 주름에 비해 하얗고 고급스러운 옷이 어쩐지 묘하게 잘 어울렸다.
“신령님… 제가 미련하여 죽을 날이 가까웠는데도… 남편도 자식도 무엇 하나 남기지 못했습니다. 평생 사랑하는 이의 옆에 있고 싶어 남들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이 세월을 견뎠습니다.”
스물 초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처녀가 고개를 살포시 들어 누워 있는 신령에게 간청했다.
“저한테도 친손자처럼 아끼는 아이가 있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의 아비가 원한에 찬 귀신에 씐 호랑이에게 해코지당하는 흉몽을 꾸었습니다. 마침, 제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나타나 제게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더군요. 밉지만 그의 핏줄인 아이의 아비를 모른 척할 수가 없습니다.”
“아가,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호랑이한테 달라붙은 귀신은 그놈한테 죽은 원귀라 쉽사리 물리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지 않느냐? 그냥 모른 척해도 된다. 아가는 사람들한테 입은 상처가 몹시 크지 않더냐? 조금 쉬다가 내 곁으로 오너라.”
“신령님, 살 만큼 살아 며칠을 더 산들 무엇하겠습니까? 남아있는 이 짧은 명(命) 전부를 대가로 원귀를 물리쳐 주시길 간청하옵니다.”
처녀가 다시 절하며 간청했다. 신령은 앉더니 처녀의 검은 눈동자에 손가락을 대어, 그녀의 머릿속에 피어나는 파노라마 같은 주마등을 들여다보았다.
“너의 가여운 마음, 잘 알았다. 아가가 나와 함께 쌓은 업이 깊으니, 내 옆으로 일찍 오는 것도 좋겠지.”
신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청을 받아들이마. 허나, 그 아이의 아비를 살리는 일은 오직 아이의 순수하고 간절한 정성만이 이룰 수 있다. 너는 원귀를 막아내는 대가만 치를 뿐이다.”
06_임무
“보리야, 네가 아버지를 살릴 수 있겠구나. 신령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지금부터 할미의 말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따라야 한다. 그럴 수 있겠느냐?”
“할매… 엉엉… 진짜로… 잘 따를게요.”
보리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개울로 가거라. 그곳에 햇빛을 오랜 세월 담아둔, 기도를 올리기에 좋은 받침이 될 돌이 있니라. 그것이 ‘하늘의 받침’이니 챙기거라. 그런 후에 네 집 밭에 가서 오랫동안 땅의 기운을 받아 잠겨있던 돌을 찾거라. 그것이 ‘땅의 받침’이니라.”
“챙긴 두 개의 돌을 부엌 아궁이에 넣어 뜨겁게 달구어 두거라. 오늘 밤, 머리 위로 보름달이 뜨면 보리 혼자서 두 개의 받침돌을 당산나무 옆에 있는 허물어져 가는 돌탑 위에 올리고 기도해야 한다. 반드시 보리 너 혼자여야 한다. 아직 어린 네가 이 무거운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
할매 무녀가 보리 얼굴 가까이에서 확신을 얻으려는 듯 물었다.
“할매… 할게요. 제가 꼭 할 테니… 아빠를, 살려주세요… 엉엉…”
“그래. 할매는 보리를 믿는다. 앞으로 보리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게 아쉽기만 하구나. 나한테는 네가 내 친손자와 마찬가지였니라. 보리야, 밥 잘 먹고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할매 무녀는 보리를 마지막으로 안아주었다. 작고 야윈 손으로, 아이의 등을 오래도록 토닥였다. 그녀의 몸이 점점 희미해지고 소멸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야위고 작아졌다.
“이제 서둘 거라. 신령님이 두 개의 돌까지 이끌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거라.”
보리가 벌떡 일어나 개울 쪽으로 달려갔다.
‘저 독한 원귀에 씐 호랑이에게서 이 아이의 아비를 구하려면… 이 방법 외에는 없구나. 보리가 어리지만 야무져 잘할 테니… 나는 이제 원귀만 처리하면 된다. 이것이 내… 마지막 소임이다…’
할매 무녀는 구부정한 허리를 한 채 힘겹게 굿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07_동녀
복사꽃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마당 한가운데,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복숭아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넓게 뻗고 있었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에서 흘러나온 달콤한 향이 마당 가득했다.
그때 허공을 가르며 버선을 신은 오른발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이내 할매 무녀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조금의 당황도 없이 이미 이곳이 자신의 갈 길임을 아는 듯, 신령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신령은 기다란 백발 수염을 돌돌 말아 머리에 올렸는데, 말아 올린 수염이 할매 무녀의 키보다 더 위로 솟구친 모습이었다. 그는 빗자루처럼 생긴 복숭아나무 가지를 들고 마당을 쓸 듯 휘저으며 할매 무녀 앞으로 나섰다.
“아가, 오거라. 아가, 오거라.”
“사람의 덧없는 길에서 벗어나 신의 길로 오거라.”
“아가, 오거라. 어서어서 오거라.”
신령은 발 앞을 쓸며 경쾌하게 흥얼거리며 노래했다.
“후—후—후—”
숨결을 할매 무녀의 얼굴 가까이에 불어넣자, 숨결을 맞을 때마다 점점 젊어지더니, 스물두세 살 정도의 아리따운 처녀가 되었다가, 다시 예닐곱 살 쯤의 작은 여자아이로 변했다.
펑—!
짙은 백색 연기 속에서 신령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동녀(童女)야, 이제야 네가 내 옆으로 왔구나. 너의 오래된 육신과는 이젠 이별할 준비를 하자꾸나.”
연기 속에서 다시 나타난 신령은 금빛 장군복을 입고 날이 시퍼런 삼지창을 손에 들고 있었다. 용의 비늘인지 물고기 비늘인지 모를 큰 비늘이 옷을 덮었고, 백색 연기가 그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네, 신령님.”
양옆으로 머리를 둥글게 말아 올린 색동옷의 여자아이가 고개를 깊게 숙이며 답했다. 이 아이가 바로 할매 무녀의 영적인 본체, 동녀였다.
파드닥—! 파드닥—!
좀 전까지 신령에게 부채질하던 노파가 본래 모습인 학으로 변하더니 날개를 퍼덕였다. 어느새 부채가 변했던 깃털로 돌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동녀야, 학 선녀를 타는 건 너도 처음이겠구나. 앞으로 자주 함께할 테니 언니처럼 잘 따르도록 하여라.”
신령이 먼저 학 등에 올라타며 말했다.
동녀는 따라 올라타려 했지만, 학의 긴 다리 탓에 등에 닿을 수가 없었다. 학은 그저 모른척했다.
“학 선녀님, 어린 동녀가 인사드립니다.”
동녀는 눈치를 채고 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고개를 돌리고 있던 학이 마지못해 긴 다리를 접어 동녀가 탈 수 있게 했다. 동녀가 신령 뒤에 올라타자마자 학은 천천히 일어섰다.
‘아… 신의 세계가 이런 것이었다니. 난 그저 겉모습밖에 몰랐구나.’
눈앞에 구름과 산봉우리들이 펼쳐졌지만, 학의 다리는 여전히 복숭아나무가 있는 마당에 놓여있는 신기하고 기묘한 풍경이었다.
“학 선녀야, 이제 동녀의 육신이 있는 곳으로 가자꾸나.”
신령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학이 몇 번 힘껏 날갯짓하자, 그들은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부채로 변했던 깃털만이 바람에 날려 산봉우리 위로 이리저리 흩날렸다.
굿 방은 많은 촛불들로 환하게 밝았다. 방바닥에는 할매 무녀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 있었다. 깨끗하게 다려진 흰옷을 입은 그녀는 숨소리도, 작은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동녀야, 가서 이승의 마지막 미련을 마저 보내고 오너라.”
벽에 걸린 그림에서 동녀가 미끄러지듯 쓱 걸어 나왔다.
“우리가 좋아했던 복숭아꽃이야.”
동녀는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꽃을 할매 무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굿 방 안을 채우던 묵직한 향냄새가 말끔히 사라지고, 달콤한 아련한 복숭아향이 가득 피어올랐다.
“얼마나 외로웠니? 남들은 네가 속으로 앓는 줄도 모르고 뒤에서 손가락질이나 하고… 사람이란 게 참 야속하다. 그렇지 않니?”
동녀는 이승의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마지막 한을 달랬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난, 알아. 정말 수고 많았어. 이제 편히 쉬어.”
동녀가 할매 무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복숭아 향이 절정에 달하는 그 순간, 할매 무녀는 마지막 숨을 길게 내쉰 뒤 편안히 이승을 떠났다.
“동녀야, 그만 일어나거라. 아이 아비가 호랑이한테 죽임을 당할 시간이다. 어서 그놈한테 달라붙은 원귀를 잡으러 가자꾸나.”
신령이 창을 방바닥에 ‘쿠우웅’ 소리가 나게 때리자, 신령과 동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이때 굿 방의 모든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남은 것은 무녀의 희생을 담은 고요한 육신과 진한 복숭아꽃 향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