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_보리
노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마을에 살얼음 같은 공포가 퍼진 지도 이미 보름이 흘렀다. 그날은 당산나무 위로 보름달이 차갑게 높이 떠 있는 밤이었다. 당산나무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굵은 가지를 사방으로 뻗어,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기괴하고 을씨년스러운 달그림자를 대지 위에 새겼다. 반면, 달빛에 물든 마을의 초가지붕은 잘 익은 주렁박처럼 노랗게 은은히 빛이 났다.
하지만 마을은 죽은 듯이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괴괴했다. 모든 벌레가 울음을 그쳤고, 평소 밤새 얄궂게 짖어대던 똥개마저 주둥이를 꾹 다문 채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이 숨 막히는 정적, 짙은 달그림자 아래, 아홉 살 보리가 홀로 서 있었다.
보리는 어린아이의 체구에는 버거운 커다란 돌덩이를 부여잡은 채,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돌탑의 맨 꼭대기에 올리려고 온 힘을 다해 씨름하고 있었다.
“하아… 겨우, 올렸다…, 헉 헉.”
낮에 개울에서 주워 온, 긴 세월 햇빛을 머금어 온 평평한 돌이었다. 돌을 얹고 나니, 아홉 살짜리 아이의 여린 몸은 힘이 풀려 자꾸 주저앉으려 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밭의 깊은 흙 속에 묻혀 있던, 거칠고 모가 난 돌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은 어린 보리가 짊어져야 할 간절한 기도의 무게였다.
“제발… 끙… 이번 한 번만… 제발요!”
돌무더기를 발판 삼아 올라선 보리는, 덜덜 떨리는 팔을 머리 위로 힘겹게 뻗어 돌을 들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얹자, 돌탑이 위태롭게 요동쳤다. 마치 사냥 나간 아빠의 목숨이 금방이라도 꺾일 듯 흔들렸다.
‘돌이 떨어지면 안 돼. 만약 이 돌탑이 무너지면 아빠가 돌아오지 못하는 건… 제발. 모두, 내 정성이 부족한 탓이 되고 말 거야.’
아이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울컥 고였다. 아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돌탑의 틈새에 조그만 돌멩이를 끼워 넣어 중심을 잡았다. 어린아이의 필사적인 정성이 통했는지, 돌탑은 더 이상 요동치지 않았다. 개울의 빛을 담은 돌과 밭의 어둠을 담은 돌, 약속된 두 개의 돌을 모두 올린 보리는 곧장 떨리는 두 손을 모아 허공에 대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빠를… 호랑이로부터 지켜주세요. 부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제발 아빠를 지켜주세요.”
얼마나 힘에 부쳤는지 기도하던 손이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마에서 턱으로 흐른 물방울이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그것이 차가운 이슬인지, 아니면 기도를 바치는 아이의 뜨거운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03_돌탑 쌓기
“오랫동안 개울에서 햇빛을 받은 평평한 돌을 먼저 찾거라. 그런 다음, 밭에 깊숙이 묻혀있던 돌을 꺼내거라. 두 개의 돌을 정확한 순서대로 올리면 된다.”
옆집 할매 무녀가 시킨 그대로, 보리는 새벽부터 밤까지 몸을 놀려 약속된 두 개의 돌을 준비했다.
“마을에 첫 피가 흐르는 것은, 오래전에 지어진 돌탑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보리야, 네가 다시 돌탑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은 오래전, 도깨비 왕이 이 마을에 내려준 단 하나의 계약이니라.”
“그걸 누가 정했는데요?”
“사람도, 도깨비도… 누가 정했는지 시간 속에 모두 잊었지만, 이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겨선 안 되는… 허나, 이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잊힌 일이 되고 만 것이지.”
“그럼, 도깨비가 나타나서 아빠를 도와주나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도깨비는 계약을 잊지 않으니, 그저 믿어보자꾸나.”
허리까지 길게 땋은 머리를 한 보리는, 마침내 완성된 돌탑 앞에 주저앉아 다리를 꽉 쥐었다. 차디찬 밤공기 속에서도, 부르르 떨리는 아이의 무릎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도깨비님… 제발 호랑이로부터 아빠를 지켜주세요. 딱, 딱…”
새하얀 입김이 처절하게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올 때마다, 밤공기 속 보리는 흔들리는 촛불처럼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딱… 딱딱… 제발… 도깨비님…”
보리는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벌리며 간절히 빌었다.
바로 그때였다. 돌탑 바로 뒤편, 짙고 두꺼운 어둠의 장막 속에서 무언가가 육중한 짐승의 무게로 움직였다. 보리의 두 눈이 극도의 공포에 질려 찢어질 듯 커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완전히 잊어버렸다.
어린아이가 감히 보아선 안 될, 만나선 안 될 존재가 분명 그곳에 있었다. 깊은 어둠을 뚫고, 이글거리는 불덩이 두 개가, 아주 느리고 집요하게— 그러나 피할 수 없게 다가왔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산중의 왕, 호랑이의 눈동자였다.
털썩—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보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려움에 축 늘어진 목은 흡사 압도적인 괴물 앞에 절을 올리듯 무력하게 수그러졌다. 아이의 지린 바지에서는 뜨거운 오줌의 김이 꽃잎처럼 피어올랐다.
훅—! 훅—!
보리의 뒷덜미에, 까칠하고 거친 숨결이 연약한 살갗을 긁었다. 그것의 콧김은 따뜻했으나 쇠처럼 무거웠고, 거칠었다.
그것은… 귀신보다 무섭다는 호랑이였다.
훅—! 까칠한 숨결이 보리의 목덜미를 다시 휘감았다. 호랑이의 두 눈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이제 막 보리의 여린 살을 꿰뚫고 들어갈 직전이었다.
“컥! 컥컥!!”
보리의 공포에 질린, 그러나 필사적인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마침내 돌탑의 돌에 툭 떨어졌다.
그 순간, 호랑이는 날카롭게 갈린 창에 찔린 듯 맹렬히 경련하며 뒷걸음질 쳤다. 영물인 그의 거대한 눈은 휘둥그레졌고, 통제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고통에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한 살의를 품었던 눈빛은 이제 통제할 수 없는 치욕과 격렬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은 흡사 내장이라도 강제로 토해내려는 듯 처절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알 수 없는, 오래된 약속의 힘에 결박된 것처럼 두려워했다.
쿠당탕—!
남쪽 산을 군림하던 당당한 젊은 수컷 호랑이가 뒷걸음질 치다 어이없을 정도로 넘어졌다. 자신감 만만하던 앞발이 공중을 향해 잠시 허둥지둥 버둥거렸다. 그 치욕에 사로잡힌 채, 호랑이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